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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의 한국에 가다 9,10,11,12-'통감'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병탄의 주구 '일진회'

구름위 2015. 10. 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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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통감' 이토 히로부미

한상일 | 최종편집 2009.09.29 10:00:28

 

한국 왕래 22차례..통감직 3년반
1906년 2월 1일 한국통감부가 문을 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2월 20일 도쿄를 출발하여 이세(伊勢)신궁을 참배하고, 28일 시모노세키에서 군함[和泉]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3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다음날 통감부에 모습을 드러냈고, 9일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부임인사를 올렸다. 3년 반의 통감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메이지 지도자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만큼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그리고 한국에 오래 체류한 사람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1873년 ‘정한’문제가 중요한 정책 이슈로 등장했을 때 이토는 반(反)정한 편에 섰다. 그리고 기도 다카요시(木戶考允)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도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을 무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그가 30년 전 반대했던 ‘정한’ 프로젝트를 직접 담당하면서 총지휘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생애에 22차례나 현해탄을 넘나들었다. 그가 한국 땅에 첫 발을 밟은 것은 1888년이다. 사이고 츠쿠미치(西鄕從道)와 함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부산, 원산 등 동해안의 항구를 거쳐 갔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머물렀던 흔적은 없다. 두 번째 한국방문은 1889년 한국과 만주를 유람하는 개인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서울을 보고, 고종황제를 알현했다. 비록 관광객으로서의 여행이었지만 수상과 추밀원 의장을 역임한 이토에 대한 대접은 융숭했다. 세 번째는 러일전쟁 발발 직 후 한국을 통제하기 위하여, 네 번째는 을사강제조약을 총지휘하기 위한 천황의 특별대사로, 그리고 다섯 번째 이후는 통감으로 현해탄을 오갔다. 이토는 1905년 말 이후 약 3년 반 가까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감으로 한국에 머무르면서 ‘정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하얼빈 역에서 자신의 삶의 종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성도 없는 빈농의 아들, 혁명운동에 몸을 던지다
입신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22일(음력 9월 2일) 조슈(長州, 오늘의 야마구치(山口)현)의 츠가리무라(束荷村)라는 빈촌(貧村)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리스케(利助). 히로부미(博文)라는 이름은 메이지 유신 후 그가 정부의 고위직을 맡으면서 쓰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의 이름은 쥬조(十藏). 성(性)씨는 오치(越智)라는 설도 있고 하야시(林)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 무사가 아니면 성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성씨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가문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 정보도 안 되는 농지를 일구면서 살아야 하는 쥬조의 집안은 생계가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리스케가 6살 때 아버지 쥬조가 홀로 출향(出鄕)하여 조슈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하기(萩)로 흘러들었다. 온갖 궂은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고달픈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번(藩)의 창고 관리인인 이토 나우에몬(伊藤直右衛門)의 눈에 들어 그의 머슴살이를 하면서 최저의 생활이지만 그런대로 안착할 수 있게 됐다. 처와 아들을 하기로 불러와 다시 가정을 꾸렸다. 리스케가 9살 때였다. 후사가 없었던 이토 나우에몬은 충실한 종복인 쥬조 부자를 1854년 양자로 삼았다. 비록 야우에몬이 무사계급의 최하위인 아시가루(足輕-武家에서 평시에는 잡역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졸이 됨)에 불과했지만, 그의 양자가 되면서 쥬자 부자도 무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리스케도 이름을 이토 슌스케(伊藤俊輔)로 바꾸었다. 비록 그것이 최하위의 계급이지만 평민 하야시 리스케가 무사 이토 슌스케로 신분상승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토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의 많은 인재를 키워낸 松下村塾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메이지 유신의 스승 요시다 쇼인
그러나 그가 일본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막말 최대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유신3걸(維新三傑)의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考允)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토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을 배우고, 기도 다카요시의 ‘종자(從者)’로서 막말(幕末)의 ‘지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유신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863년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영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쥠으로서 출세의 기반을 닦았다.

 

영국체류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양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서양의 위압 속에서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척[攘夷]하는 것이 아니라, 막부를 무너뜨리고[倒幕] 새로운 체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본의 정국이 존왕(尊王), 양이(攘夷), 좌막(佐幕), 도막(倒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그의 주인인 기도 다카요시를 도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다.

 

바쿠후(幕府)정부의 허락없이 영국으로 유학(1863)을 떠난 5명. 뒷날 이들을 가리켜 '죠슈Five'라고 불렀다.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이오우에 가오루(井上馨), 엔도 킨스케(遠藤謹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총리 4차례..헌법 만들고 청일-러일전쟁 주도

 

유신운동에 참여한 경력과 서양의 경험을 가진 이토는 메이지 정권 수립 후 ‘순풍에 돛단 듯’ 출세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특히 유신 3걸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가 죽게 되는 1878년 이후, 이토는 메이지 정권 안에서 확고부동한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정부조직을 제도화하고 법규화 함으로써 행정부와 관료의 기틀을 마련했다. 헌법을 조사·연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독일에 유학(1882)하여 장기간 체류하면서 유럽의 헌법을 공부한다. 그리고 메이지 헌법을 기초하고 천황제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그는 1885년 내각제가 실시된 이래 네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내각을 이끌었고, 세 차례 추밀원(樞密院) 의장, 귀족원 의장, 원로(元老)의 일원으로 메이지 일본의 중심에 서 있었다. 물론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이어진 강화조약을 직접 또는 배후에서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1900년 보수정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창당하여 정당정치의 길을 열기도 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1906년 이전, 네 번의 총리대신을 위시하여 일본에서 중요하다는 모든 직책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가 메이지 국가건설의 일등 공신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토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인이면서 외교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경륜가(statesman)"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천황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고, 동양에서 가장 능력 있는 정치가로 평가 받는, 그리고 일본 최대의 실력자인 이토를 한국의 통감으로 임명한 까닭이 무엇일까? 한국병탄은 일본 최대의 국가목표임을 뜻하고 있고, 또한 병탄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항상 대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

