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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에너지톡톡 ③여섯번째 대멸종을 알리는 전주곡 ④기후변화,그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현실

구름위 2015. 10. 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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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후 변화가 전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국제 이슈로 부상했습니다. 중국이 개발 도상국으로는 최초로 60퍼센트 이상의 온실 가스 감축안을 공표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죠. 과거 교토 의정서에서 탈퇴해 비난을 받았던 미국의 경우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발전소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축하는 ‘청정 전력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속의 문제에는 거리를 두었던 가톨릭 교회에서도 교황이 직접 나서 기후 변화를 막으려는 노력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은 21세기 ‘대전환의 시대’에 중요한 화두인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프레시안》의 과학·환경 담당 기자인 강양구 기자와 함께 이야기하는 연재 게시물입니다. 지난 시간의 「석유 시대의 종말?!」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인해 야기된 기후 변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인류세, 여섯 번째 대멸종, 그리고 기후 변화 등 한 번씩은 다 들어보셨을 개념들을 차근차근 이해해 가면서 지구 환경과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궁금증과 오해를 풀어 나가는 유익한 시간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지질 시대, 인류세


지금 활동하는 과학자 가운데 21세기에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르내릴 이가 누굴까? 만약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을 꼽을 것 같다. 크뤼천은 1970년에 오존층이 파괴되어 사라질 가능성을 최초로 경고한 과학자로, 그는 이 업적으로 199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요즘 크뤼천은 다른 맥락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년)를 보면, 지구를 꽁꽁 얼게 한 기상 이변의 원인으로 ‘CW-7’을 든다. CW-7은 지구 온난화를 막아 보겠다고 인류가 대기 중에 뿌린 화학 물질이다. 그런데 바로 이 아이디어를 최초로 제안한 과학자가 바로 크뤼천이다. (이 제안을 다수의 과학자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크뤼천은 2002년 ‘인류세(Anthropocene)’를 처음 제안해 화제가 되었다. 일단 지질 시대에 대한 상식을 한 번 점검해 보자. 통상적으로 5억 4200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지구의 역사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이렇게 구분된다. 그리고 중생대는 다시 오래된 순서부터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구분된다.

마찬가지로 신생대는 약 6500만 년 전 공룡이 멸종한 이후부터 약 1800만 년 전까지를 제3기로, 그 후부터 현재까지를 제4기로 구분한다. 200만 년 정도에 불과한 제4기는 다시 플라이스토세(Pleistoncene), 홀로세(Holocene)로 구분된다. 이런 식으로 구분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질 시대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다.

충적세(沖積世), 완신세(完新世)라고도 불리는 홀로세는 약 1만 1700년 전 가장 최근의 빙하기(플라이스토세 빙하기)가 끝난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시대를 지칭한다. 그런데 크뤼천은 인류가 영향을 끼친 수많은 지질학적 규모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 즉 ‘인류의 시대’라고 불릴 법한 새로운 지질 시대를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크뤼천이 이렇게 주장하면서 내놓은 근거 또한 꽤 설득력이 있다.

우선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 육지의 3분의 1에서 절반 정도가 변형되었다. 지난 100년간 우리는 세계 주요 강의 대부분을 댐으로 막거나 그 방향을 바꿨다. 최근의 사례만 놓고 보면, 중국 정부가 양쯔 강에 세운 싼샤(三埉) 댐이나 이명박 정부가 4대강 곳곳에 세운 보가 그 유력한 증거일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업은 대양에서 솟아나는 1차 생산량 중 3분의 1 이상을 잡아들이고 있다. 인간이 지구에 있는 마실 수 있는 물의 절반 이상을 소비하고 있는 정황은 또 어떤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인류세를 도입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게 크뤼천이 생각이다.

