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락-탈환-함락-탈환…11일 대혈투 끝 대역전승
- <22> 영천대첩
다부동서 막힌 북한군 영천으로 우회
2개 사단 T-34탱크 앞세워 대공세
두 차례 뺏기고 뺏는 치열한 공방전
국군 3개 사단 포위작전으로 적 섬멸
북한군 3799명 사살·309명 생포
탱크 5대 파괴·각종 포 2327정 노획
1950년 9월 영천전투 승리 직후 김용배(왼쪽)8사단 21연대장과 미고문관(오른쪽) 등이 파괴된 북한군 T-34 전차 앞에서 웃고 있다. |
1950년 8월 공세 때 ‘다부동전투’에서 실패한 북한군 2군단은 영천을 중간목표로 설정하고 그곳을 먼저 점령한 후에
대구나 경주를 점령한다는 우회기동계획을 세웠다. 그후 최종목표인 부산으로 향한다는 것이 북한군의 전략이었다. 따라서 9월 3일부터 13일까지
11일간 계속된 영천전투는 낙동강의 최후결전장이었다. 아군은 이 작전에서 영천을 두 번 빼앗기고 두 번 되찾는 대역전극을
벌였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로 이곳이 무너지면 대구를 점령하지 않더라도 영남 지역은 큰 위기에 빠진다. 북한군
15사단이 영천 공격의 선봉을 맡았다. 여기에 73독립연대와 103치안연대를 배속받아 2개 사단 규모의 병력과 T-34 탱크 12대, 각종 포
166문이 선두에 섰고, 1950년 9월 4일 영천대회전이 시작됐다.
영천을 방어하는 국군8사단은 21연대를 기용산 우측,
16연대를 양한동, 10연대는 포항지원(8일 복귀), 7사단에서 지원받은 5연대는 용산동, 3연대 1대대는 삼매동에 배치했다. 사단사령부는 영천
시내에 있었다. 적은 4일 새벽 1시쯤, T-34 탱크 10여 대를 앞세워 영천 바로 북쪽 자양(紫陽)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아군은 하루를
버티다 다음날 우측 방어진지가 무너졌다.
8사단은 방어 면적을 축소할 겸 방어에 유리한 기용산(영천 우측 12km) 일대로 철수해
급편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5일 새벽 1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한밤중에 북한군 15사단은 야포 166문, 전차 5대를 앞세워 2개
방면에서 일제히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돌파구가 형성되자 전과 확대를 위해 영천으로 집중 공격을 해왔다. 16연대도 순식간에 붕괴해 영천을 버리고
경주로 가는 이화동까지 철수했다. 북한군 15사단은 하루저녁에 16㎞를 진격해 9월 6일 새벽 3시 영천을 점령했다.
영천전투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2002년 5월 건립된 영천대첩비. |
적이 만일 경주까지 점령한다면 영일비행장까지 뺏겨 미군의 전폭기가 뜨지 못하고 각종 군수품 공급이 어려워져 작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적이 대구를 공격한다면 국군과 유엔군이 포위돼 붕괴할 수 있고, 현풍·안강·포항이 동시에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
유재흥
2군단장은 1사단장 백선엽 준장, 6사단장 김종오 준장, 8사단장 이성가 대령과 회의를 한 후 육본과 협의해 1사단에서 11연대, 6사단에서
19연대, 7사단에서 5연대와 3연대를 8사단에 배속해주고 영천을 재탈환하라고 명령했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워커 8군사령관에게 탱크 5대를
하루만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워커 사령관은 정 총장에게 “영천을 탈환하지 못할 경우 미8군은 일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소. 한국군 2∼3개
사단을 포함해 10만 명의 요원을 괌이나 하와이로 철수할 것이니 준비해 주시오. 이 일은 극비로 해 주시오”라고 부탁했다.
이로써
3개 사단 규모의 국군이 북한군 2개 사단을 포위하는 역포위작전을 구상하고 작전에 들어갔다. 9월 7일 새벽 1시쯤, 8사단 공병대대장 김묵
소령이 미군 전차 5대를 앞세우고 예비중대를 총동원해 영천 시내 역습에 성공했다. 인민군은 자고 있다가 기습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8일 오전 11시30분쯤 탱크 20대를 앞세우고 밀어닥친 북한군에 다시 영천을 내주고 말았다.
국군8사단 21연대(김용배 대령)는
영천에서 북방으로 20㎞ 떨어진 자천(滋川)에 있다가 철수명령을 받지 못해 북한군 3개 연대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처했다. 참호에서 사흘 동안
주먹밥으로 연명하면서 백병전으로 잘 버텨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아군 방어선이 있는 대천동으로 철수했다. 21연대가 버텨주는 바람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국군6사단 19연대 2대대의 김욱전 대위는 야간을 이용해 적 15사단 사령부 기습에 성공함으로써 적의 기세를 꺾었고,
제8사단 16연대 2대대와 3대대는 경주로 가는 길목에서 미군 폭격을 피해 ‘하화터널’ 속에 숨어있던 적 포병연대를 발견하고 일제히 공격,
섬멸했다.
9월 9일 아침, 역습에 들어간 국군1사단 11연대(김동빈 대령)와 6사단 19연대(김익렬 대령)가 영천 시내로 밀고
들어갔다. 10일에는 16연대 유해준 중령이 완산동에서, 8연대 박승일 중령은 유산동에서, 10연대 고근홍 중령은 이화동에서 일제히 포위 공격에
들어가 영천 일대에 진출한 적을 소탕했다. 적 15사단과 8사단 패잔병들에 대한 소탕작전은 9월 13일까지 진행됐다. 13일에는 최초의
영천방어선인 구전동-매곡동-인구동을 연하는 원래의 8사단 주저항선까지 회복했다. 영천에서 실패한 적은 경주 방면으로 패주했다.
9월
3일부터 13일까지 계속된 영천전투에서 아군의 희생도 많았지만 적은 완전히 섬멸됐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적 사살 3799명, 포로 309명,
탱크 5대, 장갑차 2대, 차량 85대 파괴, 화포 14문, 각종 포 2327정 노획의 대전과를 올렸다.
포로로 잡은 북한 군관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군은 영천대회전을 앞두고 결사항전을 결의했다. 김일성은 사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불러 이번에도 실패하면 반동으로 몰아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적은 완전히 붕괴, 퇴각하고 말았다. 낙동강 방어의 대미를 장식한 전투였다. 북한군은 낙동강전투에서 한 달 동안 무려 7만
명이 전사해 전력이 급격히 떨어지고(40% 이하) 사기도 저하됐다. 일부는 북으로 패주하는 것조차 힘들어 산으로 숨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공비들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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