성품
격동의 시기에 이토가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나 시대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대단한 주선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던 것처럼, 이토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의 미움을 사는 일이 별로 없었고, 또한 항상 윗사람 눈에 들게 행동했다. 이토는 “선배로부터 사랑받고 그들이 쓰기에 편리한”인물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보살핌, 기도 다카요시의 보호, 오쿠보 도시미치의 후원, 이와쿠라 도모미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도쿠토미 소호가 평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메이지시대의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은 존재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동시대 인물 가운데  누구보다도 지위 상승을 위한 노력가였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가 더 오를 수 없는 지위까지 오른 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토는 스스로 출세의 비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출세를 하려면 “지위 높은 선배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오쿠보 도시미치 내각의 참의경보로 임명됐을 때 내가 내각에서 제일 어렸다. 이미 고인이 됐으나 그 때 산조 (사내토미)나 이와쿠라 (도모미), 또는 기도 (다카요시)나 오쿠보 등이 필요로 하는 문제의 해답을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하여 준비해두었다가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적시에 제시하고는 했다. 이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다 보니 드디어 크고 작은 정치의 중요한 정무에 참여하게 됐다. 비결이라면 이런 것이다.” 즉 항상 대안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훈장 차고 칼 차기를 좋아한 명예욕

 

동시대 인물들의 이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가 공명심과 명예욕이 강했고, 대단히 관료적이었다는데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능력은 평가받았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자신의 외양을 더욱 권위적으로 치장했는지 모른다. 이토와 동시대의 한 정치평론가에 의하면 “훈장을 만든 것도 이토 공(公)이고 귀족을 만든 것도 이토 공이다. 이토 공은 명예를 표창하는 기구(器具)를 많이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많이 취했다”라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갖추는 외양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고 늘 훈장을 많이 단 제복입기를 즐겨했고, 무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식석상에는 항상 대검(帶劍)을 즐겨했다.

 

많은 훈장과 칼을 찬 이토. 공식석상에는 늘 이처럼 훈장과 칼을 꼭 찼다

 

 

 

 

 그는 또한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주인이기도 했던 기도 다카요시가 옛날을 회상하면서, 이토는 “에도 번의 저택에서 나의 수발을 들 때 나를 찾아오는 무사들을 위해 내놓은 술안주용 두부 값이 한 달에 한량 세 푼이나 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한 갑에 여덟 량이나 하는 담배를 닷새 만에 다 피워버리고, 열다섯 량이나 하는 모자를 쓸 정도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이토의 사치스러움을 은근히 탓했다.

그러나 이토는 국내정치를 지배하기 위하여 파벌을 키운다거나, 또는 권력을 이용한 축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토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동지면서 정적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자주 비교된다. 조슈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함께 유신운동에 뛰어 들었던 두 사람 모두 요시다 쇼인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유신 후 이토가 관료제를 다듬으며 정치인으로 성장해 나갈 때, 야마가타는 육군을 건설했다. 야마가타는 군을 배경으로 거대한 파벌 망(網)을 궁중, 정계, 관료의 세계로 넓혀나가면서 국내정치의 향방을 좌우했다. 그러나 이토는 파벌에 초연했다. 그리고 국내정치보다 대외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메이지 초기 야마가타를 위시하여 많은 정치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권력형 부정축재에 관여됐고, 또한 권력자의 이러한 행태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는 이상할 정도로 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대부분의 권력자들처럼 골동품, 분재, 다도, 별장 등에도 관심이 없었다. 야마가타의 별장[無隣庵]에 비하면 이토의 별장[滄浪閣]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토가 노년에 검(劍)에 흥미를 가지고 수집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독서 이외의 취미가 있었다면 ‘여색(女色) 즐기기’였다. 메이지 천황도 인정했던 그의 ‘여성편력’은 비밀도 아니었고 숨기려하지도 않았다.

 

"明治好色一代男, 食道樂, 大勳位伊藤侯爵."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하여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한 만화. 그중에는 여승(女僧)도 보인다.(滑稽新聞, 1903.9.5)

 

 

 

강자에 굽히고 약자를 제압하는 호색한 "나의 취미는 여자뿐"

 

 그는 스스로가 “나는 본래부터 욕심이 많지 않다. 저축 같은 것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나는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고 축재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사를 돌보며 틈틈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여자[藝妓]를 상대하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 자신의 ‘여색취미’를 거리낌 없이 밝히기도 했다. 이토는 겨우 160cm(5.3尺)에 이르는 단구(短軀)의 체격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강장자(强壯者)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정력이 강한 건강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정치인이었던 오자기 유키오(尾崎行雄)에 의하면 이토의 “최대의 결점은 그의 호색성”이었다. 이토는 “늙은 기생, 어린 기생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싫증나면 곧 잊어버리고, 자신이 관계했던 여자들을 사람들에게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괴팍한 ‘여색습관’을 지닌 호색한이었다.

이토가 정부의 중책을 맡고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매사에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양이운동이 한참일 때 외국영사관을 앞장서서 방화하거나,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총리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서 전전과 전후를 통틀어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인 것이 아닌 ‘암살’을 자행한 인물은 이토가 유일한 존재이다.

그는 늘 실리적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국가정책을 다루었으나, 적절한 시기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자신의 결정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결단력과 과단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을사강제조약 당시 고종을 위협하기를 주저하지 않거나, 또는 헤이그 사건 이후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몰아낼 때 보여 준 태도가 그의 이러한 성품의 한 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포용력이나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인간미는 부족했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성격을 지녔던 인물이다.

 

일본 근현대사의 대가로 알려진 오카 요시다케(岡義武)는 이토의 한국병탄정책과 하얼빈에서의 그의 죽음을 일본 외교의 특성과 이토의 성품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오카에 의하면 메이지 대외정책의 특성은 “[구미의] 여러 나라에 대한 관계는 대단히 신중하여 일반적으로 종속적 색채”가 짙었으나,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대단히 공세적 태세”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본 외교의 특성을 한 개인에 비유해서 본다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토라는 사람을 닮았다. 통감 취임전후 이토가 한국에서 연출한 역할을 되돌아본다면 그는 우리나라의 ‘대한국책’을 집행하는 데 썩 잘 어울리는 대표자였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오카는 “이토는 이 ‘국책’을 전적으로 자신의 성격대로 수행했다. 한국에 있어서 그는 정말로...‘전투적 인사’ 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흉변(兇變)을 자초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즉 강한데 약하고, 약한데 강한 이토의 성품과 일본의 외교노선이 결국 그로 하여금 하얼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는 것이다.

