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의 6·25 참전, 스탈린 강요 때문이었나?
- <36> 마오쩌둥의 전쟁 리더십
대만 침공 시기 검토 중 소련의 요청 받은 중공
무기 지원 받고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건너
바둑을 좋아한 마오쩌둥, V자형의 ‘포위작전’
두 번의 공세 성공했지만 유엔군 반격에 무너져
1967년 4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한 마오쩌둥(오른쪽 둘째)의 모습. 연합뉴스 |
6·25전쟁은 중공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장제스(蔣介石) 정부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침략을 면하는 계기가 됐고, 마오는 대만 통일을 유보하는 대신 한국전 참전을 계기로 공산권 2인자로서 세를 과시하며 당당하게 유엔에 가입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중공의 참전은 명분상으로는 김일성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지만 실리적으로는
소련으로부터 첨단 무기와 장비를 지원받아 중공군을 현대화시키는 한편 스탈린의 견제와 의심에서 벗어나 친소관계를 증진하고 경제원조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마오가 자기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노선을 걷지 않을까 의심했고, 마오는 소련의 다음 침략 순서가 만주 동북부와
티베트(西藏)가 될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으로서는 김일성의 요청을 받고 참전에 동의는 했지만,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정황은 김일성이 1950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의 허락을 받아내는 자리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중공으로 가서 마오에게 자기 뜻을 전하고, 적극적인 지원과 참전에 대한 ‘동의’를 받아오라고 지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만일 마오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남침 허락을 취소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협조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의
대(對)아시아 방위정책인 애치슨 라인에서 ‘대만’ 방위가 빠져 있다는 점을 이용해 중공은 대만 침공의 시기를 검토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오로서는
동의가 절대 쉽지 않았다. 소련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고 참전하자니 무기가 빈약해 미국을 상대하기 조심스러웠다. 따라서 소련에 20개 사단의
장비 지원(후에 10개 사단 및 차량 2000대 추가)을 받고 1950년 10월 19일 1차로 압록강을 건넜다.
1949년 마오쩌둥의 사진을 앞세우고 베이징에 입성하는 중국 공산군. |
중공군은 참전은 했지만, 세계 최강의 미군을 상대하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10월 19일 북한에 들어온 뒤 일주일간을 산속에서
유엔군의 동향을 살피며 유엔군이 중공군의 포위망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포위망에 들어오자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1차 공세에서 성공한
뒤에도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또 20일을 쉬면서 유엔군이 포위망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때도 유엔군이 수중에 들어오자 2차 공세를 펴서
동부에서는 미 10군단의 흥남철수를 강요했고, 서부전선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을 38선까지 밀어냈다. 바둑을 좋아한 그는 전쟁에서도 바둑처럼
‘포위작전’을 사용했다. 유엔군이 미8군과 10군단을 벌려 V자형의 공격을 취한 것처럼 중공군도 정면을 V자로 벌여놓고 적이 그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포위전술을 사용했다. 여기에 유엔군이 걸려든 것이다.
한편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2차 공세 때, 장진호전투에서 대패하고 38선으로 철수를 강요받으면서 비로소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유엔군은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한편 중공군의 전술은 방어적 공세(포위전술)였다. 그러나
1·2차 공세에 성공한 후 미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공세’로 전략을 바꿨다. 이것이 1950년 12월 31일부터 실시한 제3차
공세다.
한편 미국 국방차관을 지낸 폴 H. 니츠는 많은 정보를 가진 맥아더가 중공군의 침입을 몰랐을 리 없다면서 맥아더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도록 방조했다고 혹평하고, 참전을 계기로 중국 본토를 공격하겠다는 야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조갑제·‘프리마돈나의 추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스탈린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미군의 개입을 허용한
사실과 유사하다.
마오쩌둥(오른쪽) 전 국가주석과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이자 ‘로켓왕’으로 불렸던 첸쉐썬 박사의 면담 모습. 연합뉴스 |
중공군은 1951년 여름까지 총 5차에 걸쳐 대공세를 폈다. 그러나 1951년 용문산전투와 파로호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전의를 상실했다. 그 후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했고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지루한 고지전이 이어졌다.
마오는 비정규전에는 능하나
정규전에는 약했다. 1951년 1월, ‘1·4 후퇴’ 때 조금만 더 밀고 내려왔으면 유엔군을 축출할 좋은 기회였는데 1월 10일 갑자기 ‘남진
중지 명령’을 내렸다. 피로에 지치고 엄동설한에 보급품까지 떨어져 휴식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중공군이 휴식에 들어간 사이 유엔군의
반격을 받고 38선으로 다시 쫓겨 갔고 북한을 도운 ‘항미원조전쟁’에서 실패했다.
또 마오는 장진호전투에서 미 10군단이 급하게
철수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팽덕회에게 미군이 한국에서 떠날 수도 있으니 빨리 38선을 넘으라고 독촉했고, 용문산전투(1951년 5월)에서 대패한
후에도 유엔군의 반격은 유엔군을 섬멸할 좋은 기회라고 큰소리치며 ‘서울과 인천’을 반드시 회복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대책 없는
명령뿐이었다.
중공군은 100만 명이 투입된 5차 공세에서도 실패하자 유엔군에게 승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고 휴전 협상에 매달리는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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