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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의 한국에 가다 13,14,15,16-왜놈정부가 꾸민 '천벌 받을 짓'..행정-사법권 장악, 군대 해체까지.."주권 완전 상실"

구름위 2015. 10. 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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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병탄의 건널목 (1) 고종의 양위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0.31 06:56:07

 

일본 강경론자들, 이토의 점진정책 비판
을사강제조약이 병탄을 위한 구체적 행동의 첫 단계였다면, 고종의 양위와 이어서 강제로 조인된 정미7조약은 병탄의 기반을 완수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 ‘실리주의적 점진주의’를 바탕으로 통감부를 이끌었다.
원략(遠略)으로 법과 제도를 뜯어 고치며 한국의 주권 잠식의 틀을 만들어 나갔고, 집권세력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정국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지배정책의 급진적 변화를 기대하는 강경론자들은 통감지배 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호정치’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이 일본과 한국 통감부 안에서 일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의 강경론자인 야마가타 계의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용구-송병준 "황제 폐하고 연방부터.." 건의

보다 혁신적인 통감통치를 위해서 우치다는 통감에게 일진회가 제안하고 있는 “한황폐위의 계책”을 건의했다. 이용구와 송병준은 “일진회 내각을 구성하고 통감부의 뜻에 따라 개혁정책을 집행해 나가는 것이 상책이지만, 고종이 황제의 직위에 있는 한 결코 혁신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선 지금의 황제를 폐하고, 일한연방을 이루고, 그러고 나서 한국의 근본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책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이토는 우치다의 강경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1907년 5월 이완용 내각이 출범할 때 송병준을 농상무 대신으로 임명하여 일진회가 내각의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토는 송병준을 내각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이완용과 송병준 사이의 친일 충성 경쟁을 기대했고, 그의 기대는 적중했다.

우치다 "즉각 합방 못하면 통감 바꿔야"

우치다는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여러 차례 자신이 관찰해 온 한국의 사정, 통감의 점진주의 정책의 문제점,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일진회의 제안, 병탄의 필요성 등을 소상하게 전했다. 그리고 통감부의 보호정치가 전혀 진전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모든 불안의 근원”인 고종의 저항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스기야마에게 “청컨대 원로대신에게 이러한 사정을 전하여 통감각하로 하여금 이 중대한 일[병탄]을 단행하도록 권유해 주십시오. 만일 통감각하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원로 가운데 한분이 반드시 연방성립의 중임을 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치다는 통감의 점진주의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질의 필요성까지도 논하고 있는 것이다.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3인의 밀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때를 기다리는 이토 "고종은 면종복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안팎에서 통감정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음을 이토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고종 이 통감정치에 대한 저항의 진원지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한황은 면종복배의 태도를 조금도 고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고종의 폐위를 논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노회한 이토는 서두루지 않고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그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다. 1907년 6월에 발생한 이른바 ‘헤이그 밀사사건’이 그것이다. 1907년 6월부터 10월까지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됐다. 26개국의 대표가 참석하는 이 회의의 제창자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i II)였다.

고종 밀사 파견..열강은 '외교권 없는 나라' 외면

고종 황제는 을사강제조약의 부당성과 통감정치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전 의정부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과 전 평리원 검사(平理院 檢事) 이준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했다. 황제의 신임장을 지참한 두 사람은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를 거쳐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도착하여, 전주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을 통하여 만국평화회의의 제창자인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전 러시아공사관 참사관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6월 24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 사람의 밀사는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f) 백작을 위시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대표를 차례로 방문하여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의 협박 때문에 체결된 1905년의 을사강제조약은 마땅히 무효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의장과 주관국은 한국 정부는 이미 ‘자주적 외교권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대표의 참석과 발언이 거부당했다. 다만 네덜란드의 신문인 스테드(William Stead)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설명하면서 주권회복의 후원을 청하는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의 전문(全文)이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구체적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밀사 중 한 사람인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다.

밀사 음모 접한 이토 "호기회..호기회.."

이토와 통감부
맥켄지가 정확하게 관찰한 것과 같이 ‘밀사사건’은 “일본이 행동을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명분”을 제공했다. 이토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다. 그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덮치듯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밀사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이토는 7월 3일 하야시 다다오(林董)에게 보낸 전문에서 “지금이 일본정부가 한국에 대해 국면일변(局面一變)을 위한 조치를 취할 좋은 기회[好機會]라고 믿음. 밀사파견 음모가 사실로 드러난 이상, 조세권, 병권, 재판권을 거두어 들일 좋은 기회[好機會]라고 인정함”이라고 하면서 대안 검토를 당부했다.

짧은 전문에서 이토가 “호기회(好機會)”를 두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이 시기를 기다려 왔다.

4일 후인 7월 7일 이토는 다시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특별기밀’ 전문을 보냈다.

그 전문에서 이토는 자신이 고종을 만나 일본이 한국에 ‘선전(宣戰)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 고종은 밀사사건과 무관하다고 변명하고 있다는 것, 이 문제로 궁중이 ‘심각하게 번민’하고 있다는 것, 내각에서 양위문제가 논의되고 있다는 것 등의 소식을 전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허둥대는 한국조정 "이완용 총리대신이 황제양위 거론함"

“어제 총리대신이 본관을 찾아와 선후책을 논하면서 한국정부도 사태의 중대성을 잘 알고 있다함. 그가 은밀히 본관에게 고하는 것에 의하면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황제의 신상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허둥대면서, 양위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뜻을 밝혀 본관은 항상 신중히 생각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대답했음. 이 기회에 우리정부가 취할 수단방법(예컨대 한 걸음 더 나간 조약을 체결하여 우리에게 내정 상의 권리를 양여하게 하는 것)을 묘의(廟議)에서 논의하여 훈시해 줄 것을 희망함. 양위와 같은 문제는 본관이 깊이 주의하고 있고, (양위문제는) 한인의 경거망동에 지날 뿐 그 책임이 일본에 돌아오는 것과 같은 사태는 절대로 용납지 않을 것임(日本外交文書)”

즉 이토는 황제폐위계획은 한국의 자발적 의사에 의하여 결정된 형태로 기정사실화하여 일본과 무관하다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전문은 끝으로 “고민에 빠진 한국 황제는 일본에 밀정을 파견하여 각 방면에서 정보를 수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부했다.

"황제가 보호조약 무시하면 일본은 선전포고 할 것이오"

이토는 통감부의 막료들에게도 “강력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고종을 압박했다. 7월 3일 이토는 궁내부의 예식과장 고의경(高義敬)을 통감부로 불러 도쿄의 외무성으로부터 보고된 ‘밀사사건’의 전문을 황제에게 전달토록 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종을 알현하고 “밀사파견과 같이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일본에 대하여 버젓이 선전(宣戰)을 포고하는 것이 첩경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완용에게는 “황제가 그동안 여러 차례 보호조약을 무시하고 배반을 꾀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고종이 “음모를 계속한다면 일본은 한국에 직접 전쟁의 길을 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수상으로서 책임을 가지고 “황제에게 해결의 길을 찾을 것을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수습을 위한 해결책을 찾기에 부심했다.

