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美 참전 막으려 김일성에게 “한강은 넘지 말라”

구름위 2017. 1. 7.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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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참전 막으려 김일성에게 “한강은 넘지 말라”

<35> 스탈린의 ‘오판과 착각’

국제사회서 침략자 비난 면하기 위해

인민봉기 믿고 서울 점령 후 사흘 보내

유엔 안보리 결의 거부권 포기 ‘실책’

美 지상군 참전 국군 재정비 시간 벌어

독재자 말로 재촉 1953년 전쟁 중 사망

 

 

기사사진과 설명

중공의 마오쩌둥(왼쪽)과 소련의 스탈린.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에 소비에트식 공산 독재 정부를 세운 사람은 스탈린이다. 김일성이 남침하겠다고 승인을 요청했을 때, 남침 허락과 함께 전쟁에 필요한 모든 군사적 지원을 해준 사람도 스탈린이다. 그런데 막상 김일성 군대가 남침했을 때, 완전한 승리를 위해 취했어야 할 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에는 다행이지만 김일성으로서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8회 참조), 그리고 남침 공격 계획을 작성하면서 서울을 점령했을 때 “한강을 넘지 말고 기다리라” 하고 차후 공격 계획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 스탈린은 왜 한강을 넘지 말라고 했을까? 미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요, 유엔을 통해 전 세계를 장악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유럽의 군사력을 장악한 미국이 6·25전쟁에 개입하면 미·소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사태로 발전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피하려 한 것이다.

스탈린이 그런 판단을 한 데는 김일성의 보고가 한몫했다. 김일성은 ‘서울만 점령하면 남쪽에 양성해 놓은 20만 명(체포·처형·구속자 제외)의 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해 혁명과업을 완수하겠다’는 남로당의 일인자 박헌영의 말을 믿고 스탈린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스탈린은 ①한강을 넘지 않아도 내부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난다면 미국이나 유엔과 같은 외세 개입에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고, ②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38선’처럼 중요하게 여기고 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상황은 스탈린의 예측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남침은 시작됐고 28일 서울이 점령됐다. 그러나 내부 혁명(인민봉기)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흘 동안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고 첫 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했다. 또 미국을 비롯한 유엔에서는 한강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38선’을 넘은 그 자체를 중요시해 침략 당일(6월 25일)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를 소집, 북한을 규탄하고 북한군의 침략 행위 중지와 38선 이북 철수를 결의했다. 북한이 불응하자 7월 7일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서울시청 앞의 북한군 탱크. 국군은 북한군 전력의 핵심인 소련제 T-34 탱크 부대에 무너져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


 


6월 30일 중앙청 귀빈실의 고성

이틀을 기다려도 시민 동요가 없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당황했고, 스탈린도 매우 초조해했다. 마침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지휘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30일 밤 중앙청 귀빈실에서는 격앙된 목소리로 논쟁이 벌어졌다.

김일성은 전쟁 기간에 두 번 서울을 방문했는데 첫 번째는 6월 30일, 두 번째는 8월 초였다. 첫 방문은 전투를 잘해준 인민군을 격려하기 위함이요, 두 번째 방문은 낙동강 전선에서 진출이 지지부진하자 지휘관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은 첫 방문에서 서울 점령 후 이틀이 지나도 남로당의 움직임이 없는 데 대해 박헌영을 다그쳤다. “38선만 넘으면 남조선에 있는 20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봉기한다고 했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소?” 박헌영은 제주 4·3 사건, 대구 10·1 폭동 사건, 여수·순천 사건 등을 사례로 들어가며, 조금만 기다리면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리고 KBS 방송국을 찾아가 남로당원들에게 총궐기할 것을 선동하는 방송을 했다. 그러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선사령관 김책, 3사단장 이영무 소장 등은 김일성에게 한강을 건너 내려갈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려달라고 졸랐다. ‘국방군은 현재 괴멸 상태에 있으니 지금 한강을 건너면 8월 15일까지는 충분히 부산까지 해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거절했다.

“누가 그것을 모르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한강 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으니 어쩌겠소? 모스크바의 생각은 민중봉기를 선동하라는 것이오. 바실리예프(군사고문단장)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지 않소?”

스탈린은 6월 29일 평양 공습이 시작되고 30일 미 지상군 참전이 결정되자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를 통해 ‘한강을 넘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북한군은 사흘의 휴식을 끝내고 7월 1일 남진을 위해 한강철교를 보수하고, 7월 3일 새벽 한강을 건너 남진에 들어갔다. 서울 점령 후 무려 6일 만에 한강을 건넌 것이다. 그동안 국군은 흩어진 부대와 패잔병을 집결해 건제 부대를 유지하게 됐고, 미 지상군이 참전하는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한편 박헌영은 책임을 물어 1955년 12월 15일 숙청됐다.



참전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

스탈린의 6·25전쟁 지도는 처음부터 오판과 착각의 연속이었다. 남침계획을 수립할 때 미국을 의식해 한강을 넘지 못하도록 선을 그은 것이나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포기한 것은 스탈린답지 못한 행위였다. 또 소련군이 참전(군사고문, 전차병, 각종 기술 병력, 항공기와 조종사 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는 참전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고,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휴전을 제안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실패하고, 미국의 강력한 우방인 대한민국을 자국의 코앞에 버티고 있게 만들었다. 이는 스탈린의 전쟁 지도 능력 부재를 의미하며 독재자의 말로를 재촉하는 결과가 됐다. 그는 전쟁 중이던 1953년 3월 5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