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더 밀리면 끝”… 피로 지켜낸 240㎞ ‘워커라인’

구름위 2017. 1. 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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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밀리면 끝”… 피로 지켜낸 240㎞ ‘워커라인’

<21> 낙동강 방어선

후퇴 거듭하던 미 워커 장군,마산-왜관-영덕 잇는 마지노선 설정

서쪽은 미군, 북쪽은 국군이 맡아

죽기 각오하고 전투…백병전도 불사

B-29 융단폭격으로 北 예봉 꺾어

20일간 격전 끝 다부동전투 승리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반격 나서

 

 

기사사진과 설명

낙동강 방어선 요도. 북한군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 천연장애물을 최대한 이용했다.‘워커라인’으로도 불렸다.


 

 

 

1950년 7월 20일, 미 24사단이 대전에서 철수함으로써 중부전선의 요충지이자 교통의 중심지인 대전마저 빼앗기고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계속 후퇴하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보루는 부산이었고,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총반격할 교두보로서 ‘낙동강 방어선’을 선정하고 모든 부대에 8월 1일부로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도록 명했다.



8월 4일 240㎞ 방어선 구축

낙동강 방어선은 왜관을 중심기점으로 남쪽으로는 마산까지 120㎞, 동쪽으로는 낙정∼의성∼영덕까지 120㎞ 등 총 240㎞였다. 서부 지역은 미군이 맡고 북쪽은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도록 구역을 나눴다. 그러나 화력과 전투력이 미약한 국군이 적의 주공 방향인 북쪽의 120㎞를 담당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육군본부는 8월 11일부로 국군 5개 사단의 책임 지역을 왜관∼다부동∼신령∼포항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함으로써 약 80㎞의 지역을 담당하게 했다. 이로써 최후방어선은 200㎞로 조정됐다.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8월 1일을 기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자 낙동강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할 것으로 보고 신속히 추격해 낙동강을 돌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부산교두보를 반드시 지켜야 했고, 북한군은 김일성으로부터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기사사진과 설명

낙동강 전선을 방문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 미25사단장 킨 소장(오른쪽부터).


 

 


첫 전투

낙동강 방어선 첫 전투는 8월 4일 시작됐다. 3일까지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하고 4일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했는데, 이때 대구 북쪽 22㎞에 있는 다부동을 향해 적의 공세가 시작됐다. 적은 10개 사단 중 5개 사단을 대구 공략에 집중시켰고, 그중 3개 사단(1, 13, 15사단)이 상주∼구미∼대구 축선을 따라 다부동으로 몰려들었다. 이곳은 국군 1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8월 4일 북한군은 3개 사단 2만1500명의 병력과 탱크 34대, 박격포 등 각종 포 670문을 이끌고 국군 1사단이 방어하는 왜관∼낙정리 정면으로 공격해 왔다. 우리 1사단은 병력 7600명과 박격포 등 각종 포 172문이 고작이었다. 병력은 무려 3배, 화력은 10배나 강했다. 그러나 국군 장병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백병전도 불사했다. 첫날은 잘 막아냈다. 그러나 둘째 날(5일) 열세에 몰린 1사단은 사력을 다했으나 다부동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뺏고 뺏기는 공방전이 수일 동안 계속됐고 8월 13일 다부동 서북방의 감제 고지인 유학산(839m)과 가산(903m)을 뺏겼다.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여기서 밀리면 대구까지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역습으로 유학산을 되찾기로 했다. 그리고 ‘결사항전의 결의로 유학산을 도로 찾자’고 장병들을 독려했다.

8월 14일, 국군 1사단은 역습에 나섰다. 악전고투 끝에 15일 오전 중에 15연대가 328고지를 탈환하고, 12연대가 유학산의 8부 능선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또 11연대는 가산을 점령했다. 백병전은 서로가 뒤엉켜 피아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전투가 끝난 후 인원 점검을 할 때 적이 아군 속에 섞여 있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8월 16일은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왜관 서쪽에 적 4개 사단과 기갑부대 등 4만여 명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가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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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낙동강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북한군 T-34 전차. 국방일보 DB

1950년 8월 낙동강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북한군 T-34 전차.


 

 


융단폭격으로 위기극복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적을 일시에 섬멸할 수 있는 묘책을 찾고 있었다. 바로 2차 대전 때 사용했던 ‘융단폭격’이었다. 워커 장군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건의해 승인을 받았다. 8월 16일 오전 B-29 폭격기 98대가 일본에서 날아와 오전 11시58분부터 12시24분까지 26분 동안 960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낙동강 서북쪽 약목에서 구미에 이르는 67㎢가 쑥대밭이 됐다. 이 폭격은 북한군의 주력이 낙동강 동안을 막 넘은 뒤라서 효과는 기대보다 적었지만 큰 타격을 주었다. 1시간만 더 일찍 융단폭격이 시작됐다면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적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심리적으로 융단폭격에 놀라 하루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하루가 지난 18일부터 적은 다시 고개를 들고 공격해왔다. 전선은 다시 밤낮 육박전으로 피투성이가 됐고 낙동강은 핏빛으로 변했다. 적은 20일 밤부터 은밀히 철수하더니 8월 23일 완전히 조용해졌다. 인민군이 철수한 것이다. 적은 대구 정면의 방어가 하도 완강해 방어벽을 뚫지 못하자 영천(永川) 방면으로 이동했다. 20일 동안 격전을 치른 다부동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적은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영천으로 이동한 적은 한때 이 지역을 점령하고 위협적으로 공세를 폈으나 국군 8사단의 선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됐고, 국군과 유엔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서 북진 가도를 달리게 됐다. 한국의 마지노선은 낙동강의 기적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