하얼빈 10.26..안중근 의사 손에 쓰러진지 100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쓰러진 것이 1909년 10월 26일이니 꼭 100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국제정세, 동아시아의 형세, 한국과 일본의 관계 모두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사는 제국주의와 냉전의 시대를 마감하고 세계화와 지역화가 국제적 흐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시아에는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굴욕의 19세기와 20세기를 보낸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일본의 위협적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메이지의 영광에서 주권상실로 전락했던 일본은 패전의 잿더미를 딛고 다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나 21세기를 향한 국가진로 모색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마감했으나 한국은 그 시대의 후유증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됐고, 북쪽의 절반은 아직 일본과 식민지 시대의 연속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토가 그의 인생의 마감 길에 남긴 아래의 시구는 한일관계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乾坤不變(천지는 변하지 않고)
古今相通(어제와 오늘이 서로 통하고 있다)
魚躍淵水(물고기는 깊은 물에서 뛰어 오르고)
鳶飛太空(솔개는 큰 하늘을 나르고 있다)

 

 

 

10. 이토의 '한국 지배' 전술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0.07 10:33:26

 

언론 활용한 홍보의 귀재..주필들 협조 약속

한국으로 부임하기 직전인 1906년 1월 30일 저녁, 이토는 주요일간지의 주필들을 레이난사카의 관저로 초청했다. 메이지시대를 통틀어 이토만큼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이 터득하고, 언론과 공존했던 정치인도 그리 흔치 않다. 그는 언론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언론계 출신인 후루야 히사츠나(古谷久綱)를 1900년 이후 비서관으로 채용할 정도로 언론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언론을 적절히 활용하여 자신의 정책노선과 입장을 밝힘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고, 또한 여론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다. 통감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토는 국내외기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곤 했다. 통감으로 부임하기 전 주요언론사의 주필을 초청한 것도 언론을 통해 통감의 시정방침을 밝히고 언론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주필들과의 간담회에서 이토는 통감으로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시정방침을 밝히고 언론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는 먼저 그동안 언론에서 비판해 온 을사강제조약의 ‘추상성’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에 의하면 5개조로 된 협약이 비록 간단하고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운영의 묘”를 살리면 “협약의 정신을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협약의 정신’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가 제시하는 ‘시정방침’에 미루어 짐작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 내정 장악, 주둔군 증강, 일본인 이민 장려..
이토는 “조선보호의 요점”은 “외교, 국방, 시정개선 세 분야”에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특히 “시정개선”을 강조했다. 즉 통감부의 업무가 한국의 대외관계를 전담하는 것은 물론, 이와 함께 ‘시정개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내정과 국방도 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일본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일본인의 한국이주를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방안의 하나라고 밝혔다. 한국의 내정관여, 주둔군 증강, 이민 장려 등 이 모든 것은 협약에 명시한 ‘대외관계’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토가 말하고 있는 ‘협약의 정신’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자신의 구상을 실현함에 있어서 언론에게 두 가지 협조를 당부했다. 하나는 조급한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사회에 만연돼 있는 “부패와 비리는 뿌리가 깊고 고질화”돼 있기 때문에 ‘점진적’ 개선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를 취하려고 하면 예기치 못했던 부작용과 보다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이토의 ‘실리주의적 점진주의’다.

또 다른 당부는 한국에서 활동하거나 또는 한국을 내왕하는 일본인들이 보다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언론이 선도해 달라는 것이다. 이토에 의하면 그동안 일본인이 한국에서 취한 “비도(非道)의 거동(擧動)”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 한국인이 “밖으로는 굴종을 치장하고, 안으로는 원한의 정을 키우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앞으로 한국으로 이주할 일본인들을 잘 선별하고, 정부당국도 이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정당정치 발전에 기여한 당시 <마이니치(每日)신문>의 시마다 사부로(島田三郞) 주필은 참석한 언론인 모두를 대표하여 이토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지원을 약속했다. 아울러 “도저히 일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을 신영토에 관리로 채용하는 경우가 그동안 적지 않았는데, 통감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그와 같은 정폐(情弊)를 단절”할 것을 당부했다.  

 

을사조약에 없는 '총체적 지배' 구상..낭인들 의견 수렴

한국 통감 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을사강제조약 완성 후 통감으로 부임하기까지 3개월 동안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사정에 밝은 외무관리, 언론인, 학자 등은 물론 대륙낭인을 포함한 재야인사들을 만나 ‘보호정치’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주도면밀한 이토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한국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다듬어 나갔다. 그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이미 통치를 위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문서화 된 것은 없다. 그러나 이토가 부임하면서 신속히 취한 초기의 조치들을 종합해 보면, 그의 통치구상과 전략이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운영의 묘’를 살리기 위한 이토의 통치전략은 ‘실리적 점진주의’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외교권은 물론 ‘내정’의 실권을 서서히 잠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고종은 물론 한국 내각에 통감부가 내정에 관여한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이토에 의하면 ‘동양화란(東洋禍亂)의 근원’인 한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국정개량이 필요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외교와 내정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토가 고종에게 통감 부임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국이 오늘의 쇠운을 만회하고 독립부강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국정의 개량이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하는 ‘국정의 개량’이라는 것은 “황실의 존엄과 강령 유지, 외교 관리, 시정개선, 국토방위”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이는 외교만이 아니라, ‘총체적 지배’를 의미하고 있었다.

 

한국 내각 유지 "신분 보장 할테니 안심하시오"
이토는 ‘총체적 지배’를 위한 ‘운영의 묘’를 크게 세 방향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첫째는, 신문사 주필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밝히고 있는바와 같이, 그는 과격한 변화보다는 먼저 안정을 유지하면서 점진적 개선과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통감의 수족이 되어 실질적으로 정책을 집행할 한국정부의 내각과 정치권의 안정을 중요시 했다. 내각의 편제와 구성원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지배계층의 동요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분을 확실히 보장해 줌으로써 더욱 친일의 성향을 배양하려고 했다. 을사강제조약이 조인된 직후 이토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그는 한국정부의 각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신분보장을 약속했다.

“시정개선을 해 나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일반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통감부는) 지금의 내각대신을 교체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현재의 내각으로 일치협동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폐하께서도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고 또한 대신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본인도 폐하와 같은 뜻으로서 현재의 각 대신을 변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신 여러분도 안심하고 국리민부(國利民富)를 위해 진력해주실 것을 당부합니다.”[伊藤大使 對話錄, 1905.11.29]

한국 각료들과 가진 최초의 공식회의에서도 이토는 “현재의 각 대신은 결정적인 과실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본인은 충분히 지원할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안심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직무에 충실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라고 약속했다. 대신들의 신분보장을 통감으로서 다시 확약한 것이다
실제로 이토는 1907년 5월 박제순 내각을 이완용 내각으로 교체할 때까지 약 16개월 동안 기존의 내각을 그대로 이끌고 가면서 통감통치의 체제를 굳혀나갔다.