특히 크뤼천이 가장 강조하는 사실은 인간이 대기의 구성 요소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식물이 고정하는 질소보다 훨씬 더 많은 질소 비료가 사용되면서, 대기 중의 일산화질소도 늘어나고 있다. 화석 연료, 삼림 파괴 때문에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난 200년간 40퍼센트 증가했다.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온실 기체인 메탄의 농도는 두 배나 뛰었다.

사실 처음에 인류세는 환경 문제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양심적인 노(老) 과학자의 발언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데 요즘에는 과학계에서도 인류세를 진지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10만 년, 혹은 100만 년 정도가 지났을 때 (여전히 인간이 지구에 남아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설사 인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과학자가 지금의 시점을 돌이켜보면서 연구를 한다면 또렷한 지질학적 변화를 관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심지어 요즘에는 이 인류세의 시작을 언제로 봐야 할지를 놓고서도 과학자들이 논쟁하고 있다.

그럼, 인류세의 시작 시점은 언제일까? 일반적으로 산업화가 시작된 시점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을 듯하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2015년 3월 11일, 사이먼 루이스와 마크 매슬린이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인 「인류세를 정의하며(Defining the Anthropocene)」를 보면, 1610년이 유력한 후보군임을 알 수 있다. (논문 바로가기)

과학사에서 1610년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해다. 그런데 이해에는 지구 전체적으로 봐도 여러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유럽 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할 때 가져간 천연두 때문에 5000만 명 이상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망했다. 그래서 이즈음 아메리카 대륙의 농업 생산량이 급감했는데, 그 때문에 전 지구적인 이산화탄소 수준이 가장 낮았다.

이처럼 인간이 전 지구를 휘젓고 다니면서 지구 환경에 극적인 변화를 초래하기 시작한 시점을 1610년이라고 보면, 이 시점이 인류세의 시작이 될 것이다. (또 다른 후보는 1964년이다. 1964년은 핵 실험이 가장 활발해 방사성 낙진이 가장 많이 남겨진 해이다. 하지만 핵 물질이 계속해서 붕괴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 수십만 년 뒤에도 이 낙진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변화를 알아내려고 빙하에서 샘플을 채취하는 과학자

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wikipedia




여섯 번째 대멸종


지질학적 경계를 결정하는 세계 층서 협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는 2016년부터 인류세를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먼 훗날 인류세는 어떤 시대로 기록될까?

인류세를 옹호하는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섯 번째 대멸종’이다. 과거에 (그 이유는 여전히 논란거리지만) 지구가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지구상에 존재하던 생물의 다양성이 순식간에 사라진 적이 다섯 번에 걸쳐 있었다. 이 사건은 ‘대멸종’으로 불릴 만큼 심각한 재앙이었다.

가장 최근의 대멸종은 중생대 백악기 말에 발생했다. 이때 공룡, 해룡, 익룡 등이 지구를 지배하던 파충류의 시대가 끝났다.

이 대멸종은 현재 그 유력한 원인까지 확인되었다. 6500만 년 전의 어느 평범한 날에 약 10킬로미터 너비의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 것이다. 지구와 충돌하자마자 수소 폭탄 100만 개의 달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충돌 지점 주위를 강타했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나온 먼지도 지구 전체로 퍼졌다. 낮은 밤처럼 어두워졌고,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대멸종!

이 충격적인 가설은 1980년 6월에 처음 나왔다. 혹시 핵전쟁이 일어나면 그 여파로 핵먼지가 지구를 뒤덮고 햇빛을 가리면서 핵겨울이 나타나 지구에 대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주장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가 그런 주장을 펼치면서 냉전 시대 핵무장의 위험을 경고했다. 그런데 이 주장도 바로 백악기 소행성 충돌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럼, 여섯 번째 대멸종은 뭘까? 다수의 과학자는 지금 이 순간에 바로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생물학』, 『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같은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대표적이다. 그러니까, 인간 활동으로 소행성의 출동 탓에 발생한 다섯 번째 대멸종에 상응하는 사건이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에 미국에서 1년간 있을 때, 《뉴요커》 기자 엘리자베스 콜버트의 『여섯 번째 대멸종』을 흥미롭게 읽었다. 2015년에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미국에서는 좋은 책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에 와 보니 최신간인데도 번역된 책이 나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정작 국내에서는 거의 반응이 없었다.

