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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학살·처형·납치가 일상… ‘생지옥’ 따로 없어

구름위 2017. 1. 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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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학살·처형·납치가 일상… ‘생지옥’ 따로 없어

<30> 적 치하 90일

남로당원, 우익 인사 무차별적 처형

시민들과 학생 동원 잇단 궐기대회4

0세까지 40만 명 의용대로 끌고가

농민 토지 몰수하고 강제 노력동원

 

공무원·학자 등 9만여 명 납치되고

학살 13만 명 등 총 99만 명 희생돼

 

 

기사사진과 설명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인민재판에서 경찰관 23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집행장으로 끌고 가고 있다.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사흘 만에 점령됐다. 하루아침에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공산주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서울이 수복되기까지 90일 동안 우리 국민은 말로만 듣던 생지옥을 경험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서울! 적의 탱크가 길거리에 즐비했고 팔뚝에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동네를 누볐다.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은 인민군을 앞세우고 가가호호를 방문해 ‘동무’니, ‘반동’이니 하는 용어를 써가며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우익 인사들은 재산 몰수와 함께 인민재판에 넘겨졌고 인민재판은 인간 사냥터가 됐다. 군중 속에서 “죽여라.” 한마디만 나오면 곧바로 처형에 들어갔다. ‘파리 목숨’이 현실이 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개도 못 들고 다니던 사람이 붉은 완장만 차면 높은 벼슬이나 한 것처럼 으스댔고,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 했다. 북한은 동네마다 인민위원회와 여맹을 조직하고, 내무서를 통해 공산 통치에 들어갔다. 서울시 인민위원장에는 이승엽(남로당 2인자)이 임명됐다. 그러나 박헌영의 예언과는 달리 서울에서 인민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자 서대문교도소로 먼저 달려가 죄수들을 석방하며 ‘영웅’ 호칭을 주었고, 풀려나온 죄수들은 보도연맹(남로당원)과 함께 ‘인민군 만세’ 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다니며 환영했다. 적십자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는 입원 중인 국군 환자를 전부 총으로 사살했다. 서울대병원 영안실 앞 언덕에 조그만 현충탑 하나가 있는데 그때 사살당한 이름도 모르는 무명용사 100여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공산당과 연합해 우익 인사 9500여 명을 죽였고, 8만4000여 명을 납북시켰다. 공산당 세상이 되자 국회의원 48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집회를 했고, 교회의 목회자 300여 명도 인민군 입성 환영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처형·납북·행방불명 신세가 됐다.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당은 목사·신부·승려·교령을 잡아 집단처형하거나 납북했다.

대전교도소에는 제주 4·3 사건 관련자와 14연대 반란자들 2000여 명이 수감돼 있었는데, 북한군이 대전까지 밀어닥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교도관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수감자들이 문을 부수고 도주하려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군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가 도착해 달아나려는 죄수들에게 총을 쏘며 겨우 진압했다. 정부에서는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대전·전주·김천교도소의 남로당원들을 모두 처형하고 후퇴했다.

적은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7월 3일부터 시민과 학생들을 동원해 궐기대회를 열고 인민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의용대’를 조직해 전선으로 내보냈다. 16세부터 40세까지 40만 명이 끌려갔다. 형과 동생이 낙동강 전선에서 만나 형제끼리 총을 겨누고 싸워야 하는 민족적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기사사진과 설명

1950년 9월30일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역 광장. 연합뉴스 DB


 


지방에서는 7월 4일부터 북한식 토지개혁에 들어가 농민들의 토지를 모두 강제로 몰수했다. 무상분배한다는 명분으로 토지를 빼앗아 갔지만, 이는 토지 수탈의 수단으로 악용됐을 뿐이다. 농민들은 강제노력동원에 시달려야 했고 인민군의 급식보급을 위해 쌀·보리·잡곡·된장·고추장 등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수탈당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우익 인사들을 잡아다 집단학살하고 달아났다. 9월 25∼26일 사이에 집단처형이 많았다. 대전교도소는 우익 수감자 6831명을 석방한다고 속이고 3㎞ 떨어진 용두동 고갯길로 끌고가 5000여 명을 죽였다. 광주교도소에서 300여 명, 고창에서 316명, 경남 함양에서 500여 명 등 전국적으로 12만8936명이나 희생됐다. 깊은 우물에 처넣거나 산골짜기에서 집단 학살이 이뤄졌다.

적 치하 90일은 형언할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협박과 살인, 재산 몰수, 처형, 납치가 일상적으로 이뤄졌고, 공무원, 군경, 정치인, 학자, 교수, 의사, 법조인, 종교인, 지방 유지, 교사 등 9만여 명이 납치됐다. 또한 학살 13만 명, 고문·처형 15만 명, 행방불명 30만 명, 부상 32만 명 등 총 99만 명이 희생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두 번째로 세상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우익 인사들이 악질적인 만행을 저지른 빨갱이들을 색출해 한풀이를 했다. “저 사람 빨갱이”라고 하면 즉시 체포됐다. 서울에서 잡힌 적은 인민군 1448명, 인민유격대 1979명, 노동당원 7661명 등이었다. 전국에서 모두 2만여 명이 체포됐다.

미아리 고개는 한(恨)을 남겼다. 북한군과 내무서원들이 서울에서 쫓겨 가면서 저명 인사들을 철사로 묶어 이 고개를 넘어 끌고 갔다. 그 길을 통과해야 의정부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시간에 쫓기자 전부 사살하고 도망갔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 끌려간 인사는 모두 3000여 명이나 됐다. 시민들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의 행진을 한 애국시민들! 이해연이 부른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그 시대 민족의 애환을 가장 잘 표현한 국민애창곡이 됐다.

“미아리 눈물 고개, 임이 떠난 이별 고개 /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그 고개여 / 한 많은 미아리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