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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에너지 톡톡 ⑤ 원자력 르네상스는 없다 ⑥ 원자력 제국의 희생자들

구름위 2015. 10. 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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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7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서 화력 발전소 4기 대신 원자력 발전소 2기를 추가 건설하는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원자력 발전, 즉 핵 발전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사실 원전 수출을 이끄는 신성장 동력,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청정 에너지, 생산 단가가 저렴한 경제적 에너지 등 원자력 에너지에 투사된 장밋빛 전망은 언론에서 자주 접해 익숙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를 공개적으로 검증하여 밝히는 자리는 의외로 별로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은 21세기 ‘대전환의 시대’에 중요한 화두인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프레시안》의 과학·환경 담당 기자인 강양구 기자와 함께 이야기하는 연재 게시물입니다. 지난 시간의 「기후 변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석유 자원 고갈과 기후 변화 문제의 대안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지만 그 정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원자력 에너지’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환경 친화적이고, 경제적이며, 안전한 에너지로 각광 받고 있는 원자력 에너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요? 진정 원자력 에너지가 미래의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의 에너지’인지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원자력, 진실 혹은 거짓


앞의 연재에서 석유 고갈과 기후 변화 이야기를 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원자력 에너지’다.

예를 들어, 2011년 후쿠시마 사고가 났을 때 한 고등학생 친구로부터 이런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친구는 지금은 서울의 한 공과 대학으로 진학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언급하겠지만, 이 친구는 풍력 발전을 공부할 계획이다.) 많은 독자가 비슷한 생각을 가질 것 같아서, 이 친구의 이메일을 그대로 옮긴다.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보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위험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다 주말에 기자님의 기사를 봤어요. 그 기사를 읽고 나서, 저는 더 우울해졌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이 위험한 원자력 에너지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이거든요.

이미 한국은 전기의 30퍼센트 정도를 원자력 발전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만약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한다면, 그만큼의 전기는 어떻게 생산하나요? 더구나 기후 변화를 막고자 온실 기체를 줄일 수밖에 없다면,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온실 기체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 에너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닌가요?

 

저 역시 위험한 원자력 에너지는 싫어요. 하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는 한, 원자력 에너지는 필요악(必要惡) 아닐까요?"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이 친구뿐만이 아닐 것이다. 핵 발전소를 한반도에 짓는 것도 모자라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는 데 앞장섰던 이명박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핵 발전소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바꾸지 못하는 박근혜 대통령까지 ……. 한국 시민 대다수가 이 친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자력뿐이야. 다른 대안은 없어!' 

 

그런데 과연 그럴까? 혹시 이런 생각이야말로 신화가 아닐까?




그들이 말하는 ‘원자력’ 성적표: 2.3 혹은 30


사람들과 핵에너지를 놓고 얘기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사람들이 핵에너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정말로(!)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던지는 질문이 있다. 자,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다음 질문에 한번 답해 보길 바란다.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에너지 중에서 핵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몇 퍼센트나 될까요?”

이런 질문에 대개의 사람들은 “한 30~40퍼센트 아닌가요?”라고 답한다. 정답은 이렇다. 세계 금융 위기 직전에 에너지 수요가 가장 높았던 2007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의 난방, 수송, 전기 등에 소비되는 전체 에너지 중에서 핵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2.3퍼센트'에 불과했다. 전 세계의 전기를 생산하는 에너지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3.7퍼센트’에 불과했다. [관련 사이트 바로가기]

우리나라는 어떨까? 에너지 경제 연구원에서 2014년에 발간한 「에너지 통계 연보」를 보면, 201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전체 에너지에서 핵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0.4퍼센트 정도였다. 고작 10퍼센트?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 머릿속에 박힌 ‘30퍼센트’ 따위의 숫자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같은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 발전량 중에서 핵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26.8퍼센트로 대략 30퍼센트다. (핵 발전소는 전기만 만드니까!) [보고서 보러가기]

2.3, 13.7, 10.4, …. 이 숫자들을 기억하면서 다음 질문에 답해 보자. “핵 발전소를 가동 중인 나라는 몇 개나 될까요?”