 

강대국 간섭 피하려 "한국내각이 관장" 외형 갖춰
‘운영의 묘’를 위한 이토의 둘째 구상은 ‘보호통치’에 적합한 통치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국가를 건설하면서 통치를 제도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토로서는 새 영역에 대한 지배의 틀과 형식을 구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토가 보다 더 심각하게 이 문제를 검토한 것은 강대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1905년의 을사강제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만을 장악하는 것으로서, ‘내정’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조약 자체는 물론, 이토 또한 ‘내정’은 종전과 같이 한국인이 관장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내외에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나 이토가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외교권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지배’였다. 즉 내정의 실권도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을 늘 의식해 온 이토로서는 통감부가 한국 내정을 직접적이고도 공개적으로 관장할 경우 한국내의 반발을 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이는 국제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일본이 비록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강대국 대열에 들어섰고, 미국, 영국, 러시아를 위시한 서양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의 ‘탁절한’ 지위를 인정했다 하더라도, 통감부 지배를 시작할 1906년 일본은 여전히 불평등 조약 속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토의 염려가 결코 지나친 기우라고만 할 수 없다. 더욱이 삼국간섭을 체험한 이토로서는 당연한 염려였다. 

이러한 판단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 이토 특유의 통치 메커니즘이다. 즉 외관상 또는 형식적으로는 한국의 황제와 정부가 내정을 통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통감과 일본이 지배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이토는 두 개의 통로를 마련했다. 하나는 전반적인 통치의 기저를 논의하기 위한 황제와의 협의를 정례화 하는 것이었다. 통감정치를 협의하기 위해 ‘알현’이라는 절차를 거처 이토는 먼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개략적인 시정 방안과 방향을 고종에게 ‘보고’하고 협의한다는 것이다. 대외적 명칭은 ‘알현’이고, 형태는 ‘협의와 보고와 재가’이지만, 실은 자신의 정책을 고종에게 ‘통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외형상 한국의 최고지배권자인 황제와 협의해서 통치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토가 제시한 방향에 대한 황제의 거부는 통하지 않았다. 이는 처음부터 드러났다.

 

고종의 거부에 단호 "누구도 이의 제기할수 없소"
1906년 3월 9일 통감으로 부임한 후 최초의 ‘알현’에서 이토는 시정개선 대상으로 금융, 교육, 군사제도, 궁중내부의 문제, 궁중의 재정문제 등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그리고 시정개선을 ‘즉시’ 착수하고, 한국 황실과 정부가 어려움을 감내할 일, 입법과 행정 개량, 차관 도입, 보통교육 실시, 경찰력 확장 등 여섯 가지의 방안을 제시했다. 개선의 대상이나 방법 모두 외교와는 무관한 국내통치에 관한 사항이었다. 고종황제는 이토의 방안을 그대로 수락하지 않았다.

 “시정개선에 관한 것은 짐이 적절하게 정부대신과 충분히 협의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정부대신들이 그 결과를 보고할 때마다 짐이 세밀히 검토하고 재가하여 시행토록 할 방침이오.”  이는 고종과 대신이 국내통치를 담당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토는 고종에게, “통감의 임무가 귀국에 대한 지도경영을 담당한다는 데 강대국정부가 모두 동의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히로부미는 앞으로 귀국의 진운에 필요한 충언과 행동에 그 누구로부터도 이이를 제기할 수 없고 또한 방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이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답했다.

모든 ‘시정개선’은 자신의 뜻대로 처리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했다. 이는 이토가 을사강제조약 당시 “내정, 즉 자치의 요건은 의연히 폐하의 친재 아래서 폐하의 정부가 이를 행하는 것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고종에게 한 약속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실제로 그 후 모든 정책은 이토의 뜻대로 진행됐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이미 이토의 수중에 있었다.

 

이토의 지배기구 '협의회' 구성..고종 알현서 사전통보후 내각에 '명령'
통치 메커니즘의 또 다른 통로는 구체적 정책 입안과 집행을 막후에서 조종하기 위한 협의체 구성이다.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가 바로 그것이다. 통감 관사에서 이토가 주재하는 이 협의회에는 한국정부의 내각 전원과 필요에 따라 일본인 재정고문 및 통감부 고위관리들이 참석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신속하게 이 협의회를 가동했다. 2일 서울에 도착하여 9일 ‘알현’을 통해 고종에게 시정방침을 통지하고, 13일 협의회를 열고 전반적인 시정개혁을 논의했다는 것은 이토가 한국통치를 위해 얼마나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구상했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종을 알현한 직후인 9월 13일 개최된 1차 협의회에서 이토는 먼저 고종에게 제시한 시정개선의 방향을 대신들에게 설명하고 황제도 이에 동의했다는 뜻을 전했다. 또한 앞으로 모든 국정에 관한 논의는 ‘협의회’가 담당한다는 것도 밝혔다. 그리고 협의회가 역점을 두어야 할 시정개선으로서 농업개량, 교육제도 개선, 금융기관 확장, 경찰의 쇄신, 도로, 수도, 및 배수공사, 관개 및 식목 등을 제시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차관도입과 경찰력 증강에 관하여 논의했다.

통감 부임후 한복을 입고 사진 찍은 이토. 왼쪽부터 이토의 딸, 내무대신 이지용과 그의 처, 이토 히로부미와 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박의병과 처

 

통치자금 1천만엔 조달..한국 대신들 놀라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시정개선에 필요한 기업(起業)자금으로 일천만 엔을 조달했다. 그는 한국정부의 재정고문으로 있는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대신들에게 설명할 것을 지시했다. 메가다의 보고에 의하면 이토는 한국의 관세수입을 담보로 일본흥업은행(日本興業銀行)으로부터 일천만 엔의 차관을 성사시키고, “오백만 엔은 3월중 일시에 입수가 확실”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모든 대신들은 신속한 자금조달에 놀라면서 동의했다.

