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국군·유엔군 총력전 90일 만에 ‘서울 수복’

구름위 2017. 1. 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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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유엔군 총력전 90일 만에 ‘서울 수복’

<29> 수도 서울 탈환작전

 27일 미10군단 서울 탈환

우리 해병대 밀리고 쓰러지면서도 과감하게 전진 또 전진!

 

박정모 소위·양병수 일병·최국방 수병

‘태극기 게양’에 온 국민들 환호

 

 

 

기사사진과 설명

완전히 평정된 서울시내로 국군이 입성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최대 관심사, 서울 탈환

인천상륙작전 이후 최대의 관심은 서울을 어떻게 빨리 수복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탈환 작전에 총력을 기울였고, 김일성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용한 모든 군사력을 서울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북한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던 9사단과 18사단 병력 2만여 명을 서울로 이동시키는 한편 105전차사단을 서울로 북상시키고 철원에서 편성한 25여단과 사리원에 주둔해 있던 78연대를 서울 방어에 투입했다. 시가전에 대비해 주요 교차로마다 장애물을 설치하고, 인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인 행주산성과 영등포 지역에 대한 집중방어에 들어갔다. 특히 서쪽의 길목인 연희고지(88고지)와 104고지를 인왕산으로 연결되는 서부방벽(최후 저항선)으로 삼고 인민군 25여단을 이곳에 배치했다. 적 25여단은 보병 2개 대대, 중기관총 4개 대대, 공병 1개 대대, 76밀리·120밀리 박격포 1개 대대 등 2500여 명으로 중무장한 부대였다. 이들은 서울시민을 강제 동원해 서부방벽에 동굴까지 구축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서울 탈환작전의  시가전 모습.

서울 탈환작전의 시가전 모습.


 

 

 

美10군단장 美제1해병사단에 명령 내려

한편 인천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한 미 10군단장 아먼드 소장은 9월 18일 미 제1해병사단에 서울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한국 해병 3개 대대를 미 해병 3개 연대에 각각 1개 대대씩 배속시켰다. 미 1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9월 19일 작전회의를 열어 ‘김포지구의 미 5해병연대는 즉시 행주나루로 한강을 도하하고, 미 1해병연대는 영등포 이남 지역에 대한 작전책임을 미 7사단에 인계하고 마포나루로 한강을 도하하며, 미 7해병연대는 5해병연대의 뒤를 이어 능곡 방향으로 도하한 후 서울로 진입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사단 수색중대에 19일 20시에 행주에서 한강을 건너라고 명했다. 그러나 수색중대는 행주산성(105고지)에 주둔한 적의 강한 공격을 받고 실패했다.

20일 새벽 4시, 미 5해병연대는 국군 해병2대대(대대장 김종기 소령)와 함께 행주나루 방향으로 한강 도하를 시도했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1차 시도에 실패하고 2차에는 성공, 22일 수색을 거쳐 연희동까지 진출했다. 미 7해병연대와 국군 해병1대대(대대장 고길훈 소령)는 사단 예비대로 미 5해병연대의 뒤를 이어 한강을 건넌 후 22일 연희동까지 진출, 104고지전투에는 국군 해병1대대가 선봉에 섰다. 그러나 적의 저항이 하도 강해 100여 명을 희생시키고도 점령에 실패했다. 미 5해병연대가 증원군으로 투입됐다. 그래도 실패하자 결국 미 공군의 지원을 받고서야 25일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미7해병연대 연희고지 점령 후 한미 해병대 시내 진격

미 7해병연대는 연희고지를 점령한 후, 북악산(342고지)을 우회해 미아리고개로 향했다. 미 1해병연대와 국군 해병3대대는 영등포 남쪽에서 작전지역을 미 7사단에 인계하고 22일 영등포 시내로 돌진, 시가전을 치르며 영등포를 장악했다. 24일에는 마포나루로 도하해 서대문 방향으로 진출했다. 영등포가 점령되고 연희고지가 점령되자 북한군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한편 서울 진입은 한강로-후암동-퇴계로-동대문-청량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북쪽은 해병사단이, 남쪽은 제7보병사단이 맡아 공격에 들어갔다.

마침내 25일,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는 신사동에서 한강을 도하해 남산을 공격하고, 장충단과 동국대 뒷산 고지를 점령했다. 적은 미 7사단 32연대 지역으로 26일 미명을 기해 1000여 명으로 역습해 들어왔다. 2시간여 동안 근접전이 계속됐다. 날이 밝아오자 적은 394구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 포로도 254명이 잡혔다.

26일 새벽, 미 32연대와 국군 17연대가 남산(265고지)을 완전히 점령해 우군의 공격을 엄호할 수 있게 되자, 한미 해병들이 시내를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적이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저항하는 바람에 진출이 늦어졌다. 보통 1개 교차로를 통과하는 데 1시간 이상씩 걸렸다. 27일도 시가전은 계속됐다. 탱크로 밀어붙이고 로켓포와 기관총으로 빌딩을 부수며 격전을 벌였다. 미 1해병연대는 마포-서대문 방향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적은 1개 대대가 탱크 12대, 자주포, 120밀리 박격포 등으로 중무장하고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탱크 4대가 파괴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고 서대문 전투에서만 250명이 전사했다. 서울역 지하도에서는 적 1개 소대가 숨어서 저항하는 바람에 큰 위협이 됐으나 남산을 미리 점령하고 있던 국군 17연대의 협공으로 진압됐다.

9월 27일, 서울 동북쪽 낙산은 불바다로 변했다.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각종 포사격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가옥 1만8000채가 전소하고, 반 소실도 3000채나 됐다. 그런 중에도 국기봉에는 태극기가 펄럭였다. 패잔병들이 산을 넘고 있었고 양민을 향해 따발총을 쏘아대는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태극기를 게양한 것이다.



불사신처럼 적진 뚫고 태극기 게양

27일, 미 10군단은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 마지막 순간은 누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원래 이 지역은 미 해병의 작전구역이었지만 우리 해병대는 시청에서 중앙청 방향으로 전진했다. 광화문에서 중앙청까지는 적의 최후 저지선이다. 모래가마니 등 장애물을 겹겹으로 설치하고 탱크·자주포·기관총 등으로 저지하는 바람에 진출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우리 해병은 밀리고 쓰러지면서도 과감하게 전진했다. 2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 그는 불사신처럼 적진을 뚫고 중앙청으로 돌진, 28일 6시10분에 양병수 일병, 최국방 수병과 함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달았다.

150만 서울시민은 물론, 서울 탈환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환호했다. 28일 소탕작전을 끝내고 90일 만에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 환도식이 29일 12시 중앙청 홀에서 열렸다.

북한군은 서울탈환전투에서 1만3666명이 전사하고 4792명이 포로로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