이 질문에도 대개는 “한 100개국 아닌가요?” 이렇게 답한다. 역시 정답과는 큰 차이가 난다. 2015년 8월 18일 기준으로, 전 세계 438기의 핵 발전소를 가동 중인 나라는 고작 30개국뿐이다.[관련 사이트 바로가기] 이것이 바로 영국에서 1956년에 처음으로 상업 발전을 시작한 핵에너지의 초라한 성적표다. (전기를 생산한 세계 최초의 핵 발전소는 1954년에 가동된 (구)소련의 오브닌스크 핵 발전소로 발전 용량이 작아 연구용으로만 활용되었다.)

그나마 미국 99기, 프랑스 58기, 일본 43기, 러시아 34기, 중국 28기, 우리나라 24기, 인도 21기, 캐나다 19기, 영국 16기, 우크라이나 15기 등 상위 열 나라의 핵 발전소가 총 357기로 거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나마 이 핵 발전소들의 대부분은 지어진 지 30년이 가깝거나 넘은 노후 핵 발전소다.

이래도 핵에너지가 ‘대세’라는 생각이 드는가?


 

최초의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인 영국의 콜더 홀 원자력 발전소 United States Department of Energy/wiki


에너지 톡톡!

☞원자력 에너지? 핵에너지? 어떤 말을 써야 할까?

눈치 빠른 독자는 내가 ‘원자력 발전소’ 또는 ‘원자력 에너지’ 대신에 ‘핵 발전소’ 또 ‘핵에너지’를 사용하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원자력 발전소’나 ‘원자력 에너지’보다는 ‘핵 발전소’나 ‘핵에너지’ 같은 용어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원자력 발전소’ ‘원자력 에너지’라는 표현이 부정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핵에너지나 원자력 에너지, 핵 발전이나 원자력 발전, 핵폭탄이나 원자 폭탄……. 모두 한 가지 실체를 가리키는 용어다. 그 뿌리는 모두 핵에너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잠시, 고등학교 수준을 과학 지식을 떠올려보자.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는 ‘양(+)전기’를 띤 원자핵과 그 주위에 ‘음(-)전기’를 띤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원자핵의 본질은 양전기를 띤 입자(양성자)들이 전기를 띠지 않은 중성자와 함께 결합력으로 뭉쳐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핵에너지의 원천이 바로 이 원자핵을 구성하는 입자들 사이의 결합력이다. 그 결합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핵력’이다. 그리고 그 핵력이 깨질 때 방출되는 에너지가 바로 핵 발전소나 핵폭탄의 원천인 핵에너지다.

예를 들어, 핵 발전소의 연료인 우라늄 235는 원자 번호가 92번이다. 이 원자 번호는 바로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의 개수를 의미한다. 즉 원자 번호가 92번이면 양전기를 가진 양성자가 92개 뭉쳐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전기를 띠지 않는 중성자 143개가 붙어서 원자핵을 구성한다. (참고로 우라늄 뒤에 붙은 숫자인 235는 질량수로 양성자 개수(92개)에 중성자 개수(143개)를 더한 값이다.) 이 우라늄이 양성자와 중성자가 뭉쳐 있는 우라늄 원자핵이 쪼개질 때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 바로 핵에너지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흔히 쓰는 ‘원자력 에너지’가 아니라 ‘핵에너지’가 맞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원자력’은 ‘원자력 에너지’나 ‘원자력 발전소’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로 쓰이고, ‘핵’은 ‘핵무기’나 ‘핵폭탄’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로 쓰인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는 정확하게 ‘핵 발전소’ ‘핵에너지’라고 부르기로 하자.


우라늄 235의 핵 분열로 생기는 에너지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드는 것이 핵 발전이다. Stefan-Xp/wiki



 


원자력이 기후 변화의 해결사?


그런데 희한하게도, 몇 년 전부터 일부 환경주의자들이 핵에너지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제임스 러브록이 『가이아의 복수』에서 "지구가 열을 받는 지금의 상황에 대응할 유일한 방법은 핵 발전소를 더 짓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러브록은 환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가로 알려져 있었던 터라서, 이런 주장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동안 "핵은 죽음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반핵 운동에 앞장서 온 환경 운동가 가운데 일부도 핵에너지에 대한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마크 라이너스, 조지 몬비오,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환경 담당 기자인) 프레드 피어스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앞의 연재에서 소개한 나오미 오레스케스도 핵에너지에 호의적이다.