이토는 우선적으로 실행해야 할 사업의 내용과 예상되는 비용을 검토할 것을 메가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이지용(李址鎔) 내무대신에게 경찰력 증강에 관한 문제를 검토하여 다음 협의회에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끝으로 모든 대신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의 신분을 보장하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국가를 위하여 진력할 것인가, 그리고 생명을 건다면 어떤 일이라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각오”로 업무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國魂 없는 대신들 "일신 배려에 감사"..이토의 신하로 전락
이에 박재순(朴齋純) 참정대신은 “대단히 유익한 협의회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했다. 또한 법무대신 이하영(李夏榮)은 “사람의 앞날을 미리 예측할 할 수는 없지만 대신들은 일치하여 열심히 업무에 임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우리들의 일신을 이처럼 염려해 주시는 (통감의) 뜻에 각 대신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 한국의 대신들은 이미 국혼(國魂)을 상실했고, 고종의 신하가 아니라, 이토의 신하였다.  

실질적으로 내정을 운영한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는 1906년 3월 13일에 시작해서 한국의 병탄이 완성되는 1909년 12월 28일까지 97회 계속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협의회를 77회 주재하면서 그가 구상하고 있는 모든 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이 기구를 통해서 실행했다.

메이지의 관료 제도를 확립하고 네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내각을 이끌었던 이토의 ‘협의회’운영은 탁상공론에 치우쳤던 한국정부의 내각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제1차 협의회에서 지시받은 메가다는 21일에 열린 2차 회의에서 교육, 수도공사, 도로공사, 농공업은행보조 등을 시급하게 시정해야 할 분야로 선정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했다. 중요한 정책을 제시하고, 논의하고, 결정하여 집행을 지시하고, 그리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근대적 행정기법은 능률적이고 효과적이었다. 협의회가 거듭할수록 한국의 내정은 통감부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통감부 직원은 75명뿐..대한제국을 한손으로 요리하다
이 협의체를 구성한 이토의 의도는 일본의 뜻대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지만, 모든 정책은 한국 내각의 승인을 거쳐서 결정되고, 그리고 한국 정부에 의해서 집행하는 모양새를 가추기 위함이었다. 실질적인 정책의 입안과 집행의 방향은 통감부 내의 총무부, 농상공부, 경무국에서 정하고, 이를 협의회에서 승인을 거처 한국 내각이 집행하는 형태를 갖추었을 뿐이다.
일본정부가 확정한 관제(官制)에 의하면 통감부의 인원은 위로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서 말단의 경비원을 포함하여 모두 75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메이지 국가를 건설한 행정능력과 통치경험은, 아직도 구습에 젖어있는 대한제국을 요리하기에 충분했다. 이토는 이 ‘협의회’를 통해서 병탄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하나씩 만들어 나가면서 지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실질적 점진주의’의 실천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가지고 온 세 번째 구상은 한국내의 친일세력을 배양하고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이토는 대륙낭인의 대표적 인물로 고쿠류카이(黑龍會)를 이끌고 있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대동했다.

 

 

11.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포석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0.14 10:43:06

 

일본정부-한국통감부-대륙낭인의 "병탄 합동작전"

일본의 한국병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츠라 다로-데라우치 마사다케-고무라 쥬타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 이토 히로부미-하야시 곤스케-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끄는 한국의 통감부와 주둔군,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스기야마 시게마루-다케다 한시를 핵심으로 한 대륙낭인들의 합작품이다.
그러나 최전선에서 병탄의 길을 열어 간 무리는 우치다 료헤이와 그를 중심으로 한 대륙낭인 세력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임명된 직후인 1905년 말,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6)‘병탄의 첨병(C) 주역들’ 참조)는 이토의 초청을 받고 레이난사카(靈南坂)에 자리 잡고 있는 관저로 찾아갔다. 통감으로 해야 할 일을 구상하면서 이토는 스기야마의 식견과 견해를 듣고 싶었다. ‘정보의 집결지’이면서 ‘해결사’의 능력을 지닌 스기야마를 이토는 높이 평가하고 때때로 그를 개인적으로 불러 정국의 동향과 의견을 경청하곤 했다. 1895년 이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스기야마는 이토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다. 특히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창당하는 과정에서 이토는 스기야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토가 1900년 제4차 이토내각을 꾸밀 때 스기야마에게 경시총감의 직책을 권유할 정도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주인 못 만난 名馬 한 필을 부리시지요"

저녁과 반주를 겸한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랫동안 계속됐다. 대화의 주제는 일본정치에서 동아시아 정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한반도의 중요성과 통감의 막중한 사명에 이르자, 스기야마는 고쿠류카이(黑龍會)의 회두(會頭) 우치다 료헤이를 통감의 개인보좌관으로 삼아 활용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천거했다.

“지금 일본에는 비길 데 없는 명마가 한 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그 말에 재갈을 물리고 한 번 부려 봄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이 누군가?” 이토가 물었다.
“우치다 료헤이입니다.” 스기야마가 답했다.
“우치다 료헤이라! 불굴의 사나이라고 알고 있는데 한번 시승(試乘)해보도록 할까!” 이토가 화답했다. 스기야마의 천거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직 없이 자유롭게 사명을 수행하련다"

며칠 후, 후쿠오카(福岡) 출신으로 우치다 료헤이의 선배이면서 외교관인 구리노 신이치로(栗野慎一郞)는 이토 히로부미의 심부름으로 우치다를 찾았다. 그는 우치다에게  이토의 개인 참모로 통감부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권했다. “군(君)이 이토 후작을 수행하여 한국으로 가서 그의 한국 경륜을 도울 뜻은 없는가? 후작은 군이 (통감부의) 관리가 되기를 희망하면 관리로, 그렇지 않으면 자유로운 신분으로 필요한 임무를 담당하기를 바라고 있네. 국가를 위해서 분발하는 것이 어떤가?” 이에 우치다는 ‘자유로운 신분’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이토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우치다의 역할은 이토의 세 번째 통치구상, 즉 한국 내 친일세력을 양성하고 조종하여 합방운동을 한국인이 주도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치다는 이토의 기대 이상으로 병탄 실현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통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대마도 嚴島신사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중앙 화살표가 이토 히로부미, 왼쪽에서 세번째 화살표가 우치다 료헤이.