 

고종 "대신들이 수습하라"  대신들 "모든 책임은 폐하에게"
한국정부
한국정부는 헤이그 사건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7월 6일 고종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를 열었다. 송병준을 위시한 친일파 대신들은 밀사사건의 전말을 추궁하는 한편 그 책임이 황제에게 있음을 은연중 강조했다. 그러나 고종은 이번 사건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헤이그에 있는 사람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대신들에게 사태 수습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사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문제는 대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황제 스스로가 앞장서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송병준 "도쿄 가서 천황에게 사죄하십시오" 고종 "경은 누구 신하냐?"

송병준이 나섰다. 그는 밀사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사죄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황제가 러일전쟁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의 신의를 배반했다고 강조하면서, “헤이그 밀사 사건은 그 책임이 폐하에게 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친히 도쿄에 가서 일본의 천황에게 사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세가와 주둔군 사령관을 대한문 앞에 맞아 면박(面縛)의 예를 하십시오. 이 두 가지를 차마 못 한다면 결연히 일본에 선전(宣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면 국가 존망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라고 협박했다. 고종은 송병준에게 “경은 누구의 신하이냐”라고 책망하고 분연히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경성(京城) 특파원들이 전하는 한국의 분위기는 문제해결의 길을 찾기에 연일 “어전회의와 내각회의”가 열렸고, “한국 황제는 초조”해 있었고, 한국 조정은 마치 “감옥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었다

"고종 폐위는 한국인의 요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일진회
일찍부터 고종의 폐위를 주장해온 우치다 료헤이와 일진회도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우치다는 통감에게 밀사파견에 대하여 고종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고, 고종의 폐위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그러나 그는 통감부의 조치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우치다는 이번 계기를 이용하여 ‘반일의 근원’인 고종의 폐위를 성사시킬 뿐만 아니라, 폐위는 반드시 ‘한국인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실천하려고 했다. 그는 고종의 퇴위 문제를 이용구와 송병준과 협의하면서, 송병준은 어전회의에서 고종의 퇴위를 주장하는 한편, 이용구로 하여금 일진회를 동원하여 고종의 퇴위를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두 사람 모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특히 이용구는 폐위와 같이 중대한 계획을 내각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일진회가 적극적으로 주도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일진회, 이완용에게 '고종퇴위' 촉구..전국 유세

“폐위를 성사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대신들의 처사만 전적으로 믿고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만일 내각이 실패할 때에는 일진회의 힘으로라도 반드시 목적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일진회는 내각과 별도로 만일을 대비해서 해결책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日韓合邦秘史)”

일진회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진회 일지(日誌)>에 의하면 일진회는 헤이그 사건으로 인하여 야기된 정치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조속한’ 양위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양위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총리 이완용에게 제출했다. 통감 이토에게는 한국인이 깨닫지 못하여 헤이그 문제와 같은 사건을 저질렀지만 “각하의 산해지덕(山海之德)과 금석지심(金石之心)으로 용서해 줄 것을 엎드려 빈다”는 사죄의 글을 담은 공식 서한을 전했다. 동시에 일진회는 유세반을 편성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남지역을 돌며 밀사사건의 정치성과 고종퇴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유세를 벌렸다.

 

일 언론, 병탄 촉구 "한국 왕을 일본 귀족으로 만들자"
일본의 여론과 정부의 대응
헤이그 사건이 알려지면서 일본 국내에서도 강한 반응을 일으켰다. 일본의 주요 일간지들은 한결같이 고종을 비난하는 한편, 이토의 소극적인 정책을 비판했다. 그들은 더 강력하고 적극적인 한국정책을 수행할 것을 촉구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간한 <지지(時事)신보>는 “한국의 왕은 마땅히 일본으로 와서 헤이그 사건에 대하여 친히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호치(報知)신문>의 사설은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전진기지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으므로 이번 기회에 획기적인 변화를 위한 강력한 대한정책의 수립이 필요하다”라고 병탄을 촉구했다. <대한매일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와세다 대학에서는 “한국의 황제를 일본의 화족”으로 삼자는 주장이 있었고, <니로쿠(二六)신문>은 “한국 황제를 일본으로 옮기고 내각은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으로 구성”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일본 정계 총궐기 "병합하라..안되면 양위시켜라"
정치권도 강경한 입장이었다. 7월 14일 정계의 원로격이라 할 수 있는 고노 히로나카(河野廣中),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우익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도야마 미츠루(頭山滿) 등 6인은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일한병합건의서”를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제출했다. 이 건의서는 “한국 황제의 주권을 일본에 ‘선양(禪讓)’하여 두 나라를 합병”한다는 제1안과, “현황제로 하여금 그 지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통치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제2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제1안이 “상책”이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제2안은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정우회(政友會)과 헌정당(憲政黨)의 대표들도 총리 사이온지를 예방하고 일본의 여론이 고종의 폐위를 기대하고 있으므로, 정부는 여론에 호응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또한 야마가타와 가츠라 계의 대동구락부(大同俱樂部)도 정부의 ‘단호한 처분’과 ‘용단’을 촉구했다.

천황 재가 "한국 전권 장악, 통감은 부왕(副王)으로 섭정하라"

총리 사이온지는 이토가 요구한 한국정책의 기본방향을 확정하기 위하여 7월 10일 원로와 관계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대한처리방침(對韓處理方針)”을 확정하고 12일 천황의 재가를 받아 “극비”로 분류하여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전달했다. 최종 기본방침의 핵심은 “제국 정부는 오늘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하고, 그 실행에 관해서는 “현지의 상황을 참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를 통감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내각에서 결정된 기본방침은 (1)장래의 화근을 단절하기 위하여 고종황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케 할 것, (2)황제 및 정부의 정무결재에는 통감의 부서(副署)를 필요로 할 것, (3)통감은 ‘부왕(副王)’ 또는 ‘섭정(攝政)’의 권한을 가질 것, (4) 주요부서에는 일본이 파견한 관료로 하여금 대신 또는 차관의 직무를 수행케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외무대신이 직접 한국으로 가서 통감에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7월 15일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오가 최종안을 들고 서울로 출발했다.

'해아밀사사건'으로 황위에서 물러나는 고종을 풍자한 일본측 만화. 고종황제는 보따리를 등게 짊어지고 한손에는 인삼, 예금통장, 열쇠, 담뱃대를 들고, 또 한손으로 엄비의 손을 잡고 궁중을 떠나고 있는 모습.<團團珍聞>(1907.7.27)

 

이완용-송병준 "일본이 격분했으니 양위하시오" 연일 고종 독촉

고종의 양위
헤이그 사건에 대한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강경노선과 보다 획기적 조치를 요구하는 일본국민의 여론에 직면한 한국정부는 날마다 내각회의를 열어 수습대책을 강구했다. 문제해결을 위하여 일본 외무대신이 직접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완용 7월 16일 다시 내각회의를 개최하고 해결의 방책을 논의 했다. 통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던 이완용과 송병준이 주도하는 내각회의의 결론은 황제의 양위였다. 두 사람은 회의 후 입궐하여 헤이그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 정부와 국민이 격분하고 있다는 것, 하야시 외상이 한국을 방문하여 강경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 일본의 극단적 조치를 예방하기 위하여 한국정부가 먼저 일본이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사전적 조치의 하나로서 왕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상신했다. 고종은 양위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다음 날 또 다시 고종에게 양위를 요청했다.

