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李 대통령 포로 석방 승부수, 한미방위조약 이끌어 내

구름위 2017. 1. 7. 20:35
728x90

李 대통령 포로 석방 승부수, 한미방위조약 이끌어 내

<33> 반공포로 석방

북진 통일 요구에도 휴전 쪽 기울자

대구·마산서 2만 7000여 명 석방

유엔군 사령관 강력 항의에도 태연

협상 파국 막으려는 미국 상대 회담

경제원조·군비 증강 약속 받아 내

 

 

 

기사사진과 설명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7월 9일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1953년 6월 18일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북한군 출신 반공포로들이 갑자기 석방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풀어준 것이다. 이 같은 조치는 국제정치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강한 리더십을 가진 이승만이었기에 가능했다. 강대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켜낸 중대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조치로 6월 18일 대구·마산 등 지역에 수용돼 있던 2만5000여 명이 석방됐고 다음 날 추가로 2000여 명을 내보내 모두 2만7000여 명이 석방됐다. 이때 미군이 경비를 맡고 있던 수용소의 7000여 명은 석방되지 못했다.

반공포로 석방을 처음 보도한 사람은 AP통신의 신화봉(申化鳳) 기자다. 세계는 깜짝 놀랐고 이승만의 결단력은 높이 평가됐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독선적인 처사라고 비난했다.

미국이 이 소식을 안 시간은 6월 18일 새벽(현지시간)이었고 워싱턴에서는 난리가 났다. 휴전을 방해하는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휴전이 아니라 ‘북진통일’을 원했고, 이를 미국에 강력히 요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주도로 휴전협정이 추진되자 불만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들까지 동원해 범국민적으로 휴전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회담 분위기가 점점 합의 쪽으로 기울자 판을 깰 수도 있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을 지휘한 사람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었다. 당시 포로수용소 관리는 미군이 했지만, 경비는 국군 헌병이 맡고 있었으므로 헌병총사령관의 지휘가 용이했다. 사전에 준비한 대로 먼저 철조망을 끊고 전등을 켰다. 그리고 포로의 탈출을 도왔다.

포로수용소장과 미 8군 사령관은 분통을 터트렸고 도쿄에 있는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서 항의전화가 왔다.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누구의 짓이냐고 전화로 따졌지만 백 총장도 답변할 입장이 아니었다. 다음날 미군은 달아난 포로들을 붙잡아 재수감하려 했으나 각 행정기관에서 이들에게 갈아입을 옷을 주고 민가에서도 이들을 숨겨주어 미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8일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항의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왔다. 그는 “왜 사전에 나에게 아무런 통고도 없이 내 휘하에 있는 한국군을 빼내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항의했다. 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말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내가 사전에 장군에게 알릴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소? 내가 장군에게 미리 얘기해 주었다면 장군은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장군의 입장이 더 곤란했을 것 아니겠소?”라고 가볍게 넘겼다.

당시 백두진 국무총리는 워싱턴 방문 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 그날 저녁 국무부 초청으로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이승만의 처사는 등 뒤에서 칼로 찌르는 격’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렇게 염려했던 중공 측의 항의가 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반공포로 석방에서 중공포로들은 제외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이 사건이 휴전협상을 파국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는 중대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을 특사로 서울에 급파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잘 달래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더는 휴전에 반대하지 않도록 설득에 나섰다.

이승만은 특사가 도착하기 2일 전(23일) 정전협정에 대한 ‘조건부 승인안’을 내놓았다. 세 가지 조건은 ①중공군의 완전 철수 ②철수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③정치회담의 기한을 3개월로 한정하고 성과가 없으면 전투를 재개하자는 것이다.

마침내 1953년 6월 25일 미국 대통령이 보낸 특사 로버트슨이 서울에 왔고, 그는 경무대(현 청와대)를 수시로 드나들며 14차례 대통령을 만나 회담했다. 로버트슨은 처음에는 책임 추궁과 함께 이승만이란 사람이 과연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지만, 날이 갈수록 이 대통령을 존경하게 됐다.

그는 6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긴 회담을 했다. 18일간의 ‘이·로버트슨 회담’에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얻어냈다.

①상호안전보장 조약의 체결 ②2억 달러의 원조자금 제공 및 장기 경제원조 약속 ③육군 20개 사단에 대한 군비 증강과 이에 상응하는 해군 및 공군의 승인 ④한미 양국 정부는 휴전 후의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에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정치적 회담 중단 ⑤한미 정상회담 개최 등이다.

미국은 벌 주러 왔다가 상을 주고 간 셈이 됐다. 사실 6·25 남침 당시 우리 군은 너무 보잘것없었다. 8개 사단이 있었지만 장비도 거의 없는 빈약한 상태였다. 이를 현대 장비를 갖춘 20개 사단으로 증강하는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내용을 얻어내는 조건으로 휴전을 받아들였다. 참으로 위대한 협상력이며 약소국 대통령으로서 강대국을 굴복시킨 국제 감각이 뛰어난 ‘전쟁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