 

동학운동에 불 지른 땅..우치다의 한국인觀
이토가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통해 통감지배를 한국화하고, 제도를 통해 실질적 지배권을 조금씩 잠식해 나가는 동안, 통감의 막빈(幕賓)으로 이토를 수행하여 서울에 함께 온 우치다 료헤이는 남산 밑 필동에 위치한 관사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방향을 모색했다. 그의 거처는 ‘정한(征韓)’의 뜻을 펼치려는 대륙낭인의 거점이 됐고, 시간이 갈수록 이곳을 찾아드는 친일 한국인의 수가 늘어갔다. 

한국 땅은 우치다에게 결코 낯선 곳은 아니었다. 1894년 동학봉기 당시 청일전쟁을 위한 ‘방화의 역할’을 담당했던 덴유쿄(天佑俠) 활동 이후 이미 여러 차례 오갔기 때문에 상당히 친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는 과거의 경우와 달랐다. 우치다는 ‘정한’이라는 뚜렸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통감의 참모라는 신분으로 한국에 온 것이다. 통감부의 공식적인 관리 신분은 아니었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개인 참모라는 지위는 우치다에게 과거와 달리 확실한 신분 보장과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로써 그는 병탄의 길을 열어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국의 내정 조사 특명..각계 인맥 만들기
통감부 업무에 구속되지 않는 우치다는 자유롭게 활동했다. 그는 이토 통감으로부터 ‘한국의 내정조사’라는 특명을 받고, 반년동안 여러 정치, 사회, 종교단체의 성격과 구성원들을 살펴보고, 지방의 여러 곳을 여행하고, 각계 각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정계의 복잡한 세력관계와 인맥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면서, 한국 내 친일과 배일단체의 성격과 현상을 조사했다. 또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6)‘병탄의 첨병(C) 주역들’ 참조))를 위시하여 뜻을 함께 하는 고쿠류카이 회원과 대륙낭인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앞으로 해 나갈 일들을 의논했다. 여유로운 듯 한 우치다의 이러한 행각은 한국의 정치 현상과 사회 실태를 살펴보면서 ‘정한’을 위한 큰 방향과 전략 수립을 위한 사전 준비였다.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 병탄의 중심에 섰던 대륙낭인 그룹 흑룡회 주역들, 왼쪽부터 우치다 료헤이, 이노우에 도사부로(井上藤三郞), 다케다 한시, 요시쿠라 오세이(吉倉汪聖), 구주 요시히사(葛生能久).


준비기간을 거친 우치다는 한국을 병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는 확고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반년 후 그가 얻은 결론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보호정치를 폐기하고, 한국 황제를 폐위시키고, 일한연방(日韓聯邦)을 성취”함으로써 일본의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한 보호 통치는 결국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많은 자원을 낭비하게 되고, 오히려 한국 내 반일 세력을 양성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했다.

"점진책은 낭비, 즉각 장악을"
우치다가 이토 통감에게 제출한 보고서[滿韓開務鄙見]에 의하면 필요한 것은 일본 정부와 통감부가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귀속시킨다는 확고한 의지와 뚜렷한 방향 설정이고, 이를 한국인의 자발적 운동으로 만들어가는 전략이었다. 그는 중국의 혼란과 포츠머스 조약의 여세를 몰아 “먼저 한국을 발본(拔本)하여 미리 기초를 다지고”, “정권을 장악하여 위압(威壓)”할 것을 건의했다. ‘보호’통치가 아니라 직접통치에 의한 강력한 지배, 즉 ‘급진적 병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병탄’을 한국인의 운동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한국인의 특성’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치다가 활용한다는 ‘한국인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한국인 습성 활용하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인의 습성이며, 그들은 이리의 잔인하고 혹독한 본성을 아첨과 가식의 양가죽 속에다 감추고 있다. 불쌍해서 친절을 베풀면 버릇이 없이 굴고, 안아 주면 업어 달라고 매달리고, 실질적인 독립심은 없으면서도 겉으로의 독립만 추구하는 것이 한국인들이다. 김춘추의 외교 정책(동족인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외국인 당나라 군대를 불러 들인 것을 뜻함--필자주)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인의 성격, 습성으로 변하여 그들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제부터 이러한 특성을 가진 한국인들을 조종하여 일본에 유리하게 해야 할 것이다."<日韓合邦秘史>

한국인의 자발적 합방운동 유도..일진회 선택

우치다가 ‘일본에 유리하게’한다는 것은 한국인들을 조종하여 병탄을 ‘순수한 한국인의 애국운동’으로 이끈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병탄은 일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간절한 희망과 전적으로 자발적 의지에 의하여 성립된 역사적 사실로 객관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정세와 정치·사회단체의 현황을 면밀히 검토한 우치다는 이 역할을 담당할 ‘주구(走狗)’로 일진회(一進會)를 선택했다. 

우치다는 도쿄의 스기야마에게도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면서, 일진회의 친일적 성향,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현재의 상태,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 등을 자세히 전달했다. 그리고 도쿄 정부의 실권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츠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에게도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고, 일진회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당부했다.

 

 

 

12. 병탄의 주구 '일진회'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0.20 22:29:38

 

절반의 책임: 일진회의 두 인물

한국병탄은 일본의 숙원사업이었다. 일본이 이 숙원사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진회와 같이 병탄을 앞장서서 지지하는 한국인 동조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거나 또는 상당한 대가를 치렀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병탄의 절반의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일그러진 과거의 현재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일진회는 일본의 한국병탄을 ‘한국인의 운동’으로 위장하는 데 앞장선 “매국의 앞잡이” 집단이었다.

이 단체는 러일전쟁 발발 직 후인 1904년 8월에 결성됐다. 유학주(兪鶴柱), 홍긍섭(洪肯燮) 등 독립협회 관계자와 한때 만민공동회의 회장이었던 윤시병(尹始炳)등이 참여했으나 실질적인 실력자는 이 단체의 결성을 주도한 송병준(宋秉畯)과 이용구(李容九)였다.

기생의 아들 송병준, 임오군란 전부터 '친일파'

송병준(1858-1925)은 함경남도 장진출신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출생과 성장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구박과 천대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명치 않은 과정을 거쳐 민영환의 눈에 띠어 그의 식객으로 있다가 1871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훈련원 판관, 오위도총부 서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송병준은 접견사의 수행원으로 참여했고, 이 기회에 그는 처음으로 일본인과 접촉을 가지게 됐다. 특히 거물급 군납업자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밀착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의 백작 작위를 받은 매국노 송병준.