고종 "헤이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하는 것은 어떻겠소?"

대신들의 양위독촉에 시달린 고종은 이토를 불러 자신의 양위가 불가피한 것인지 그의 의사를 타진하려고 했다.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1907.7.21)은 “한국황제양위비록(韓國皇帝讓位秘錄)”이라는 제목으로 고종과 이토의 대화를 아래와 같이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고종: 헤이그에 가서 활동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나는 하나도 모르는 일이오.
이토: 세계 각 국의 모든 사람이 다 (밀사를) 폐하가 파견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데 유독 폐하만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고종: 헤이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하는 것은 어떻겠소?
이토: 폐하가 화란(和蘭:Netherlands)에 있는 조선인을 벌할 수 없는 것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을 벌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고종: 최근 짐으로 하여금 양위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통감의 의견을 어떠하오?
이토: 그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통감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위는 한 나라 종실의 중대한 문제로서 전적으로 조선황실의 사안입니다.
고종: 양위를 짐에게 권고하고 있는 자들은 통감의 뜻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데 어떻게 된 것이오?
그러자 통감은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자를 이곳에 불러 본인이 직접 심문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고종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드러났다.”

이토, 일본 언론 활용..양위 기정사실화

이 보도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통감부가 이 내용을 언론에 의도적으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고종과 이토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일본 신문에 보도됐다는 것은 통감부의 정보 제공과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사실보다 미화되었거나 또는 이토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작됐을 가능성이 많다. 이토는 이 보도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고종의 양위를 기정사실화하려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국내에서 자신의 점진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무마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토는 언론을 활용한 것이다.  

궁내에선 날마다 양위 주청..궁밖에선 일진회 '촛불시위'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황태자에게 양위시킬 것.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아닌 대한제국정부가 스스로 양위를 결정한 것으로 할 것”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서울에 도착한 하야시 곤스케 외무대신 18일 고종을 알현했다. 한국정부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갔다. 18일 밤 각료 일동은 거듭하여 고종에게 양위할 것을 주청했다. 고종이 계속 받아들이지 않자, 이완용과 송병준은 다시 앞장서서 황제가 헤이그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고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국가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고종의 양위를 거듭 강권했다.

궁중에서 대신들이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는 그 시간에 일진회는 양위를 요구하는 ‘촛불 시위’를 벌렸다. 일진회 일지에 의하면 부회장 홍긍섭의 지휘아래 “일반회원 300여명이 모여서 15명씩 짝을 지어 촛불을 켜들고 궁궐을 돌면서 양위를 재촉”했다. 그들은 고종의 양위 소식이 전해진 19일 새벽에야 해산했다. 

일본정부가 꾸민 '천벌 받을 짓'..파란만장 44년 마감

안팎에서 밀려드는 압력을 견디지 못한 고종황제는 결국 19일 새벽 3시에 “이제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라는 조칙을 내렸다. 고종이 ‘양위’가 아니라 ‘대리’를 택한 것은 뒷날 군권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맥켄지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고종의 퇴위는 “일본정부가 꾸민 천벌을 받을 짓(the Japanese Government assumed an attitude of silent wrath)"이었다. 고종은 그의 파란만장한 44년의 재위를 이렇게 마감했다.

황제 폐위한 대신들: 이완용, 임선준, 조중응, 고영희, 이병무, 이재곤, 송병준

1907년 7월 20일 <대한매일신문>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황실을 강핍(强逼)하며 대신을 종으로 부리고 백성을 짐승으로 다루는 행동이 이미 극에 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7월 23일의 논설 “황태자 대리하신 사실”에서는 “대한황제의 위(位)를 폐하고 세운다는 말이 일본사람 신문에 낭자하더니, 며칠이 못되어 한국의 내각대신이 일제히 궁에 들어가 황제의 뜻에 반하여 (폐위를) 강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대신들이 외국 사람이 시키는 것을 좇아 황제를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사람이 누구인가?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법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농상대신 송병준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논설 "황태자 대리하신 사실"을 게재한 대한매일신보(1907.7.23).


한국선 '대리식'..일본선 '양위식'
7월 20일 일본군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고종과 순종 두 사람 모두 참석치 않은 상태에서 황태자의 ‘대리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이것은 실질적으로 ‘양위식’이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정무를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일본 측에서 황제가 황태자에게 정권을 완전히 ‘양위’하는 것으로 발표했다. 천황은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전문에서, “짐은 짐이 통감의 보고에 의하여 황제의 양위를 이어 받은 것에 대하여 충심으로 경하”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이로써 ‘대리’는 실질적 ‘양위’로 굳혀졌다.
 

일본군 1개대대 왕궁 진입, 반대파 체포..고종-순종 거처 분리

통감부는 다음날인 21일 밤 일반 민중의 습격으로부터 궁중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군 보병 1개 대대를 왕궁에 진입시켜, 양위를 반대하고 있는 궁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와 시종원경 이도재(李道宰), 전 홍문관 학사 남연철(南延哲) 세 사람을 체포하여 궁중 내의 반대파를 침묵시켰다.

‘신황제’로서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인 순종의 즉위식은 약 한달 후인 8월 27일 거행되었다. 그리고 11월에는 ‘태황제’로부터의 영향에서 순종을 차단하기 위하여 순종과 황태자인 영친왕(이은:李垠)을 고종이 거처하고 있는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고종은 일본 세력 앞에 무기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 저항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이어받은 순종은 그렇지 못했다.

맥켄지의 표현을 빌리면 순종은 “유순하고 지력이 유약(feeble of intellect and docile)”했고, “수치스러운 정부의 이름만의 수반(figurehead of a shame government)”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의 거세는 일본의 한국장악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14. 병탄의 건널목 (2): 정미7조약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1.04 09:37:02

 

"한국의 배신행위 용서못해" 신속한 새 조약 체결 압박

고종의 양위식 다음 날인 21일부터 23일 사이에 통감부와 일본 외무성은 바삐 움직였다.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는 새로운 협약을 만들기 위한 많은 전문이 오갔다. 이토는 본국정부의 훈령을 근거로 하야시 외상과 협의하여 작성한 새로운 조약의 안을 24일 이완용 총리에게 전달했다.
‘기밀문서’로 보낸 조약안과 함께 이토는 다음과 같이 일본의 입장을 밝혔다.