이 책은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지금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여러 가지 예를 들며 보여 주고 있다. 그 가운데는 환경 파괴로 인한 동식물의 서식지 감소나 인간의 밀렵처럼 우리가 얼른 생각할 수 있는 예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구촌이 되면서 대륙 간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곰팡이, 세균, 바이러스 등이 저항력이 없는 다른 대륙의 생물을 죽이기도 한다.

인간이 고의로, 또 자기도 모르게 옮겨 놓은 외래 생물이 토착 동식물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토착 생물을 멸종시킨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토종 물고기를 마구 잡아먹어 하천 생태계의 무법자로 알려진 외래종 어류인 큰입베스나 최근 강원도 횡성의 한 저수지에서 발견된 아마존 강의 ‘식인’ 물고기 피라냐가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콜버트가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 가장 강조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후 변화다. 지구 온난화가 초래한 기후 변화야말로 여섯 번째 대멸종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에너지 책책

☞『여섯 번째 대멸종』(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혜리 옮김, 처음북스, 2014년)

이 책은 여섯 번째 대멸종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는지를 생생한 취재와 과학자의 도움말을 엮어서 쓴 수작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러 생명체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멸종 속도나 멸종 규모가 과거 지구를 휩쓸었던 ‘대멸종’에 근접한다는 것인데요. 그 원인과 더불어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인간은 스스로 멸종을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eter Lindberg/flickr




기후 변화와 대멸종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북극곰의 서식지가 없어진다는 말이나, 둥둥 떠다니는 얼음 위에 북극곰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영상은 하도 많이 접해서 식상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구 온난화의 희생양인 북극곰을 등장시킨 것도 진부한 설정이었다. 차라리 그 북극곰이 설국열차의 생존자인 마지막 인간을 잡아먹는 것으로 끝냈다면 어땠을까?)

여기서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가 낳을 다른 영향들도 짚어 보자. 크뤼천이 인류세를 제안한 여러 이유 가운데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있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는 바닷물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의 양에도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바다야말로 지구에 존재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다에 녹아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고, 또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녹아서 바다로 저장되면서 일종의 균형이 생긴다. 그런데 최근 200년간 대기 가운데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바다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의 양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다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바닷물이 산성이 된다. (바닷물이 탄산수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바다 생물은 이렇게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서 탄산수가 되는 환경에 빨리 적응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다의 산성화 때문에 수많은 바다 생물이 고사하고 있고, 앞으로 산성화가 더 진행되면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렇게 바다 생물이 치명타를 받는 일은 정말로 큰일이다.

왜냐하면, 기후 변화 시뮬레이션 여럿이 공통적으로 경고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농작물의 생산량 저하다. 이렇게 육지의 농작물 생산량이 줄어들 때, 인류는 바다 생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이 바다 생물마저도 산성화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그럼, 인류는 도대체 어디서 식량을 구할까? (「설국열차」처럼 바퀴벌레 같은 곤충이 유력한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후 변화가 생물종에 미칠 영향 가운데 우리가 깨닫지 못한 것 가운데 하나는 더워진 지구 그 자체다. 많은 사람은 생물 종이 다양하기로 유명한 열대 지방을 연상하면서, 지구가 더워지면 좀 더 많은 생물 종이 살아가기에 더 좋은 기후 영역이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

지금 살아 있는 동물 종의 대부분은, 심지어 열대 지방에 살고 있는 것까지도 어느 정도는 추위에 적응한 종들이다. 즉 인간을 포함해서 지금 지구의 생물 종은 약 1만 1700년 전에 끝난 빙하기의 추위를 이겨 낸, 그러니까 추위에 적응한 종들이다. 만약 지구가 지금보다 더 더워졌을 때, 이렇게 추위에 적응해서 생존한 동식물, 미생물 들이 그 더위를 견뎌낼 수 있을까?