 

점포도 집도 습격받아 불타
송병준은 오쿠라의 지원을 받아 부산에 상관(商館)을 열고 운영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조된 반일분위기 속에서 부산 주민의 습격을 받아 그의 상관도 불타버렸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서울의 그의 집이 소실됐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피한 것을 보면, 당시에 이미 친일파로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1884년 갑신정변 후에는 망명중인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오히려 그의 감화를 받고 추종자가 됐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도움으로 출옥한 이래 흥해 군수, 양지 현감 등을 지냈다.

그러나 정부의 체포령이 다시 내려지자 일본으로 도망하여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고 10년 가까이 일본을 전전하면서 살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제12사단 병참감인 오타니 기쿠죠(大谷喜久藏) 소장의 통역관으로 일본군과 함께 만주까지 종군했다. 그 후 서울에 돌아와 정치 활동에 끼어들었다. 일진회 일지(日誌)에 의하면 송병준은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고, 이틀 후인 20일 이를 다시 일진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동학 참여했던 이용구, 일본서 '대동합방론'에 심취

일진회 회장으로 ‘병합청원’을 간청한 이용구(1868-1912)는 항일의병장에서 병탄 첨병의 주구로 전락한 인물이다.

그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생활이 어려워 충청도 직산, 경기도 안성 등을 전전했다. 이용구는 13살 때 부친을 잃고, 모친을 도와 농사에 종사했으나 겨우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해온 이용구는 23살 때 동학에 입교했다. 그는 손병희와 더불어 교주 최시형의 ‘고제(高弟)’로 주목을 받았다. 동학봉기 당시 전봉준을 도와 투쟁에 가담했다가, 1894년 정부군에 체포되었고 사형은 면했으나 견디기 어려운 형벌을 받았다. 최시형을 이은 3대 교주 손병희와 함께 일본으로 외유할 당시 이용구는 처음으로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을 접할 수 있었다.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는 자신의 아버지는 “이 책으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러일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이용구는 손병희와 별도로 홀로 귀국하여 진보회(進步會)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진보회가 비록 정치단체이기는 하지만 이용구가 동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쉽게 구축할 수 있었다.

송병준, 이용구 설득 전국조직을 통합

송병준의 유신회는 대중적 기반이나 지방조직에서 대단히 취약했다. 이러한 취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송병준은 동학의 조직배경을 가지고 있고 친일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한 진보회(進步會)와의 통합을 모색했다. 송병준은 진보회의 책임자인 이용구(李容九)를 설득했다. 동학 봉기 당시 처절한 고통을 직접 체험했고, 정부의 끈질긴 탄압을 받고 있던 이 용구는 송병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이용구는 1904년 말 진보회의 취지와 목적이 일진회와 동일하므로 일진회와 통합한다는 것을 각 지방 조직에 알리고 통합 성명을 발표했다. 이용구가 회장에 추대됐다. 일진회는 비로써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가진 대중조직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일진회 "외교권을 일본에 맡기는 것이 독립의 길"

일진회 회장 매국노 이용구

 

일진회는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도탄에 빠져 있는 민중을 구제하여 “한 걸음이라도 개명의 영역으로 전진[一進]하여 국가의 면목을 새롭게 유신한다”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친일 색채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단체를 조직하면서 일진회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헌병대장 다카야마 이츠아키(高山逸明)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이 집단의 진로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한일 두 나라의 역사적․문화적․지리적 관계를 “입술과 이[脣齒]”와 같이 밀접한 관계라고 강조하며 시작되는 이 공식문서는, 일본이 “도탄에 빠진 (한국) 인민의 근심과 고통을 구제해 주고, 한일협약을 통해서 끊임없이 개선과 실행의 충고를 베풀어주시니, 우리 인민도 비록 버러지에 가깝지만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여 일진회를 결성하고 귀하의 나라를 향하여 감사의 뜻을 표시합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일진회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실제로 일진회는 러일전쟁 당시 이용구와 송병준의 지휘 아래 한국과 만주에 있던 일본군에게 여러 가지로 협력했다.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강제조약이 민족의 절박한 문제로 대두하여 국론이 분분할 때,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정부에 위임하는 것이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지지하며, 한국정부가 조약 조인에 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파산상태의 일진회를 살려 활용 합시다"
우치다의 일진회 조종
통감의 특명에 따라 한국내의 친일, 배일 단체의 성격과 구성원, 그리고 현상을 면밀히 조사해 온 우치다는 일진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일진회의 친일적 성격, 이용구와 송병준의 성향과 과거의 편력, 일진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재정적 어려움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통감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조종과 활용을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같은 내용을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무라에게도 전했다. 

우치다의 조사에 의하면 일진회는 1906년 8월에 이르러 상당히 어려운 국면에 빠져있었다. 먼저 이용구와 함께 실질적으로 일진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송병준이 옥새(玉璽)를 위조하여 이권을 일본에 넘겨준 이일식(李逸植) 은닉죄로 경무청에 구속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용구가 동학의 교주인 손병희로부터 동학에서 출교(黜敎) 처분을 당하게 되면서 동학을 근거로 한 지방조직이 붕괴되어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가 공사관의 업무를 통감부에 보고하면서 “일진회는 무뢰한의 집회 단체이므로 장래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해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1906년 9월에 이르러 일진회는 해산 직전의 위기까지 몰리게 되었다.

"영원한 친일단체 만들 절호의 기회"

그러나 우치다는 한국 유일의 가장 큰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해산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송병준을 석방시켜 보다 적극적인 친일단체로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통감 이토에게 제출한
<송병준 수감의 전말과 일진회의 현황에 관한 조사 보고서>에서, 우치다는 일진회가 자칭 ‘일백만 회원’을 갖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정치 단체라는 점, 한국에서 활동하는 가장 적극적인 친일 단체라는 점, 재정적으로는 대단히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송병준의 구속은 “일진회의 머리에 떨어진 큰 철퇴와 같은 것”으로서 사실상 와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점을 보고했다. 또한 송병준과 이용구의 관계는, “송의 단점은 이의 장점이고, 이의 단점은 송의 장점”으로서 “두 사람이지만 한사람”인 ‘한 쌍’이기 때문에, 송병준이 없는 일진회는 일본에게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송병준의 석방과 일진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내우외환의 어려움” 속에 있는 일진회를 소생시키는 것이 이를 “영원한 친일단체”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충분히 활용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우치다, 이용구에 '일한연방' 타진하자 "나의 뜻"

이토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우치다는 일진회를 이끌고 있는 이용구의 의지와 결의를 직접 타진했다. 우치다는 이용구를 자신의 관사로 초대하여 송병준이 수감됨으로써 일진회가 받고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동정의 뜻을 표시한 후, 이용구의 심중을 다음과 같이 떠보았다.