“일본제국정부는 지난 1905년 11월 일한협약체결이래 더욱 더 양국의 우의를 존중하고 조약상의 의무를 성실히 준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누누이 배신행위를 감행했다. 이로 인하여 제국의 인심이 격앙되고, 또한 한국의 시정개선에 막대한 어려움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장래에 이러한 행위의 재연을 확실히 저지하고, 동시에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별지의 협약을 한국정부에 요구하는 바이다. 본건은 대단히 긴요한 사항이므로 신속한 결정이 필요하다. 본인은 이미 제국정부로부터 언제든지 약정에 조인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 받았으므로 귀하의 신속한 의견을 바라는 바이다.” (日本外交文書)

이토 통감 '대한제국의 면류관없는 제왕 되다'

같은 날 일본이 요구하는 내용대로 새로운 조약이 이루어 졌다. 정미7조약 또는 제3차협약으로 알려진 새로운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의 내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시정개선, 법령제정과 행정처분,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모두 통감의 승인이 필요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해야 하고, 통감의 동의 없이는 외국인을 채용할 수 없게 했다. 모든 권한은 실질적으로 통감에게 집중됐다. <대한매일신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일본 통감이 이 대한제국 안에서 면류관 없는 왕이 된 것”이다.(1907.7.27)

행정-사법권 장악, 군대 해체까지.."주권 완전 상실"

이것은 다만 공개된 내용일 뿐이다. 통감 이토와 수상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비공개 각서’는 자세한 실행내용이 들어 있다. 즉 (1)대심원, 공소원(控訴院), 지방재판소를 신설하고 주요 직책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2)감옥을 지방재판소 소재지에 신설하고 형무소 소장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3)한국군대를 정리하는 것, (4)고문 또는 참여관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부에 용빙(傭聘)된 모든 사람을 해용(解傭)하는 것, (5)한국정부의 각 차관과 내무부 경무국장에 일본인을, 또한 각 지방청 관리에 일본인을 임명하는 것 등 내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장치를 만들었다. 사법과 행정권을 직접 행사하는 ‘고등관의 부서’를 완전히 일본인이 독점하고, 군대까지 ‘해체’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사실상의 주권을 상실했다.

일본군에 겁먹은 덕수궁..이완용 "폐하, 망설이면 큰일 납니다"

7월 25일 서울발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은 새로운 조약이 “이처럼 간단하고도 신속히”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나는 “엄격하고 치밀한 우리 군대배치와 경찰의 행동에 궁중이 몹시 두려워서 떨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완용총리의 역할이었다. 즉 이완용은 24일 밤 이미 물러난 상황(고종)을 알현하고 “만일 폐하가 일본의 요구에 이론을 제기하고 망설일 경우 일본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 전폭적으로 용인하는 이외의 길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완용은 알현한지 40분 만에 ‘재가(裁可)’를 받아 냈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대한 정미7조약은 일본의 군사적 위협과 친일세력의 영합으로 이루어 졌음을 보요주고 있다.   
조약이 알려지자 통감부의 검열로 일부 삭제된 <황성신문>의 논설은 한국인에게 국혼(國魂)을 다짐할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왜 우리만 노예 되었나? 2천만이 '대한국혼' 없기 때문이다"
“못살겠네, 못살겠네, 진실로 살 수가 없구나. 어떻게 하면 득생(得生)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망망(茫茫)하기만 하다. 세월아 너 가지마라. 네가 가면 우리는 늙어 종 된 나이만[奴齡] 싸여간다. 아, 슬프다. 무정한 세월[光陰]은 빠르기 이를 데 없어 흐르는 물과 같고 달리는 말과 같아 쉬지 않고 재촉하는구나.
광무 9년 11월 18일[을사강제조약을 뜻함]이 벌써 삼년이 흘렀네. 기가 막히고 가슴이 미여지네. 우리 노예의 나이가 벌써 3년이란 말인가. 지금 20세기는 곧 평화의 세기라 남들은 희희낙락하면서 다 잘 사는데 다만 우리는 어찌하여 이렇게 참혹한 처지에 놓여있는가? 땅이 적어서 그런가. 아니다. 화려한 3천리 강토가 모두 백옥과 같다. 인구가 적어서 그런가. 아니다. 2천만이면 충분하고, 더하여 성품이 인자하고 관대하여 황인종가운데 상등(上等)이라 할 수 있다. 토지의 물산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금은동철과 오곡백과, 삼포(蔘圃)와 삼림과 어채(魚菜)가 가는 곳마다 흥성하고 심는 곳마다 번성한다. 이처럼 화려한 강토와 상등의 인종과 풍부한 물산을 가지고도 천층(千層) 지하에 떨어져 남의 노예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2천만 동포가 각각 대한국혼(大韓國魂)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혼이 없으면 죽는 것과 같이, 국민에게 혼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나라 혼[國魂]이 있는 나라에는 자유와 독립이 있고, 나라 혼이 없는 그 나라는 노예와 어육(魚肉)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대호국혼(大呼國魂)' 논설을 게재한 <皇城新聞>.(1907.7.31)

 

'신문지법' '보안법' 공포..외국 특파원들 몰려 들어 

이토는 여세를 몰아 27일에는 한국 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신문지법’을, 그리고 29일에는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공포했다. 한국인의 여론과 행동을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중요한 조치를 처리한 이토는 29일 저녁 언론인들을 일본인구락부(日本人俱樂部)로 초대했다. 당시 서울에는 헤이그 사태 이후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취재하기 위한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체류하고 있었다. 총독부의 고위관리들을 배석시킨 이 자리에서 이토는 그동안의 통감부 정책, 헤이그 사건 이후의 상황변화와 ‘신협약’, 그리고 앞으로의 통감통치의 방향에 관하여 설명했다.

"한국은 스스로 독립을 파괴했고, 일본은 한국 독립을 옹호"

그는 먼저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 나라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오히려 “항상 스스로 독립을 파괴”해 왔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옹호”해왔다는 것이다. 이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수천 년 사대주의 밑에서 벌레처럼 살아 온 한국인의 천성은 아직 구제되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이 홀로서기 위해서는 “일본의 보호와 지도와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토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이토 "일본은 한국을 합병할 필요 없습니다" 위장연극
“일본은 한국을 합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합병은 커다란 재앙(厄介)이 될 것입니다. 한국은 자치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와 감독이 없이는 건전한 자치를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번에 신협약을 보게 된 이유입니다..나는 서양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일본인에게도 공언(公言)합니다..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아량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도 역시 병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정도 행정도 한국 자신을 위해 필요합니다. 일본은 어디까지나 한국을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주의를 유지해 왔거니와 장래에도 유지할 생각입니다.”(伊藤博文秘錄)

그러면서 이토는 한국과 일본이 ‘제휴’하여 “욱일(旭日)의 깃발과 팔괘(八卦)의 깃발이 나란히 휘날리는 것으로 일본은 만족”한다고 강조하여 병탄의 뜻이 없음을 거듭 밝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틀 후인 31일 한국군대를 해산함으로써 그의 ‘공언(公言)’은 ‘사언(詐言)’이었음이 밝혀졌다.

일본 정부, 일진회에 "수고했소" 50만엔 지원금

정미7조약이 성립된 직후인 1907년 8월 이토와 가츠라는 일진회에게 50만 엔의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후원금은 “양위와 신협약 성립을 위한 일진회의 진력에 대한 보상의 뜻이 포함”된 것이다. 이토는 이를 단계적으로 나누어 전달하기로 하고, 일차로 부통감을 통해 이용구와 송병준에게 10만 엔을 교부했다. 이는 앞으로도 필요할 때마다 일진회를 활용하고 그 대가를 적절히 지불하겠다는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15. 의병과 자위단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1.13 16:52:54

 

 

청일전쟁 때부터 시작된 민중의 항일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의 근대적 민중저항은 ‘폐정개혁’과 함께 ‘반외세’를 주장한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을사강제조약(1905)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분노한 민중들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의병항쟁을 본격적이고도 전국적인 무력항쟁으로 발전시킨 것은 헤이그 밀사사건의 결과로 나타난 고종의 강제퇴위, 한국의 주권을 송두리째 앗아간 정미7조약(제3차한일협약), 그리고 이어진 한국군대의 해산이었다.