동식물들은 생각보다 온도 변화에 민감해서 적정 수준보다 조금만 더워져도 금방 활력을 잃어 버린다. (여름마다 폭염에 사망하는 사람을 보라! 만약 에어컨이 없다면 그 숫자는 지구 전체로 봤을 때 노약자를 중심으로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과학자 여럿이 빙하기를 견뎌 냈던 많은 종들이 더워진 지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상황을 걱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수십만 년, 수백만 년의 시간 규모를 생각하면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또 다른 종들이 더워진 지구에서 훨씬 다양한 생물 종들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먹고, 더불어 사는 동식물들이 과연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을까? 아니, 정작 인류는 끝까지 생존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피해 갈 수 있을까?


사막화로 말라붙은 농토 U.S. Department of Agriculture/flickr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 ④ 기후 변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존엄한 이주’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고향 땅이 물에 잠길 위험에 처한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에서 자국민이 기후 난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정책입니다. 이처럼 기후 변화는 단순히 우리 밥상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존을 결정하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특히 전례 없는 폭염과 가뭄이 계속되던 이번 여름을 보내면서 기후 변화를 체감하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내뿜은 온실가스가 원인이라는 친숙한 주장에서부터 지구의 온도 변화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주장까지, 심지어 '녹색 기술'을 새로운 돌파구로 삼으려는 선진국의 음모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오늘날,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은 21세기 ‘대전환의 시대’에 중요한 화두인 환경과 에너지 문제를 《프레시안》의 과학·환경 담당 기자인 강양구 기자와 함께 이야기하는 연재 게시물입니다. 지난 시간의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알리는 전주곡」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기후 변화를 둘러싼 논쟁과 의혹들을 짚고 넘어갈 예정입니다. 기후 변화는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 낸 ‘과학적 사기극’일까요? 아니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일까요? 기후 변화의 시대에 인류의 운명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요?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선택과 결정을 돕는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기후 변화의 정확한 정의


우리가 비교적 따뜻한 지구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온실 효과 덕분이다. 이산화탄소, 메탄 같은 온실 기체가 일단 지구로 들어온 태양 에너지를 밖으로 바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잡아 주고 있다. 만약 온실 효과가 없었다면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꽁꽁 얼어붙은 땅이었을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2013)에 나오는 지구처럼 말이다. 그런데 뭐든지 과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이른바 산업 혁명이 본격화된 18세기 말~19세기 초부터 갑자기 공기 중 온실 기체 농도가 증가하기 시작해서 지난 200년간 약 40퍼센트가 증가했다. 그러니까 지구 대기 가운데 온실 기체가 더 많아지면서 밖으로 빠져나가야 할 태양 에너지를 더 많이 잡아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지구의 기온이 오르는 현상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지구 온난화’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 혹은 이것이 초래하는 기후 변화를 놓고서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왜 이런 음모론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것일까? 혹시 음모론이 맞는 것은 아닐까? 이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기후 변화가 도대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기후 변화는 세 가지 ‘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온실 기체가 지구를 데운다(온실 효과). 이 때문에 지난 100년간 지구의 기온이 평균 0.74도 올라갔다. 고작 0.74도에 웬 호들갑이냐고? 현재보다 기온이 1도만 올라도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최소 4억 명, 최대 17억 명이 물 부족에 시달릴 수 있으며, 곡물을 비롯한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1000만~3000만 명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1도는 앞의 연재에서 잠시 언급한 생물 종의 변화에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개구리와 같은 양서류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구 기온 상승으로 수온이 오르면 직격탄을 맞는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서 많은 과학자는 지구 기온 상승을 2도 안에 잡아 두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2도가 올라도 생물 종의 20퍼센트 정도는 멸종한다.)

둘째, 지구를 데우는 온실 기체의 농도가 80만 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18세기 후반 산업 혁명 이후로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양은 40퍼센트 늘었다.