자, 그렇다면 열 받은 지구를 핵에너지로 식히는 것이 가능할까?

핵에너지가 이런 역할을 하려면 우선 전 세계 소비 에너지의 11.6퍼센트, 전기 에너지의 67.8퍼센트를 차지하는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를 아주 빠른 시간, 즉 최소한 50년 안에 대체해야 한다. 화석 연료가 전력(온실 기체의 21퍼센트), 산업(17퍼센트), 수송(14퍼센트) 등에 쓰이면서 배출하는 온실 기체가 인간이 발생시키는 온실 기체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지금 핵에너지가 전 세계 소비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중(2.3퍼센트)은 정말로 보잘것없다. 핵 발전소를 가동하는 나라도 적다(30개국). 더구나 지금 가동 중인 438기 핵 발전소의 평균 운영 기간은 25년이다. 핵 발전소의 수명을 길게 잡아 40년으로 가정하더라도, 앞으로 15년 안에 이 핵 발전소들은 폐쇄될 운명이다.

이렇게 조만간 폐쇄할 수밖에 없는 핵 발전소가 많은 탓에 2030년까지 약 200기의 핵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해도 전체 에너지에서 핵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늘기는커녕 지금 수준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그렇다면, 러브록 같은 이들의 기대를 충족하려면 얼마나 많은 핵 발전소를 지어야 할까?

앞으로 50년간 영광, 울진의 핵 발전소(1000메가와트) 2000~3000기를 전 세계 곳곳에 지어야 한다!

앞으로 50년간 2500기의 핵 발전소를 짓는다고 가정해 보자. 1년에 50기씩, 1주일에 하나씩 핵 발전소를 인구 밀집 지역인 미국, 유럽, 아시아 등에 집중적으로 지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핵 발전소를 1주일에 하나씩 짓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비교적 핵에너지에 호의적이었던 지난 50년간 지어져 가동 중인 핵 발전소 숫자를 떠올려 보라!

2015년 8월 18일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짓고 있는 핵 발전소의 숫자는 67기다. 그나마 중국(24기), 러시아(9기), 인도(6기), 미국(5기), 우리나라(4기)에서 짓는 발전소가 전체의 7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나마 그중에서도 미국의 핵 발전소는 공사가 중단된 상황인 것도 많다. 막대한 건설비와 적자가 뻔한 운영비 때문에 추진력이 생기지 못하는 것이다.

설사 러브록의 바람대로, 기적적으로 수천 개의 핵 발전소를 짓더라도 온실 기체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화석 연료는 전기 생산뿐만 아니라 산업(17퍼센트), 수송(14퍼센트) 등에 쓰이면서 적지 않은 온실 기체를 배출한다. 당장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배출하는 온실 기체의 절반은 자동차(40퍼센트), 비행기(6퍼센트)에서 나온다.

핵 발전소에서 아무리 전기를 생산한들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차, 비행기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널리 보급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인 셈이다. 자, 이래도 핵 발전소가 러브록의 말처럼 '기후 변화의 해결사'인가? 혹시 우리는 열 받는 지구의 미래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원자력 신화'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처음 가동된 상업 발전용 원자로인 고리 1호기(맨 오른쪽)가 가동 37년 만에 폐로가 결정되었다. 102orion/wiki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 ⑥ 원자력 제국의 희생자들

핵 발전이 일명 ‘대세’라는 국민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로는 고작 30개국만이 400기가 조금 넘는 핵 발전소를 보유, 가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는 수많은 선진국들이 핵 발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다니 좀 의아합니다. 혹시 핵 발전의 ‘부작용’이 야기하는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비용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혹시 ‘원자력 신화‘라는 솔깃한 비전 아래 누군가의 생명과 인권을 갈아 넣는 ‘악마의 맷돌’이 바로 핵 발전소는 아닐까요?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은 21세기 ‘대전환의 시대’에 중요한 화두인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프레시안》의 과학·환경 담당 기자인 강양구 기자와 함께 이야기하는 연재 게시물입니다. 지난 시간의 「원자력 르네상스는 없다」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핵 발전이 미래의 에너지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윤리’ 문제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핵 발전 아래 놓여 있는 희생의 시스템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보면서, 단순히 경제 논리에만 입각해 핵 발전을 옹호하는 시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핵 발전을 둘러싼 두 얼굴


지난 연재에서 살펴봤듯이 1954년 (구)소련에서 핵 발전을 시작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 성적표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이런 초라한 성적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국 원자력 문화 재단이 2015년 3월에 발표한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부터 살펴보자.