고종 퇴위-군대해산에 격분..이완용 집 불지르고 일본경찰과 총격전

의병과 무장항일운동
박은식은 의병을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는 민중의 의용군(義兵者民軍也 國家有急 直以義起 不待朝令之徵發 而從軍敵愾者也)”이라고 정의하고 있다(<韓國獨立運動之血史>). 즉 국가가 존망의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는 민중의 군대를 의미한다. 고종의 강제 양위(1907.7.20) 이후 한국 민중은 친일파로 구성된 정부를 믿기보다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나 일본에 맞서 독립을 지키려 했다.

고종의 퇴위와 새로운 조약은 민중의 분노를 자극했다. 이토와 함께 부임하여 11년 동안 통감부와 총독부에서 외사국장 등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병탄’과 식민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 고마츠 미도리(小松綠)가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종의 퇴위는 “한국의 형세를 악화일로의 길”로 몰고 갔다.

고종이 일본의 압력과 친일세력의 영합으로 강제 퇴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민의 반일감정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고종의 양위가 알려진 20일 격분한 민중은 이완용의 집에 불 지르고, 서대문 밖의 경찰분서와 파출소를 파괴하고, 군부대신 이병무의 집을 습격했다. 민중들은 또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하여 윤전기 등 기물을 파괴했다. 뿐만 아니라 전동(典洞)의 시위보병 제 1연대의 한국군 일부는 무기를 가지고 병영을 벗어나 경무청에 발포하면서 일본 경찰관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민중시위와 무력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토 "황제 이름으로 군대해산-무력진압"..이완용에 발표 시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통감 이토는 본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21일 사이온지 총리에게 보낸 ‘극비’의 전문은 “현재 경성(京城)의 정황이 착잡하여 그 파급이 장래 어떻게 발전할지 예측하기 곤란함. 한국군대의 정황 또한 불온하여 어떠한 사변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음. 가장 가까운 병영으로부터 혼성 1여단을 지급 파송”을 요청하면서, 지방에는 아직 서울의 소식이 전달되지 않아 비교적 조용하지만 “수일 후면 많은 소요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한다고 상황분석을 보고했다.

민중의 분노는 한국군대 해산과 함께 ‘의병’이라는 조직적이고도 전국적인 무력항쟁으로 발전했다.

이토가 29일 일본 기자들에게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고, 또한 한국도 ‘병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연설했던 것과 달리, 일본정부가 파견한 증원부대인 보병 제12여단이 서울에 도착한 7월 31일 한국군의 해산을 결정했다. 이토는 이완용, 이병무,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협의하여 정미7조약 체결 당시 비밀각서의 형식으로 합의한 군대해산을 단행하기로 확정하고,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칙을 발표케 했다. 이완용과 이병무는 황제의 이름으로 “한국 군대는 용병으로 조직되어 있으므로 경비와 능률에 지장이 있으니, 후일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기로 하고.....황실호위에 필요한 자만을 선발하고 그 외에 군대는 전부 해산”한다는 조칙을 발표했다. 동시에 이토는 군대해산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한국인의 무력저항을 진압하는 임무를 황제가 미리 통감에게 의뢰하는 조칙을 이완용으로 하여금 아울러 발표케 했다.

보병대장 朴星煥 자결..'온 나라에 의병이 일어나다'

8월 1일 한국군대의 해산이 단행되었다. 아침 7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군부대신 이병무와 함께 각 부대 대대장 이상을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으로 소집하여 이들에게 조칙을 전달하고, 해산에 적극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오전 10시에 거행될 해산식에는 총기를 휴대하지 말고 집합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인 박성환(朴星煥)이 강압적인 군대해산과 무장해제에 반대하여 자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강제로 해체 당하는 한국군인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해산식은 무력투쟁으로 바뀌었다. 한국군은 무기와 탄약고를 부수어 무장하고 궐기하여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전투에 돌입했다. 이로써 1910년까지 계속된 무력항쟁의 막이 올랐다. 해산된 군인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의병(義兵)’을 조직했고, 이들의 항일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온 나라에 의병이 일어났다."

1895년 이후 의병이 일어난 곳.


일본군 속속 증파..'헌병 통치' 본격화

의병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일본 정부는 종래의 1개 사단에 더하여 1개 여단을 파견하고, 이어서 10월에는 4개 중대의 기병파견대를 또 다시 증강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종래의 14헌병대를 강화하여 주둔군 사령부 예하에 소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가 지휘하는 조선주둔군헌병대를 설치했다. 아카시가 지휘하는 헌병대는, “치안유지에 관한 경찰을 장악”한다고 법령으로 규정하여 치안경찰과 군사경찰의 임무를 겸하게 했다. 1907년 말 현재 2,400여명의 헌병을 전국 460여개의 분서에 배치했다. 소위 헌병통치의 시발점이다. 그리고 1908년 5월에는 다시 육군대신의 명령으로 23연대와 27연대를 증파했다. 의병의 항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총을 든 한국 의병의 모습.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일본군이 효수한 의병들. 

 

 

우치다 료헤이 "일진회가 폭동 진압하게 합시다"
일진회와 자위단
의병항쟁이 강화되면 될수록 일진회의 활동 폭도 넓어졌다. 일진회를 조종하여 고종의 퇴위를 끌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우치다 료헤이는 그 진압을 위해서도 일진회 활용을 구상했다.

한국의 무력저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우치다는 일진회 회원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동태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여 통감부의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와 도쿄의 야마가타와 테라우치에게 보고했다. 보고서에 의하면 “폭도들의 봉기는 해산된 군인들이 기초가 되어 화적과 무뢰한의 무리가 부화뇌동하고 있고, 또 불량한 빈민과 유생이 가담하고 있고, 면장이나 촌장과 같은 마을의 지도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력이 “대단히 위협적이어서 진압을 위해서는 경찰력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군대와 헌병의 동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특히 우치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적절한 헌병의 증파”가 시급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폭도로 돌변하는 농민들"

 

우치다는 이와는 별도로 이토 통감에게 의병활동의 심각성을 보고하면서, 지방의 농민들이 “낮에는 평화스럽게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밤에는 의병과 내통하여 폭도로 돌변하는 대단히 위태롭고 심각한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통감지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강경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치다는 다만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의병의 항쟁에 맞불을 놓기 위한 행동을 구상했다. 그는 다케다 한시, 이용구, 송병준과 협의하여 일진회를 중심으로 의병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고, 이 자위단은 일본 군대와 헌병대의 보호와 감독아래서 의병에 맞서 대항한다는 안을 만들었다. 우치다는 자위단 구성안을 송병준을 통하여 이완용으로 하여금 내각에서 논의하게 하는 한편, 통감 이토에게는, “한국 황제의 퇴위와 일한협약은 한국인과 한국 정부에 의하여 취해진 조치”이므로, 만일 이것이 폭동의 원인이 되었다면 “폭동은 한국인에 의해서 진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이토가 7월 7일 사이온지에게 전문을 보내면서 강조했던  “한국인에 의한 폐위의 모양을 갖춘다”는 대목과 일치하는 것이다. 우치다는 자위단 조직을 위한 통감부와 군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통감부, 군부, 헌병대는 우치다의 제안을 검토하고 이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통감부와 주둔군사령부는 필요한 비용 1만2천 엔과 3천정의 무기를 공급하기로 하고, 일진회로 하여금 자위단을 조직케 했다. 

