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자유 수호, 178만 美영웅 ‘숭고한 헌신’

구름위 2017. 1. 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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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수호, 178만 美영웅 ‘숭고한 헌신’

<25> 잊어서는 안 될 미군의 희생
2016. 10. 19   16:53 입력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 위해…

 

미군 5만4246명 전사·8177명 실종 등 17만2847명 희생

대통령·장군 등 최고위층 아들 142명 참전 35명 목숨 잃어

미, 전쟁비용 670억 달러 지출 현재 가치로 767조 원 달해

 

기사사진과 설명
워커(왼쪽 둘째) 장군이 아들 샘 워커 대위를 콜린스(왼쪽) 참모총장에게 소개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워커(왼쪽 둘째) 장군이 아들 샘 워커 대위를 콜린스(왼쪽) 참모총장에게 소개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미군은 1950년 7월 1일 스미스대대 장병 540명이 부산에 상륙한 이래 3년1개월 동안 178만 명이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낙동강방어전투·장진호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열심히 싸웠고 희생도 많았다. 삼복더위를 견뎌야 했고 적보다 더 무서운 동장군(冬將軍)과 싸우면서 풍토병도 이겨야 했다. 식량·화포·탄약·차량 등 모든 전쟁 물자를 다 갖고 와 싸우면서 목숨까지 바쳤다. 전사 5만4246명, 실종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자 10만3284명 등 17만2847명이 희생했다. 세계 최강국 국민이 약자를 위해 바친 희생은 값지고 숭고했다.

특히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는 것은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장관·장군 등 최고위층 아들 142명이 참전해 그중 35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육군중위는 1952년 미 3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워커 8군 사령관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미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해 부자가 모두 한국전 참전 가족이 됐다. 아버지는 의정부에서 순직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에서 사단장, 군단장, 8군사령관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지니 밴 플리트 2세도 B-52 폭격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2년 4월 4일 새벽 평남 순천 지역에 야간출격을 나갔다가 전사했다. 미 해병 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장군의 아들 윌리엄 해리스 소령은 중공군의 2차 공세 때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미 중앙정보국 앨런 덜레스 국장의 아들 앨런 메시 덜레스 2세도 해병중위로 참전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상이용사로 살고 있다. 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1896~1984) 대장의 아들도 참전했다가 부상했다.

하버드대학은 교내 예배당 벽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20명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추모하고 있다. 월터리드 미 육군병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은 용사 수십 명이 아직 침상에 누워 있다. 미 의회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거나 중상을 입은 장병 중 공로자를 선발해 136명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했다. 이 숫자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의 124명보다 많은 것이어서 6·25전쟁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나를 말해준다. 마지막인 136번째 명예훈장의 주인공은 고(故) ‘에밀 카폰’ 대위로 전사한 지 62년 만에 추서(2013년 4월)됐다. 그는 군종신부로서 고통받는 부상병들을 마지막까지 돌보다 중공군에게 포로가 됐다. 후에 자신도 폐렴에 걸려 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환자들을 돌봤다.


 

기사사진과 설명
6·25 전쟁 당시 전선에서 미사를 드리는 미군.  국방일보 DB

6·25 전쟁 당시 전선에서 미사를 드리는 미군. 국방일보 DB


 


특히 안타까운 것은 1950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졸업생 365명 중 110명이 한국전에 참전해 41명이 전사한 것이다. 꽃봉오리들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이름도 모르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 와서 떨어졌다. 미군은 전쟁 후에도 대를 이어 한국을 위해 싸웠다. 휴전 이후 63년 동안 485만 명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다.

한편 워싱턴 시내 한가운데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 있는데, 매년 수백만 명이 이곳을 방문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이 공원에는 2개의 큰 볼거리가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판초 우의를 입고 수색 정찰하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형물이다. 1950년 11월 중공군의 2차 공세 때, 함경남도 장진호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미 1해병사단 장병들의 영웅적인 철수작전을 기리기 위해 수색 정찰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 옆에는 검은 대리석에 전사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새겨 넣은 기념비가 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 한 구절의 비문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나를 말해준다. 이보다 더 감동을 주는 한 구절이 잔디밭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1950 KOREA 1953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일찍이 만나본 일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부름에 응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 비문은 국가(미국)가 국민에게 스스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했다. 2009년 미국의 국방정보센터(CDI)는 미 의회조사국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6·25전쟁 당시 미국이 부담한 전쟁비용을 총 670억 달러로 산출했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910억 달러(약 767조 원)에 달한다. 이는 2차 대전 비용 3조2110억 달러보다는 적지만, 1차 대전(6420억 달러)이나 베트남전쟁(6500억 달러)보다 많다. 그들은 이렇게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하면서 한국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