“만일 일진회가 지향하는 노선이 본인의 소견과 일치한다면 송병준 군을 석방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 용구는 몹시 기뻤다. 우치다에게 반문했다.
“백 만인이 넘는 일진회의 회원은 송군과 나를 신뢰하고 있어 무엇이든지 명령하는 대로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송군과 나의 의견은 곧 일진회의 의견이고, 일진회의 행동은 곧 송군과 나의 행동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귀하가 추구하는 방향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치다가 자신의 복안을 밝혔다.
“일진회의 목적이 4대 강령에 있다고 하겠으나 천하의 형세는 변화무쌍하여 반드시 이러한 원칙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일한연방(日韓聯邦)을 만드는 날이 오면 귀하는 회원들과 함께 이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평소부터 품어 온 뜻도 역시 단방(丹邦-大東合邦論의 저자인 다루이 도키치의 호)의 대동합방(大東合邦)에 있습니다.” 
이는 일진회가 우치다의 뜻에 따르겠다는 뜻이다. 그 징표로 “일진회는 총무원회의 결의에 따라 귀하를 본회의 고문으로 추대한다”는 내용을 문서로 통지했다. 일진회는 우치다의 손아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케다 한시, 일진회를 만취시키다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 이용구(왼쪽부터).

 

송병준이 석방되면서 일진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우치다는 일진회를 조정하기 위하여 동학봉기 당시 텐유쿄(天佑俠) 회원으로 한국에서 함께 활동했고, 또한 명성황후 시해에도 깊숙이 가담했던 현성사(顯聖寺) 주지 다케다 한시를 이용구의 상대역으로 선택했다. 우치다가 다케다 한시를 염두에 둔 것은 두 사람 다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대화가 쉽게 될 수 있고, 또한 두 사람 모두 ‘두주불사’의 주량으로 쉽게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다케다는 우치다의 당부를 쾌히 승낙하고, 12월 말 다시 산을 내려와 한국으로 향했다.

일진회는 다케다 한시를 ‘사빈(師賓)’으로 맞이했다. 다케다의 표현대로 그는 “인생 최대의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일한합방운동”에 뛰어 들었다. “급속도로 가까워 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구니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쇠붙이도 끊을 정도의 굳은[斷金] 관계를 맺고, 일한합방을 이끌어가는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우치다의 보고서나 건의서와 같은 모든 문건은 문필가이기도 했던 다케다의 손을 거쳤다. 그리고 일진회가 한국 황제와 일본의 요로에 제출한 ‘일한합방상주문’도 그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송병준 석방..매달 2천엔 지원
재정적 지원과 일진회의 입각
송병준을 석방시킨 후 우치다는 일진회의 재건을 위해 재정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또한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해 줌으로써 일진회에 대한 우치다의 영향력은 더욱 굳어졌다.

이토에게 보고한 것과 같이 1905년 말부터 어려움이 겹치기 시작한 일진회의 재정적 상황은 1906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우치다는 통감 이토에게 일진회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당부했다. 그 결과 일진회는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매달 2,000엔(円)의 보조금을 반년동안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일본정부 수뇌 방문..친일 다짐

이와 같은 통감부의 보조금이 일진회의 재정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충분치는 않았다. 일진회의 보다 근본적인 재정적 안정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우치다는 1907년 2월 송병준을 대동하고 도쿄로 갔다. 스기야마의 주선으로 우치다와 송병준은 일본의 정계와 군부의 중심인물인 야마카타 아리토모, 카츠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타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우치다와 송병준은 그들에게 차례로 일진회의 성격, 목적, 경력, 일본의 한국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 당면하고 있는 재정난을 자세히 설명하고 협조를 간청했다. 테라우치는 “만일 내가 도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송병준에게 약속했고, 야마카타는 “백만의 회원을 움직일 때의 그 어려움이 어떻다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니, 인내와 노력으로써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일본 육군성, 일진회에 10만엔 전달

일본정계의 중심인물들을 차례로 방문한 후, 우치다는 창립 이래 일진회의 수입과 지출의 내역을 상세히 기록한 <일진회재정전말서(一進會財政顚末書)>를 작성하여 이토 통감과, 도쿄의 야마카타, 카츠라, 테라우치에게 보고하면서 보다 지속적인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도쿄에서의 역할을 당부했다. 그 결과 5월에 육군성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을 통하여 ‘기밀비’라는 명목으로 10만 엔의 보조금이 일진회에 일시에 전달됐다.

일진회를 보조하는 ‘기밀비’가 왜 통감부를 통하지 않고 군부를 거쳐 전달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치다의 일진회 활용론에 일본의 정권과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야마카타, 카츠라, 테라우치 등이 승인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들은 그 후 한국에서 우치다와 일진회의 활동을 직간접으로 후원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선악 구별없이 일본에 복종하는 일진회..만사 해결"

‘거금’을 확보한 이용구와 송병준의 태도는 보다 적극적인 친일 성향을 나타냈다. 이제 우치다는 일진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 지위에 이르렀다. 재정문제를 해결한 직후 우치다가 스기야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진회는 “일의 시비와 선악과 관계없이 일본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빠지게 됐다”고 설명하고, 앞으로 “일진회를 조종하여 만사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일진회가 완전히 자신의 수중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우치다, 송병준 입각시키는데 성공
통감부와 군부를 통하여 일진회의 재원을 확보한 뒤 우치다가 시도한 것은 일진회를 한국정부의 내각에 직접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이토는 박제순 내각으로 하여금 일진회와 연립 내각을 구성하게 한다는 우치다의 방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제순 내각이 총사직하고 이완용 내각이 등장할 때 이용구나 송병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내각에 입각시키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우치다의 제안은 수용했다. 5월 22일 새로 구성된 이완용 내각에 송병준이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했다. 이토가 일진회의 송병준을 내각에 입각시킨 것은 한편으로는 송병준으로 하여금 이완용을 견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을 위한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일진회의 실권을 막후에서 완전히 장악하고 그 단체를 통하여 내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끝낸 우치다는 ‘정한’ 프로젝트의 핵심인 ‘한국인에 의한 합방운동’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 첫 작업이 고종황제의 폐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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