"의병대항군 '자위단' 조직하라" 일진회에 자금-무기 공급

자위단 구성을 위하여 지방으로 출발하기 전 촬영한 간부진. 앞줄 오른쪽부터, 大賀八三郎, 岡本慶次郞, 須佐嘉橘, 內田良平, 이용구, 이용구의 모, 이용구의 딸, 武田範之, 高村謹一. 


이완용이 중심이 된 내각에서는 ‘자위단조직후원회’ 결성을 독려하는 동안, 일진회는 전국적으로 자위단 조직에 필요한 조치에 박차를 가했다. 일진회의 간부와 우치다를 중심으로 한 일본 낭인들은 11개 팀을 구성하고 각지에서 자위단 망을 구축하는 것을 독려하기 위하여 11월 20일부터 지방으로 출발했다. ‘별동대’에 포함된 이용구, 우치다 료헤이, 다케다 한시도 일진회원을 이끌고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군마다 자위단의 세포조직을 결성했다.

이토, 이용구에 七言詩 선물 "장도를 격려하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자위단 조직을 지휘하기 위하여 지방으로 떠나는 우치다와 이용구를 격려하기 위하여 따로 자리를 만들어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우치다에게는 자신이 10년 동안 아끼며 간직하고 있던 권총을 하사하고, 이용구에게는 7언절귀(七言絶句)의 시를 지어 선물했다.

 

자위단을 이끌고 지방으로 떠나는 우치다에게 이토 통감이 선물한 권총.

이토 히로부미가 이용구에게 써 준 칠언시.(이용구의 아들 大東國男 소장). 

 

 

 

이용구 아들 "아버지는 숨질때까지 이 시를 좋아했다"
韓山草木滿紅秋(한국의 산이 붉게 물든 초목으로 뒤덮인 가을에)
把酒欽君試壯遊(술을 들어 장도에 오르는 군에게 경의를 표하네)
交誼平生照肝膽(평생 마음을 터놓고 서로 교분을 나누었지만)
別時何說別離愁(막상 헤어질 때 이별의 아쉬움을 어찌 말로 다하랴)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구니오에 의하면 이용구는 “1912년 스마(須磨)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병실에 걸려있는 히로부미의 이 7언절귀를 보면서 감개에 젖었고”,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설명해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16. 이토의 새 통치 구상: 한국의 일본화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1.17 13:59:16

 

'기다릴 줄 아는 맹수'..때가 오면 전광석화처럼 덮친다

 

이토 히로부미는 ‘온건’주의자이면서 ‘점진’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이토는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늘 조심스럽게 정책을 다루어 나갔고 점진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만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정치가였다. 동시에 그는 테러는 물론 살인도 서슴지 않는 과격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면 누구보다도 극단적이고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헤이그 사건’ 이후 이토가 취한 조치가 그의 이러한 일처리 스타일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토가 헤이그 사건의 내용을 처음으로 보고받은 것이 1907년 7월 3일이다. 그는 이 사건을 ‘보호정치’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키기에 ‘적절한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대한제국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고종을 협박하여 황제의 직을 양위케 하고(19일), 한국의 내치권을 장악하는 정미7조약을 조인하고(23일), 한국군대를 해산하고(31일), 그리고 한국의 내각과 통감부를 확대 개편하는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이는 이토가 결코 온건주의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부서 차관을 일본인으로..'차관통치' 개시

통감부 권력 강화
전광석화와 같이 ‘헤이그 문제’를 처리한 이토는 한국지배를 위한 새로운 구상과 조치를 취했다.
먼저 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하여 통감부 권력을 확대하고 한국내각과의 관계를 신속히 재정비했다. 통감부에 부통감제를 신설하는 한편, 정미7조약을 근거로 한국 내각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했다. 8일 이토는 한국정부의 요직이라 할 수 있는 내무(木內重四郞), 농상공부(岡喜七郞), 학부(俵孫一), 탁지부(荒井賢太郞), 궁내부(小宮三保松), 법부(倉富勇三) 차관과, 경무총장(松井茂), 경시총감(丸山重俊), 총세무사서리(永濱盛三)에 일본인을 임명했다. 이들 모두는 통감부의 참여관으로 겸임하면서 한국정부와 통감부의 일을 겸하했다. 소위 ‘차관통치’의 시작이다. 이로써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가 실질적으로 일본인에 의하여 운영되게 되었다. 이름은 ‘한국대신회의’였지만 실은 일본인이 움직이는 회의였다.

"황태자를 일본 유학보내자"..한국 황실부터 일본화

 

이토가 보다 더 정성을 기울인 구상은 한국의 황태자를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식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통감부의 제도개편과 확대가 내정장악을 위한 가시적이고도 즉각적인 조치였다면, 황태자의 일본식 교육은 한국 황실의 일본화를 위한 장기적 포석이라 할 수 있다. 황태자의 일본인화는 한국인의 일본인화를 상징하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이토는 한국의 황태자가 일본에 와서 ‘신교육’을 받는 것은 한국이 자립의 바탕을 마련하고 한일 두 나라의 영원한 화친의 자질을 배양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명분일 뿐이다. 황태자의 일본행은 그동안 반일운동의 근원이었던 궁중을 묶어 두기 위한 ‘인질’이고, 멀리는 황태자를 ‘일본인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정미7조약에 근거하여 한국정부와 통감부의 체제정비를 끝낸 이토는 8월 초 공작(公爵)의 작위를 받기위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출발 전 이토는 순종을 예방하고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주청했다. 순종에게는 이미 반대할 힘이 없었다. 또한 일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각료로 구성된 정부 또한 거부할 의사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 황태자 방한 먼저.."폭탄 날아오면 내몸으로 막겠다" 설득

그러나 노회한 이토는 한국 황태자의 일본 유학을 보다 명분 있게 실행하고 반대 여론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먼저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추진했다. 이토는 천황에게 일본 황태자(뒷날 다이쇼(大正) 천황)의 한국 방문을 상신했다. 이토의 전기에 의하면 “당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배일폭동”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천황은 “다소 난색”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토가 “신명을 걸고 호위하겠다는 적성(赤誠)을 피력하여 주청”하자, 천황은 황족을 대표하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신노(有栖川宮威仁親王)의 동행을 조건으로 내락했다. 이토는 즉시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찾아가 양국을 위해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해야 한다는 뜻을 주장하면서 동행을 요청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로부터 “천황의 명령이라면 동행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이토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그 자리에서 감사의 뜻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언제 폭탄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그 때는 히로부미가 전하에 앞서 먼저 희생하겠지만, 전하도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토가 아니면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서 천황에게 황태자의 방한을 주청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리스가와노미야에게도 감히 이런 소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란한 환영행사..3천개 등불행렬에 기생악단까지 "만세"

 

이토가 부통감으로 임명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10월 3일이다.
일본 황태자 일행은 10월 10일 도쿄를 출발하여 16일 인천에 도착하여 황제 순종과 황태자인 영친왕의 영접을 받았다.