한국 원자력 문화 재단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2015년 3월 13일부터 4월 4일까지 전국의 성인 남녀 10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95퍼센트 신뢰 수준에 표본 오차 ±3.1퍼센트)를 보면, ‘핵 발전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89.4퍼센트를 차지했다. [보러 가기] 그러니까 우리나라 시민 10명 가운데 약 9명이 핵 발전에 찬성하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1년 전인 2010년의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 ‘핵 발전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89.4퍼센트였던 것을 염두에 두면, 2011년 3월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지 4년 만에 원상태로 돌아간 셈이다. 하긴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직후인 2011년 4월의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도 78.2퍼센트로 상당히 높았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말고 여론 조사 결과를 찬찬히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3월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다시 보면, 자신의 거주지에 핵 발전소를 지어도 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고작 19.6퍼센트만 찬성했다.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전인 2010년의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인 27.5퍼센트와 비교해도 줄어든 수치다.

그러니까 한국 원자력 문화 재단의 여론 조사 결과를 해석하면 이렇다. 우리나라 시민의 대부분은 핵 발전소를 어딘가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 자신이 전기에 기반을 둔 과학 기술 문명을 누릴 수 있을뿐더러 전기로 공장을 돌려야 경제도 굴러갈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핵 발전소가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은 싫다.

장담컨대, 핵 발전소를 자기 동네에 지어도 된다고 답한 그 2명도 진짜로 핵 발전소가 들어선다면 머리띠를 질끈 묶고 반대 운동에 앞장설 것이다. 핵 발전소를 둘러싼 이 이중성이야말로 반세기 동안 핵 발전소가 초라한 성적표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다. 모두가 핵 발전소를 원하면서도 정작 자기 지역에 핵 발전소가 들어서는 것은 싫어하니 말이다.


우리 집 뒷마당에는 안 돼! Amio Cajander/flickr




‘안전’보다 ‘윤리’!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핵 발전소가 놓여 있는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서는 그나마 30개국에 걸쳐서 438기의 핵 발전소가 가동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나는 핵 발전소가 지속 불가능한 이유에는 ‘안전’ 문제보다 바로 이런 ‘윤리’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안전’보다 ‘윤리’에 주목하게 된 데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의 상황을 지켜보면서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한국의 환경 단체를 비롯한 반핵 세력은 핵 발전소의 ‘위험’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지겹도록 핵 발전소의 위험을 경고해도 꿈쩍도 안 하는 정부와 여론이 야속한 나머지 그들은 사석에서 농담 반, 진담 반 이런 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사고가 한번 나야 해!”

반핵 세력이 위험을 강조하니, 찬핵 세력도 도리가 없다. 수년간 찬핵 세력은 ‘안전’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지진, 테러 심지어 미사일 공격에도 안전한 한국 핵 발전소의 신화가 대중에게 유포되는 순간이었다. (불량 부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갔는데도 아직까지 문제 없이 가동 중이라는 것이 신기한데!) 이런 식이다.

“핵 발전소가 위험해서 걱정이지? 더 안전한 핵 발전소를 만들면 되잖아!”

핵 발전소를 둘러싼 논의가 이렇게 ‘위험하다/안전하다’의 이항 대립 구도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전혀 엉뚱한 곳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핵 발전소의 위험을 강조하는 반핵 세력의 논리대로라면, 대중의 각성과 변화를 이끌어 낼 가장 큰 기회는 더 큰 핵 발전소 사고다. 안타까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를 무너뜨리는 것이고,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문제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심각한 기후 재앙을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경험도 한 적이 있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에 장기수 출신 지식인으로 존경받는 한 원로가 주최한 강연에 가서 (당시에는 우리나라 핵 발전소에 그토록 많은 불량 부품이 들어가 있는지 아직 몰랐다!) “핵 발전소에서 사고가 날 가능성은 낮다. 그러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얘기를 했다가 그에게 혼난 적이 있다.

