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공산 측, 국군·유엔군 포로 19.6%(1만2760명)만 남으로 송환

구름위 2017. 1. 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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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측, 국군·유엔군 포로 19.6%(1만2760명)만 남으로 송환

<32> 전쟁 포로

6만5000여 명 중 5만2000여 명 실종 처리하고 끝까지 송환 안 해

미군 포로 2730명 영양실조로 사망 고문·협박 당하고 허위자백 강요받아

 

 

기사사진과 설명

1953년 판문점에서 유엔군 포로들이 남측 지역으로 송환되는 모습.


 



포로는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포로가 생겨난다. 6·25전쟁에서는 23만8000여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유엔군에게 잡힌 공산군 포로는 17만3000여 명, 공산군에게 잡힌 국군과 유엔군 포로는 6만5000여 명이다.

유엔군에게 잡힌 공산군 포로 17만3000여 명 중 8만8000여 명은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유의 길을 선택했고, 나머지 8만5000여 명은 공산 측으로 송환됐다. 자유의 길을 선택한 8만8000여 명 중 중공군 출신의 반공포로 4만1000여 명은 중립국인 인도로 송환됐다가 제3국으로 갔고 2만여 명은 자유중국으로 송환됐다. 북한군 반공포로 2만7000여 명은 거제와 제주도에 수감됐다가 이승만의 결단으로 1953년 6월 18일 석방됐다.

그러나 공산 측은 처음에 국군과 유엔군 포로를 6만5000여 명이라고 밝혔지만 실제 포로 교환 때는 1만2760명(19.6%)만 송환했고 5만2000여 명은 실종 처리를 하고 끝내 보내지 않았다. 특히 공산 측은 그들의 통계에서 한국군 327명과 미군 21명 그리고 영국군 1명이 자유진영으로 송환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국군포로 실종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처형 또는 병사했거나 강제노역을 시키기 위해 붙잡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포로가 돼 고난을 겪다가 1994년 귀국한 조창호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는 그 당시 500여 명의 포로가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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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판문점에서 북송되고 있는 북한군 포로. 연합뉴스 DB


 


한편 압록강 변에 있던 미군 포로들은 공군 조종사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에게는 세균전을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고문과 협박이 가해졌다.

중공군은 소련의 의견에 따라, 미군이 6·25전쟁에서 1951년 11월 이후 세균전을 한 것으로 판단하고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 이는 소련식 전략이다. 그러나 실제로 미군은 세균전을 하지 않았다. 6·25전쟁 중 미 공군 조종사 포로는 총 131명이다. 그중 78명이 1951년 11월 이후에 생포돼 세균전에 대한 고백을 강요받았고, 38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했다.

미군 포로들은 현대전에서 가장 야만적인 대우를 받았다. 대부분 영양실조에 걸렸고 체중은 40% 가까이 빠졌다. 부상한 환자들은 대부분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경우가 많고, 포로 중 35%는 송환된 뒤에도 동상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특히 미군 실종자 중 30%는 포로교환 때 살아왔으나 58%는 공산군의 후방에서 죽었다

미군 포로 6425명은 북한에서 처형됐다. 상당수 포로는 체포 즉시 사살되거나 치료받지 못해 죽었다. 행군 도중 부상으로 쓰러지면 도로변에 버려둬 죽게 했다. 공산군 수용소에 도착한 후에도 옥수수밥만 한 줌씩 먹다가 영양실조로 죽어간 미군 포로는 2730명으로 확인됐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공산군은 국제적십자사가 제공하는 구호품을 받지 않았다. 나머지 3700여 명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런 야만적인 현실을 보면서도 공산 진영에 남기로 한 미군이 23명이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수용소 내에서 동료들을 고자질한 자들로 송환됐을 경우 다른 동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포로교환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됐다. 1951년 12월 18일 양 진영에서 최초로 포로교환 대상자 명단이 나왔는데 처음 밝혔던 숫자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3차에 걸쳐 포로 교환이 이뤄졌다.

1차는 1952년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로 부상자부터 포로 교환이 시작됐다.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부상자 684명이 한국으로 왔고, 중공군과 북한군 6670명이 북으로 인도됐다. 2차는 정전협정이 끝난 뒤인 8월 5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국군과 유엔군 1만2760명(국군 7862명, 미군 3594명, 기타 유엔군 1304명)이 한국으로 왔고, 중공군과 북한군 7만5823명이 북으로 송환됐다.

3차는 9월 20일부터 23일까지로 자국 귀환을 거부하는 중공군 포로 2만여 명이 인천항에서 LST 편으로 자유중국(대만)으로 인도됐다. 그리고 잔여 포로 347명이 1954년 1월 28일 공산군 측에 인계되고, 중립국을 선택한 88명이 2월 8일 인도로 떠나면서 포로 교환이 완료됐다.

포로가 송환되던 날, 북으로 가는 공산군 포로들은 판문점 중립지대에 들어서자 자신들이 입었던 옷과 지녔던 비품들을 도로 양편에 내던지며 속옷만 입고 붉은 기를 흔들며 미친 듯이 공산군 군가를 불러댔다. 자신들의 사상이 변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쇼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