셋째, 그러니 이렇게 온실 기체 농도가 높아진 원인은 산업 혁명 이후 인간 활동에서 찾는 것이 맞다. 유엔 산하의 국제 과학 기구인 기후 변화 정부 간 패널(IPCC)에서 발간하는 「기후 변화 보고서」에서는 온실 기체 농도 상승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2001년(제3차 보고서) 66퍼센트, 2007년(제4차 보고서) 90퍼센트, 2013년(제5차 보고서) 95퍼센트로 높여 나갔다. (심지어 2013년 제5차 보고서는 회의주의자의 집중 포화를 의식한 가장 보수적인 보고서로 꼽힌다.) [보고서 보러가기]


과학자 100명 중 97명이 인간이 기후 변화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Skeptical Science

 



 


기후 변화 음모론의 진실


그렇다면, 이런 기후 변화를 둘러싼 사실을 놓고서 과학계에 논란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미국의 전 부통령 앨 고어가 『불편한 진실』에서 인용해서 유명해진 나오미 오레스케스의 연구는 흥미롭다. 미국의 유명한 여성 과학사가인 오레스케스는 2004년 12월 3일자《사이언스》에 「상아탑을 넘어서: 기후 변화에 대한 과학적 합의(Beyond The Ivory Tower: The Scientific Consensus on Climate Change)」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논문 링크: http://www.sciencemag.org/content/306/5702/1686.full)

오레스케스는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발표된 ‘기후 변화(climate change)’를 열쇳말로 다룬 과학 논문 928편의 초록을 살폈다. 이는 같은 시기 기후 변화를 다룬 약 1만 편의 논문 가운데 10퍼센트 정도에 해당되는 양이다. 검토를 마친 오레스케스는 이 논문들 중에서 명시적으로 인간 활동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를 부정하는 논문은 “단 한편도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를 쓴 통계학자 비예른 롬보르는 어떤가? 이 책은 지난 20여 년간 기후 변화 회의론을 다룬 책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저서다. 하지만 이 롬보르조차도 정작 앞에서 지적한 세 가지 사실을 놓고서는 대다수의 기후 변화 연구가 “대체로 균형이 잡혀 있다.”라고 실토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기후 변화 음모론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후 변화가 정치적, 대중적으로 승인을 받는 순간 큰 손해를 입는 이해 당사자가 있다. 예를 들어, 석유 기업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런 석유 기업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과학자들에게 뒷돈을 대면서 기후 변화에 반(反)하는 연구를 종용하고, 갖고 있는 힘을 적극 발휘해서 그런 과학자들의 담론을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거대 언론 매체를 통해 유포하고 있다.

오레스케스는 이 과정에서 프레드릭 사이츠, 프레드릭 싱어 같은 과학자를 주목한다. 이들은 냉전 시기 미국 국방 정책을 뒷받침하던 과학자로서, 1984년에는 당시 레이건 정부의 전략 방위 구상(SDI)을 옹호하고자 보수 싱크 탱크인 마셜 연구소를 설립했다. (SDI는 레이건 정부가 군수 산업을 위해서 밀어붙인 계획이다.)

반공주의와 시장주의로 똘똘 뭉친 이들은 냉전이 끝나자 새로운 적으로 ‘환경주의자’를 상정했다. 이들은 지구 온난화와 그것이 초래할 기후 변화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했고, 이런 주장은 그들과 이해가 같은 기업의 힘을 업고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오레스케스는 『의혹을 팝니다』를 통해서 이런 사실을 고발했다.)

언론은 이런 ‘청부’ 과학자의 견해를 1급 기후 변화 과학자들이 내놓은 연구 결과와 같은 비중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치 지구 온난화를 둘러싼 열띤 ‘과학 논쟁’이 있는 것처럼 대중의 이미지를 조작했다. 과학계에서는 사실상 합의가 이뤄진 지구 온난화와 그것이 초래할 기후 변화가, 마치 대단히 논쟁적인 과학 연구인 것처럼 알려진 것은 이런 사정 탓이 크다.