그날의 행사를 <황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일본황태자 전하 도한(渡韓)시에 봉영 예절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총리대신 이완용, 법부대신 조중응, 농상대신 송병준 3인을 고문으로 하고...대한문전, 종로, 수표 등 세 곳에 푸른 문[綠門]을 세우고 (황태자가) 입성(入城)시 종로에서 예포를 발(發)하고...시민회장이 봉영위원을 이끌고 큰 기를 앞세우고 남문 밖 정차장으로 행진하고 일반회원이 그 뒤를 따르고...제등(提燈)은 큰 등 한 쌍과 둥근 등(球燈)을 3천개 준비하고, 악대를 구성하고, 실업단, 노동단, 진신단(縉神團), 기악단(妓樂團)이 각각 1백 명씩 조를 편성하여 제등을 들고 황태자의 숙소까지 행진하여 그 앞에서 만세를 외치면서 축하한다더라.”(1907. 10.11)  

 

일본 황태자의 한국방문 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伊藤博文, 有栖川宮, 한국황태자, 일본황태자. 뒷줄 오른쪽부터 조중응, 송병준, 桂太郞, 東鄕平八郞, 이완용, 이병무.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위시하여 수상을 역임한 가츠라 다로(桂太郞) 육군대장,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해군대장 등이 황태자를 수행했다. 황태자는 정부와 통감부가 주관하는 연회에 참석하고, 한국의 황제와 황후, 황태자, 퇴위한 고종, 그리고 정부 요인들을 만나 훈장을 주고받는 등 의례적인 4박 5일의 국빈방문을 끝내고 20일 귀국했다. 

순종, 이토를 '太子太師' 임명..한국 왕족 대우
다음으로는 대한제국의 황태자가 일본을 방문할 차례다. 그러나 한국 황태자의 일본 방문은 단순한 답방이 아니라 도쿄 유학을 전제로 한 것이다. 명목은 유학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인질이다. 순종은 11월 4일 왕세자가 도쿄로 유학한다는 것을 정식으로 결정하고 발표했다. 그리고 19일 이토 히로부미에게 “왕세자를 성심성의껏 지도하고 인도[保導啓沃]”하는 태자태사(太子太師)의 직책을 맡겼다. 이토는 한국 궁정에서도 왕족의 대우를 받게 됐다.

한국의 황태자 영친왕은 반일·배일운동이 나날이 격화되고 있는 1907년 12월5일 이토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대한매일신보>가 전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는 영친왕의 일본행이 어떠한 상황에서 진행됐는지 상상할 수 있다.
“황태자전하께서 일본으로 행계(行啓)하시기 전에 태황대폐하(고종을 뜻함)께서 궁내대신 리윤용씨에게 하교하기를 이등(이토) 통감과 교섭하여 동궁이 떠나기 전에 부자간의 정리를 위로하기 위하여 같이 거처할 수 있게 하라고 했으나, 리윤용씨가 아뢰기를 교섭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태황대폐하께서 대단히 섭섭하게 여기셨다더라.”(1907.12.6)

10살에 떠나 일본 육사까지..정략결혼으로 '일본 왕족' 된 영친왕

 

1897년에 태어난 비운의 영친왕(英親王, 은垠-순종의 배다른 동생)은 1907년 고종의 강제양위 후 순종이 그 대를 이어가자 황태자에 올랐다. 그의 나이 10살에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의 인질로 서글픈 한 세상을 살았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철저히 일본인으로 교육받았다. 학습원과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처 1915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일본의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공주(한국 이름 이방자)와 정략결혼이 이루어 졌고, 부부 사이에 아들 구(玖, 1931년생)가 태어났다. 1935년 일본 육군 보병 대좌가 되어 우츠노미야 보병 제59연대 연대장을 맡았으며, 육군 사관학교 교관 및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수부장을 거쳐, 1938년 육군 소장, 1940년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7월 일본 제1항공군사령부에 발령을 받았으며, 종전까지 제1항공군 사령관 및 군사참의관을 맡았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 살다가 1963년, 혼수상태인 채로 56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70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일본 옷을 입은 영친왕 李垠과 이토 히로부미. 


모든 법과 제도를 일본식으로..'자치 진흥정책'에 총력
‘자치’진흥정책: 동화정책의 틀

군복 또는 교복(?)을 입은 어린 영친왕과 이토. 영친왕을 인질로 데려간 일본은 그를 학습원(황족 귀족학교) 육군중앙학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일본 황족으로 키웠다.


정미7조약 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정력적으로 추진한 통감지배정책은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배양한다는 소위 ‘자치’진흥정책이다. 그가 추진한 자치진흥정책은 한국이 근대 국가형태를 갖추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태’만 근대였을 뿐 ‘실상’은 보다 철저한 한국의 일본 예속화였고 병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자치’진흥이라는 이름 아래 추진된 모든 개선정책은 법과 제도, 그 법과 제도의 틀에서 진행되는 사고와 행위를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일본식’으로 바꾸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동화를 위한 식민정책의 기반을 보다 확고하게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황태자가 한국방문을 끝내고 돌아간 직후인 1907년 10월 26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제22차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소집했다.

그동안 헤이그사건 이후 중단됐던 대신회의가 5개월 만에 열리게 된 것이다. 일본인 차관들을 임명한 후 최초의 회의이기도 한 이 모임에는 한국대신 전원, 새로 임명된 부통감, 일본인 차관, 그리고 통감부 고위관리 전원이 참석했다. 1909년 6월 통감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 넘게 이토가 열의를 보인 ‘자치진흥’정책은 크게 4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일본의 ‘감리와 지도와 보호’에 근거한 사법제도정비, 금융기관 설치, 교육진흥, 식산흥업이 그것이다.

"한국의 법은 朝令暮改 昨非今是 錯雜紛更이라..."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로 사법제도의 정비를 강조해 왔다. 이토가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법치국가라는 근대 국가로서의 위상 확립과 법에 의한 국민의 재산과 생명보호 보장, 그리고 치외법권의 종식이었다. 정미7조약의 비밀 각서에서도, “국가통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률의 제정과 재판기관의 구성에 있고, 이것이 결여됐을 때는 국민의 신명재산(身命財産)의 보호를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한국의 법률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朝令暮改], 어제와 오늘이 달랐고[昨非今是]”, 재판기관의 구성은 “뒤섞이고 흩어져 있어[錯雜紛更]” “그 근원을 알 수 없는”것이었다. 또한 이토는 한국을 구속하고 있는 불평등조약의 치외법권을 종결하기 위해서도 사법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토는 대신회의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근본법 5법 편찬.."법과 조직 갖춰야 한국은 비로소 국가"

 

본인이 (한국의) 법제도개선이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정개선을 위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치외법권의 철거를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상태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국가의 근본법인 5법, 즉 민법, 형법, 상법, 소송법, 및 재판소 구성법을 특종의 법률로 하여 일본법을 모범으로 삼아 잘 편찬 하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다른 법률도 점차 완비하고 재판소 조직도 완성한다면, 본인의 생각으로는, 일본이 먼저 (한국에 대한) 치외법권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도 일본의 예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일반 한국인들은 아직 왜 법률이 필요하고 재판소를 왜 설치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지만 이러한 (법과) 조직을 갖출 때 한국은 비로소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토는 내각 안에 법조사국을 설치하고 도쿄제국대학 우메 겐지로(梅謙次郞) 법학박사를 법률고문으로 초빙하여 법전편찬과 법관양성, 재판소와 감옥 신설을 서둘렀다. 그리고 1907년 11월 재판소구성법, 재판소구성법시행령, 재판소설치법을 제정 공포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재판소는 “일본의 제도를 모방하여 구(區)재판소, 지방재판소, 공소원 및 대심원의 4종류로 정하고, 대심원(1), 공소원(3), 지방재판소(8), 구재판소(130)를 설치”했다. 그리고 1908년 1월부터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에 8개 감옥(평양, 대구, 함흥, 공주, 광주, 해주, 진주)을 설치하여 일본인을 소장으로 임명하여 운영을 개시했다.

