전쟁...../한국전

지평리서 중공군 격퇴…전쟁 흐름을 바꾸다

구름위 2017. 1. 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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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서 중공군 격퇴…전쟁 흐름을 바꾸다

<19> 참전 위해 장군에서 중령으로 ‘영웅 몽클라르’

프랑스 해병대 등 정예군 이끌고 참전

인해전술 중공군 맞아 백병전 끝 대승

중공군 상대 첫 승리 전쟁 판도 바꿔

2012년 ‘2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

 

 

기사사진과 설명

몽클라르.


 

 




여기 진정한 영웅이 있다. 실제 계급은 장군(중장)이지만 ‘대대급 병력은 중령이 이끈다’는 프랑스군 규정에 따라 자신의 계급을 영관급으로 낮추고 6·25 전쟁에 뛰어들어 지평리전투에서 중공군을 물리치고 큰 공을 세운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라르(Ralph Monclar)’ 중령.

몽클라르 중령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많은 공을 세워 15차례나 훈·표창을 받은 전쟁영웅이다. 그의 본명은 라울 샤를 마그랭 베르느레(Raoul Charles Magrin-Vernerey)이지만 ‘몽클라르’라는 가명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낸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병력을 파견하지 못하고 1950년 7월 22일 구축함 1척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후 몽클라르 장군의 건의로 지상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11월 29일 보병 1개 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병력은 많지 않았지만 해병대·공수부대·외인부대·친위대 등 최강의 정예군으로 편성돼 어느 나라 군대보다 강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몽클라르 장군 추모 사진전’.


 

 

 

프랑스대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미 2사단에 배속돼 1951년 1월 10일 원주에서 첫 전투를 경험했고 처음부터 용맹성을 과시했다. 첫 전투에서 1개 소대가 총검을 사용한 백병전으로 북한군 1개 대대를 격퇴하는 놀라운 사건을 연출했다. 특히 2월 13일부터 시작된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5일)에서는 미 제2사단 23연대와 함께 싸운 프랑스대대가 연대 규모의 중공군을 맞아 역시 백병전으로 격퇴하고 대승을 거뒀다. 참으로 놀라운 전과다.

지평리는 경기도 양평 동쪽 15㎞ 지점에 있는 병참선의 전략적 요충지다. 리지웨이 사령관의 반격 계획에 따라 시행된 제1단계 ‘선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을 회복하고, 횡성·홍천 일대에서 2단계 ‘라운드 업’ 작전에 들어가자 유엔군의 반격에 맞서서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시작됐고 마침내 지평리에서 일전을 치르게 됐다.

유엔군이 지평리 일대를 점거하고 방어에 들어가자 중공군 39병단 예하의 3개 사단 병력 3만 명이 이 지역에 진출해 있던 유엔군을 포위 섬멸할 목적으로 2월 13일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다. 아군은 지평리가 무너지면 중부권을 다시 빼앗기는 형국이었으므로 필사적으로 싸웠다.

첫날 전투에서 중공군은 여덟 차례나 공격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곳에 배치돼 있던 미 2사단 23연대 전투단과 이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 병력 5600명은 큰 위기를 잘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다음날 미군은 전날 전투에서 손실이 너무 커 악전고투하는 상황이 됐다. ‘네이팜탄’까지 사용하며 힘든 싸움을 계속했다. 저녁 7시가 되자 중공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중공군은 피리를 불며 인해전술로 포위망을 좁혀왔고 프랑스군은 수동식 사이렌을 울리며 맞대응했다. 중공군 1개 연대가 방어망을 뚫고 진내까지 들어오자 프랑스군은 백병전으로 맞싸워 적을 격퇴했다.

마침내 셋째 날(15일). 전투는 아침부터 치열했다. 유엔군은 3개 포병대대(미37포병대대·미503포병대대·미82대공포대대)의 지원과 우세한 화력으로 사주방어를 구축하며 완강히 버텼으나 역부족이었다. 탄약도 떨어졌다. 그때 미 9군단의 5기병연대(크롬베즈 대령)가 구원병으로 나타났다. 전차 23대에 보병 1개 중대 165명을 태우고 증원군으로 왔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도 큰 피해를 봤다. 이 전투에서 미군 피해는 전사 52명, 실종 42명, 부상 259명이었고, 중공군은 5000여 명이 전사하고 79명이 포로가 됐다. 프랑스군이 백병전으로 적과 맞서고, 미 23연대 전투단 장병들이 사력을 다해 싸운 결과 마침내 중공군은 퇴각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경기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열린 지평리 전투 상기 행사.


 

 

 

지평리전투 승전은 미군으로서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이고, 프랑스군은 용맹성을 증명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전투가 끝난 후 대한민국과 미국 정부는 프랑스대대에 부대표창을 수여했다.

몽클라르 중령은 한국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후 1951년 11월 30일 후임자에게 대대장직을 인계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4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장례식을 직접 주관하며 예우를 표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몽클라르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가 그를 2012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