에너지 책책

☞『의혹을 팝니다』(나오미 오레스케스․에릭 콘웨이 지음, 유강은 옮김, 미지북스, 2012)

권력과 자본의 ‘청부’ 과학자가 과학을 진실을 왜곡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구 온난화, 담배와 폐암, 산성비, 오존 홀 등의 사례를 통해 폭로하는 책입니다. 주요 환경적, 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이와 같이 ‘과학의 탈을 쓴 회의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왼쪽)과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오른쪽), 이 같은 정치와 과학의 긴밀한 관계는 역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wikipedia




기후 변화의 불확실성


이 대목에서 좀 더 골치 아픈 문제를 토론해 보자. 앞에서 열거한 기후 변화를 둘러싼 세 가지 사실을 놓고서 과학자 대부분은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렇게 증가한 온실 기체가 앞으로 지구를 얼마나 더 열 받게 할지(몇 도나 더 오를지), 또 그렇게 열 받은 지구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연구한 갖가지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많은 시나리오를 연구 중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다. 그 가운데 가장 정교한 시나리오조차도 허점투성이다. 실제로 그 시나리오가 지정한 미래의 어느 시점이 오기 전까지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기상청의 일기 예보가 맞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슈퍼 컴퓨터를 몇 대나 들여 놓았다는데, 왜 이렇게 일기 예보가 틀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기상청의 일기 예보가 틀린다고 화내는 기사가 제일 한심한 과학 기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 유럽, 일본 같은 나라에서도 일기 예보가 틀리는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일주일이 넘어서면 어느 나라의 일기 예보나 그 적중 확률이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비가 올까, 안 올까?’에 대한 확률이 절반 수준이라는 것은 동전 던지기의 확률(즉 반반이다.)과 똑같다. 그만큼 날씨라는 것은 몇 가지 변수를 집어넣으면 딱 부러지게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일기 예보가 틀리는 것은 현대 과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 가지 해프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서울, 경기도, 한반도처럼 아주 좁은 지역의 일주일 후, 한 달 후의 날씨도 예측하기 힘든데 어떻게 지구 전체의 기후가 어떻게 될지 50년 후, 100년 후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겠는가? 기후 변화를 다룬 논문을 보면 ‘불확실한 추측’을 나타내는 표현, 예를 들어 ‘might’ 같은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2050년까지 전 세계 온실 기체 배출량을 1990년과 비교했을 때 50퍼센트 정도 줄인다고 해서, 앞으로 100년간의 지구 기온 상승 폭을 2~3도로 잡을 수 있을까? 또 그런 기온 상승이 과연 예측대로 현재의 생태계가 견딜 만한 기후 변화 수준에서 끝날까? 아무도 확실히 보증할 수 없다. (물론 현재 상태대로라면, 이런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지구 기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서 앞에서 언급한 여섯 번째 대멸종 같은 파국을 초래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인정하는 것이 있다. 그런 예측이 지극히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 온난화로 기후 변화가 어떻게 될지는 지극히 불확실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에너지 팁팁!

☞불확실성은 기후 변화 과학의 미덕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기후 변화 과학의 특성도 짚고 넘어가자. 기후 변화 보고서를 생산하는 IPCC는 대중의 오해와는 달리 별도의 과학 연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료 심사(peer review)를 거친 이미 발표된 문헌을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과학자들이 검토해서 초안을 작성하고, 과학자 공동체뿐만 아니라 각국 대표의 검토를 거쳐서 보고서 최종안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IPCC가 강조해 온 의제는 현장에서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정 때문에 기후 변화 과학자 공동체의 공유된 관념이든, (IPCC의 영향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기후 변화 연구 기금이든,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현장의 과학자는 IPCC에서 원하는 의제의 연구 결과를 생산할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와 과학의 결합한다!)