원로 대접을 하느라 그 자리에서는 조심스럽게 대응했지만 속으로는 열불이 터졌다. ‘그렇다면 반핵 운동을 위해서는 우리나라에서 핵 발전소 사고라도 나야 한다는 말인가? 좁은 국토에 24기의 핵 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핵 발전소 사고가 나면 환경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체가 결딴날 것이 뻔한데!’

찬핵 세력의 상황은 더 아이로니컬하다. 반핵 세력이 위험을 강조할수록 이들은 더 안전한 핵 발전소 개발과 건설을 향해서 일로매진한다. 안전한 원자로를 개발하고자 더 많은 연구 자금과 연구 인력을 투입한다.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섬 사고,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사고 이후 핵 발전소 안전장치의 성능이 향상된 것도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런 상황은 핵에너지 의존으로부터의 탈피 및 에너지 패러다임의 전환을 바라는 이들에게도 이중의 악재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로 무장한, 사고 위험성을 대폭 낮춘 핵 발전소가 등장한다면 어떨까? 핵 발전소의 위험만 강조해 온 처지라면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앞의 연재에서 소개한, 2000년대 들어서 환경 운동가 일부가 핵 발전소에 대한 태도를 바꾼 정황에도 이런 사정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평소 핵 발전소의 위험을 강조해 온 그들은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재앙이라는 더 큰 위험이 나타나자, 상대적으로 안전해진 핵 발전소의 위험에 눈을 감아 버린 것이다. ‘위험하다/안전하다’ 이항 대립 구도가 낳은 또 다른 부작용이다.

물론 반핵 세력이 (좀 더 안전해졌다고 하더라도) 핵 발전소를 용인할 리 없다. 이들은 좀 더 안전해진 핵 발전소의 또 다른 위험, 예를 들어 시스템의 불확실성 등과 같은 것을 강조할 것이다. 그렇다면 찬핵 세력은 어떻게 나올까? 당연히 그런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더 많은 연구 자금과 연구 인력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핵 발전은 계속된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우라늄이 고갈될 때까지 계속될까? 글쎄, 찬핵 세력은 그때가 오면 이번에는 방사성 폐기물을 재처리해서 활용하자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희생된 소방관들을 기념하는 동상 Roman Harak/flickr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에서 강조했듯이 ‘안전’보다 ‘윤리’로 눈을 돌려야 한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발행인을 비롯한 몇몇이 강조했듯이 “핵을 둘러싼 차별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차별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일까?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지역 주민.

가끔 핵 발전을 놓고서 얘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항상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이번에 지진이 난 도호쿠(東北) 지방에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는 ‘도호쿠 전력’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사고가 난 후쿠시마 발전소는 분명히 도호쿠 지방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영하는 회사는 ‘도쿄 전력’입니다. 왜 도호쿠 지방에 있는 핵 발전소를 도쿄 전력에서 운영할까요? 이상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으세요?”

이런 질문을 받고서야 사람들은 “아!” 하고 탄식하곤 한다. 그렇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는 후쿠시마를 비롯한 도호쿠 지방이 아니라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도쿄로 공급된다. 그러니 후쿠시마 핵 발전소도 도호쿠 전력이 아닌 도쿄 전력이 관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쿄로 가야 할 전기를 생산하는 핵 발전소가 왜 후쿠시마에 들어서게 되었을까?

후쿠시마 핵 발전소 단지가 만들어지던 1950~1960년대만 하더라도 도호쿠 지방은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 당시 도호쿠 지방이 얼마나 차별을 받는 낙후된 곳이었는지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일본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을 보면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시마자키 구미오는 도호쿠 지방의 시골 태생으로 도쿄 대학교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그는 도쿄에 와서야 자기 지방 사람이 얼마나 차별을 받고 살았는지를 생생히 확인하게 된다. 일례로,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노동력을 팔면서 도쿄 올림픽을 위한 인프라 건설 작업에 동원되는 이들이 바로 자기의 형, 친구, 동생이었다.

