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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에 놀란 美 ‘李 대통령 축출’ 계획 세워

구름위 2017. 1. 7.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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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에 놀란 美 ‘李 대통령 축출’ 계획 세워

<34> 이승만 제거 음모

아이젠하워 대통령 직접 비난 서신

미8군사령부 ‘에버레디 작전’ 입안

클라크 사령관에 위임… 실행은 안 해

이종찬 육군참모총장도 비밀 제안

미 국무부 군사 개입 반대로 불발

 

 

 

기사사진과 설명

1952년 1월 상무대 개소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자존심을 짓밟고 유엔의 권위를 무시한 결과가 됐다. 한국을 위해 피 흘리며 싸워준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배은망덕이다. 이 사건으로 한미 간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국은 이승만 제거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2012년 12월 한미 간에 공개된 기밀문서에 의하면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첫째, 이 대통령에게 장기 상호방위조약, 20개 사단에 대한 군사원조, 수억 달러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약속해 휴전에 협조하도록 종용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두 번째 단계로 대한(對韓) 지원 약속을 모두 철회하며, 미군의 전면 철수를 내세워 위협을 가하고, 이 역시 실패하면 세 번째 단계로 쿠데타를 조종해 이 대통령을 축출하고 장택상 총리가 새 정부를 구성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지침에 따라 미8군사령부에서 계획을 작성하고 클라크 사령관의 재가를 받아 워싱턴에 제출됐고 다시 클라크 사령관에게 위임됐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직전 휴전협상이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무렵인 1953년 4월 9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이 우리 한국의 북진통일 요구에 협조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면서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철군해도 상관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아이젠하워는 ‘귀국의 방위를 돕는 우리나라 또는 타국 정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면, 귀국에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민의 엄청난 희생으로 얻은 ‘모든 것을 말살’하게 된다는 점을 잊지 않기 바란다는 경고성 답신을 보내왔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한 다음 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서한을 보내 이 대통령의 행동을 ‘분명한 위반(clear violation)’으로 규정하고, 반공포로 석방이 유엔군사령부를 통제 불가능한 상황(impossible situation)으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한편, 고려대 정치학과 박명림 교수에 의하면 반공포로가 석방된 날 소집된 제150차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위험을 종식할 수 있는 유일하고 신속한 방법은 쿠데타”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미국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지만 “우리는 단지 한국에서 사태를 수행할 만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미국의 견해를) 인지시키려 한다”고 말한 내용이 공개된 것이다.

1953년 미국 행정부가 휴전안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계획을 입안했었다는 얘기가 떠돌았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발언한 내용이 문서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에버레디 작전을 실행에 옮길 의사가 있었는지, 아니면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가상 시나리오’로 만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으로 갈등의 골이 깊었으나 실제로는 위기 국면을 잘 넘겨 그해 8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한미결속을 강화했으며,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현대화 계획이 적극적으로 추진됐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계획과는 별도로 국내에서도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군부에서 있었다는 사실이 미국에서 증언됐다.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에 의하면,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한창 심할 때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미국 대리 대사 E. 앨런 라이트너 2세는 1973년 10월 26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역사를 위한 육성 증언’에서 이종찬 총장이 자신을 찾아와 중대한 제안을 했었다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정 질서를 회복할 것을 요구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렇게 하면 이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그도, 우리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왔다. 그는 다른 참모총장들의 의견도 종합해서 말한다고 하면서 ‘군이 전쟁하고 있는데 후방이 정치파동으로 혼란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했다. 또 행동을 취해야 할 시점이 됐다면서 소수의 군인과 해병대를 동원하면 대통령·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자택 연금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군에서 정권을 잡을 생각은 없고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 국내 참모들도 좋은 기회라는 데 동의했다고 했다.”

라이트너 대리 대사는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미 국무부에 전문(電文)을 보냈다. 그는 ‘이승만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승만을 오랫동안 껴안고 가야 할 것이고 결국은 군사정권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승만 제거 계획을 포기했다. 이유는 ①당시 도쿄의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한국의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이 이승만을 존경하고 제거 계획에 반대해 국무부가 국방부의 동의를 얻는 데 힘들었고 ②미 국무부가 무초 대사를 불러 대책회의를 했는데 “미국이 이승만 제거 계획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결국 1952년 6월 4일 미 국무부가 군사개입 반대 의사를 밝힘으로써 이승만 제거 음모는 불발로 끝났다. 한편 이승만은 육군참모총장이 자신을 연금하려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따라서 이종찬 참모총장은 군에서 추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미국은 이종찬 참모총장에 대한 신뢰도 평가에 들어갔으며 이 참모총장은 결국 미국 참모대학 유학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