또 기후 변화 과학은 그 동안 과학자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전제해 온, 자연에 가까운 ‘근사적 참’에 다가가는 과학의 본질에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뮬레이션에 의존해 내놓은 연구 결과(시나리오)와 비교할 만한 미래의 자연(예를 들어, 100년 후 지구의 기후)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연은 현재의 대응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세기 해수면 상승이 최대 82센티미터 상승하리라는 제5차 기후 변화 보고서(2013년)의 예측은 최소한 100년이 지나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IPCC와 기후 변화 과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공표하는 목적은 그것이 ‘근사적 참’임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으로 그것이 미래에 현실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있다. 예측이 맞지 않게 될 때 역설적으로 기후 변화 과학의 존재 이유가 있다.



해수면이 상승한다면? baldeaglebluff/flickr

 



 


비관론자와 낙관론자의 싸움, 우리의 선택은?


기후 변화의 결과에 대해서는 비관론자와 낙관론자의 싸움이 있다.

낙관론자의 주장처럼, 약간(?) 더워진 지구에서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이 잘 적응해서 오히려 생물 다양성이 꽃피울 수도 있다. 반면에 비관론자의 말처럼, 조금(!) 더워진 지구에서 극지방의 동토층이 녹아서 그 안에 있던 동식물의 유기체가 썩기 시작해 다량의 메탄이 배출되고, 그 결과 지구 온난화가 빠르게 가속화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미래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의 미래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 그대로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사고 실험을 한 번 해보자. 여기 낙관론자가 있다. (이솝 우화의 베짱이다.) 이들은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래가 좋았다. 기후 대재앙도, 여섯 번째 대멸종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정말로 반가운 일이다.

물론 비관론자는 쪽팔릴 것이다. (이솝 우화의 개미다.) 이들은 미래가 나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여러 가지 준비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편이 이들에게도 좋다. 그들이라고 기후 대재앙이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났을 때, 생존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모두에게 좋다.

이제 다른 미래를 생각해 보자. 비관론자의 예측처럼 실제로 나쁜 일이 일어났다. 기후 대재앙과 그것이 낳은 극적인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났다. 영화 「투모로우」(2004), 혹은 훨씬 더 끔찍한 「설국열차」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그럼, 낙관론자는 어떻게 될까? 마치 이솝우화의 베짱이처럼 생존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비관론자는 (그들 역시 힘들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위험에 대비해 준비를 해 놓았으니 낙관론자보다는 좀 더 생존할 가능성이 크겠다. 자, 미래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낙관론자나 비관론자 모두 행복하다. 그런데 미래에 재앙이 닥치면 낙관론자의 경우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지지만 비관론자의 경우 최소한 생존 가능성은 높아진다.

우리는 낙관론자와 비관론자 가운데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 바로 이 순간에 지구 온난화나 그것이 초래할 기후 변화는 더 이상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가 된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인류 공동체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베짱이의 길을 선택해야 할까, 개미의 길을 선택해야 할까?

하나만 더 강조하자. 사실 비관론자의 길을 선택하면 한 가지 장점도 덤으로 있다. 위기 상황에서 이들 비관론자는 미처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이웃, 그러니까 낙관론자에게 손을 내밀 여유도 가질 수 있다. 어린이 눈높이로 각색한 이솝우화의 결말처럼, 굶어 죽게 된 베짱이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개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강조했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의 진짜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Carsten Tolkmit/flickr



「강양구의 에너지 톡톡」, 다음 시간에는 5편 「원전의 희생자들」에서는

화석 연료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로 주목받고 있는 원자력 발전의 허와 실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강양구

연세 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참여연대 과학 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시민 과학 센터) 결성에 참여했으며, 2003년부터 《프레시안》에서 과학·환경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부안 사태, 경부 고속 철도 천성산 터널 갈등, 대한 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등에 대한 기사를 썼으며, 특히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언론상, 녹색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1, 2』,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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