도쿄와 도호쿠로 상징되는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대립을 온몸으로 실감한 주인공은 도쿄 올림픽을 인질 삼아 통쾌한 복수를 꿈꾼다. 바로 이렇게 성인 남성이 도쿄로 몸을 팔러 떠난 도호쿠 지방은 여성, 아이, 노인만 남은 가난한 동네였다. 그리고 이들을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억압해서 지은 것이 바로 도쿄로 전기를 공급하는 핵 발전소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이명박 정부는 강원도 삼척, 경상북도 영덕, 울진을 새로운 핵 발전소 부지로 선정했다. 이어서 2015년 7월 22일 박근혜 정부는 제7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통해서 강원도 삼척 또는 경상북도 영덕에 핵 발전소 2기를 더 짓기로 결정했다. (현재로서는 경상북도 영덕이 후보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변변찮은 공장 하나 없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낙후된 삼척, 영덕에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질 전기가 필요할 리 없다. 그래서 삼척은 2014년 핵 발전소 찬반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에서 84.97퍼센트가 반대했다(투표율 67.94퍼센트). 주민 투표를 준비 중인 영덕에서도 반대 여론이 확산되는 중이다. 지금 삼척, 영덕 주민은 또 한 차례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1월 16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古) 이치우 어르신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고압 송전탑 탓에 평생 농사를 짓던 땅을 빼앗긴 밀양의 70대 노인은 목숨을 내놓는 방법 외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하소연할 방법이 없었다. 그 고압 송전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로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서울, 대전, 대구 등의 대도시로 옮기기 위한 것이다.

서울 한강에 핵 발전소를 짓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한, 이런 식의 희생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지역 주민의 희생이 불가피한 핵 발전소를 유지하는 게 과연 윤리적인가? 서울에 사는 이들은 일본에서 날아온 방사성 물질이 섞인 비나,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수산물을 걱정하기 전에 자신의 안락한 일상생활이 누구의 희생 덕분인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누구를 위한 송전탑인가? Dawn Endico/flickr


둘째, 핵 발전소 노동자.

2012년, 가톨릭 대학교 이영희 교수가 일본의 도모히코 스즈키가 쓴 『야쿠자와 핵 발전소(ヤクザと原発)』라는 흥미로운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었다. 이 책은 후쿠시마 사고를 일으킨 도쿄 전력을 비롯한 일본의 핵 발전소와 범죄 조직 야쿠자 간의 연계를 주장해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야쿠자와 핵 발전소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이 책에 따르면, 일본의 핵 발전소는 1990년대부터 야쿠자 조직원을 고용해 왔다. 항상 사고의 위험이 상존하는 일본의 핵 발전소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최악의 직장이기 때문이다. 야쿠자는 바로 이런 핵 발전소에 노동자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 왔다.

도모히코는 그 자신이 사고 직후인 2011년 여름 수개월간 후쿠시마 핵 발전소에 위장 취업을 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에서 사고를 수습하던 노동자는 얼굴에 제대로 맞지도 않는 방사성 물질 필터가 부착된 마스크를 쓰고, 방사선을 다량 쬐인 사실이 확인되면 작업장에서 쫓겨나 삯을 못 받을 것이 두려워 개인별 방사능 측정 배지를 양말 안에 넣고 일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규직 노동자보다 못한 보호 장구를 지급받으며 험한 일을 하는 이들은 대개가 노숙인, 실업자, 그리고 야쿠자에게 빚 독촉을 받는 사람 등이었다. 일본의 미야베 미유키가 쓴 소설 『화차』를 보면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며 몸을 파는 일을 강요당하는 등 만신창이가 된 여주인공이 나온다. (『화차』는 2012년 변영주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다. 영화보다는 소설을 추천한다.)

그런데 바로 이 『화차』의 여주인공의 안타까운 사연이 바로 지금 후쿠시마를 비롯한 핵 발전소에서 진행 중인 것이다. 일본의 원자력 자료 정보실 통계를 보면, 피폭 노동자의 수는 지난 30년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부분은 도쿄 전력과 같은 전력 회사 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하청, 재하청, 재재하청을 통해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다.