법전-재판소-감옥까지 일본 모범따라..법의 식민지화

이토의 사법제도 개선 주장은 옳다. 한국의 경우 사법제도의 개선이 필요했고, 또한 이토의 정책은 이에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근대국가로 인정받고 치외법권을 해소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과 법제도의 확립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될 점은 일본법을 ‘모범’으로 한 법전편찬, 일본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재판소 설치, 그리고 일본인에 의한 법운영이라는 이토의 의도다. 일본법을 그대로 ‘모방’한 민법, 형법, 상법, 소송법, 및 재판소 구성법이라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법사상, 법제도, 법운영 등 ‘법’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사고와 운영을 일본화하겠다는 의미이다. 즉 법의 식민지화이다. 해방으로부터 65년이 되는 오늘도 우리나라의 법에는 아직도 일본의 그림자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화폐제도 실시..각종 세금 부과..한국은행-동양척식회사 설립

‘자치’진흥을 위해 이토가 주력한 두 번째 영역은 금융제도를 근대적 기구로 정비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은행을 위시한 금융기관 설치를 계획했다. 통감으로 부임한 이래 금융·재정문제는 대체로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재정고문에게 일임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1907년부터는 재정정책에 직접 관여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정미7조약이후 최초의 대신회의에서 이토는 “재정상의 문제는 그동안 통감이 직접관계하지 않고 전적으로 탁지부 대신과 재정고문이 협의하여 실시”했지만, “앞으로는 재정상의 일에 관하여 직접 알아보고 관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실제로 그는 그 후 화폐제도를 실시하고(1908), 세수증가를 위하여 황실재정 정리, 관세, 지세, 주세, 연초세, 가옥세 등을 부과하는 등 세제를 정비했다. 이와 병행해서 그는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1909), 지방금융조합(1907), 노업은행, 동양척식회사 등을 설립했다. 화폐주권의 상실로 경제권은 일본에 종속됐고, 금융기관과 그 운영 방법은 일본을 본받게 됐다.

"학교 만들어 한국인 문명화"..교사와 교과서 모두 일본 복사

이토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은 1895년 갑오개혁당시 교육입국을 강조했으나, 유학(儒學)에 바탕을 둔 한국의 교육은 주로 향교를 중심으로 서당에서 이루어졌다. 근대적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고 문맹률도 높았다.
이토에 의하면 한국이 “쇠운(衰運)의 길로 접어” 들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근대적 교육을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의 한국인에게는 기대할 수 없으나, 미래의 한국인을 계발(啓發)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를 만들고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교육을 받은 것과 교육을 받지 못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큰 차이가 있다. 점진적으로 교육을 보급하고 오랫동안 실시하면 결국 한국인이 문명인이 될 것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시급한 교육은 “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문맹자의) 인구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취학아동의 연령을 강제하는 국가의 의무교육을 강조했다. 이토는 한국 교육의 제도와 내용을 정비하기 위하여 도쿄사범학교 교수 미츠치 쥬조(三土忠造)를 학부참여관으로 초빙했다. 그는 일본을 준거로 삼아 교과서를 편찬하고,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제도를 정착시키고, 사범학교, 농림학교, 상업학교 등 각종학교를 만들어나갔다. 물론 근대교육의 교사는 일본인이고, 교육의 내용이나 교육 기법의 ‘모범’은 일본이었다.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을 일본화..동화정책의 창시자

 

한국의 ‘자치’진흥을 위하여 이토가 중요시한 또 하나의 영역은 식산흥업이었다.
메이지가 부국강병을 위하여 식산흥업을 중요시했던 것처럼, 한국의 자치를 위해서 산업진흥과 자원개발을 위한 시책을 여러 방면에서 진행했다. 농림업의 진흥과 발전을 위하여 근업모범농장(1907), 광업법의 개정(1907), 동양척식회사(1908) 등을 통하여 식산흥업을 이끌었으나, 결국 이는 일본의 경제침략활동의 길을 열었다.

 

이토의 ‘자치’진흥 정책은 그의 열의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자치진흥정책이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실행의 주체와 실제의 수익자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사법제도의 개선으로 인한 절대 다수의 법관과 법관계 업무는 일본인이 독점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송사로 인한 재판 결과 는 항상 일본인에게 유리했다. 금융기관이 설립되면서 중요 직책은 모두 일본인이 독점했다. 식산흥업의 대명사처럼 홍보된 동양척식회사는 실질적으로 착취기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학교교육은 일본인이 지배했고, 교과내용 또한 일본정신을 배양하기 위한 ‘수신’과 ‘일본어’를 중요시했다. 일본을 표준으로 한 ‘자치’진흥정책은 그 제도와 내용과 운영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을 일본화시켰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토는 동화정책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의병들이 신출귀몰..日露전쟁보다 한층 어렵다"
이토의 통감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은 더욱 강화됐다. 일시적 현상으로 평가했던 ‘의병’활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격심해졌고 전국으로 확대됐다. 의병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하세가와 총사령관이 데라우치 마사다케 육군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의병은 “토벌부대가 우세할 때는 심산유곡에 잠입하여 머리카락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척후나 정찰과 같이 소부대라는 것을 알면 양민이 폭도로 변하여 농부도 쟁기를 버리고 갑자기 우리에게 사격을 가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면서 의병이 “숨고 나타나는 것이 대단히 자유로워 작전 수행의 어려움이 일로전쟁보다 한 층 더 심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토는 한국의 황실과 정부는 지배할 수 있었으나 민중의 마음은 지배할 수 없었다.

일본 각계서 '反이토 세력' 등장..조기 병탄론자들 집결

일본에서도시간이 가면서 이토의 통감부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한 실력자들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투자한 것에 비하여 수확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토의 점진주의와 자치진흥정책이 한국병탄에 기여하지 못했고, 오히려 강화되는 의병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더 많은 일본군의 파병을 요구할 정도로 잘못됐다고 평가했다.

헤이그 사건 이후 일본의 정치권에서도 병탄을 포함한 보다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고, 여론도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 계에 흩어져 있는 ‘반(反)이토’ 여론을 한 데 모아 병탄의 추진력을 이끌어 간 중심 세력이 우치다를 중심으로 한 조기병탄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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