2014년 9월 23일 서강 대학교에서는 일본 핵 발전소 노동자의 참담한 현실을 세 사람의 일본인이 직접 증언을 했다. 듣다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일본의 핵 발전소에서는 하청(1차), 재하청(2차), 재재하청(3차)도 모자라 7차, 8차 하청까지 있다고 한다. 이런 다단계 하청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분명히 복 받은 사람이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현장을 수습하는 작업에 도쿄 전력은 하루 평균 1인당 10만 엔 가까운 임금을 할당한다. 하지만 지금 실제로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하는 노동자가 받아 가는 임금은 하루 평균 1만 엔 정도에 불과하다. 1차, 2차, 3차, 4차, …… 이런 식의 중층 하청 구조로 내려가면서 9만 엔의 임금이 중간에서 빼돌려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한국 역시 (일본보다는 덜하지만) 1차, 2차, 3차 등으로 이어지는 중층 하청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즉, 핵 발전소 산업의 상당 부분을 저임금을 감수하고 고되게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핵 발전소 노동자의 피폭 방사선량은 다른 산업에 비해서 월등히 많다.

핵 발전소는 이런 노동자의 희생 없이는 단 한 순간도 가동할 수 없다. 


에너지 톡톡!

☞왜 우리는 핵 발전소 사고를 그리도 빨리 잊어 버리나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반짝하긴 했지만 (평소 핵 발전소에 호의적이었던) 한국 언론마저도 핵 발전소의 위험을 강조하는 보도를 엄청나게 쏟아냈다. 적어도 대다수 시민은 그 보도만으로도 핵 발전소에 사고가 나면 얼마나 위험한 괴물로 변할 수 있는지 생생히 체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글머리에 언급한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충격 효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것일까? 평소 환경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이 (언론과 짝짜꿍이 되어서) 센세이셔널하게 재앙이나 위험을 강조하는 태도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서 좀 더 부연해 보겠다.

 

2003년 세상을 뜨고 나서 더욱 더 그 통찰이 빛을 발하는 닐 포스트먼이 1985년에 펴낸 『죽도록 즐기기』에서 그 이유를 정확히 짚는다. 포스트먼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 세계 곳곳의 온갖 전쟁, 범죄, 사고, 홍수와 같은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된 현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도처에 흘러넘치는 정보는 이를 접하는 사람과는 거의 또는 전혀 관련이 없다. 즉, 사람들의 생활과 밀착된 사회적, 지적 상황과는 무관한 정보라는 뜻이다. …… 아침에 TV 뉴스나 라디오 또는 신문을 통해 접한 정보로 하루의 계획을 바꾸거나, 아니면 하지 않았을 일을 저질렀다거나, 무엇인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얻은 적이 얼마나 자주 있는가?

 

…… 일상적인 뉴스는 대부분 그저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쓸모없는 정보의 집합체일 뿐 의미 있는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 삶과 무관한 정보가 도처에 흘러 넘쳐 ‘정보 대비 행동 비율’이 극적으로 낮아져 버렸다. …… 온 세계가 뉴스를 위한 배경으로 전락하자 사람들은 일말의 통제 감각마저 상실해 버렸다. (『죽도록 즐기기』 114쪽, 117쪽)

포스트먼의 이런 지적은 지금 인터넷, 텔레비전 등을 통해서 뉴스가 유통되는 방식의 본질을 보여준다. 후쿠시마 사고와 같은 충격적인 사실(fact)이 24시간 동안 인터넷, 텔레비전 등을 통해서 전달되더라도 대다수 사람에게 그런 정보는 자신의 삶과 무관한 것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후쿠시마 사고보다는 일기예보가 좀 더 삶에 밀착된 뉴스일 테니까 말이다.


 

핵 폐기물 처리 노동자들 Susan M. Stacy, U.S. Department of Energy/wiki



 


 

강양구

연세 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참여연대 과학 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시민 과학 센터) 결성에 참여했으며, 2003년부터 《프레시안》에서 과학·환경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부안 사태, 경부 고속 철도 천성산 터널 갈등, 대한 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등에 대한 기사를 썼으며, 특히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언론상, 녹색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1, 2』,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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