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100년전의 한국에 가다 1,2,3..정한론-‘병탄’ 프로젝트의 출발점

구름위 2015. 10. 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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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자는 나라'의 운명

한상일 | 최종편집 2009.08.27 10:17:22

 

연재를 시작하면서
8월은 우리 민족사에 뜻 깊은 달이다. 해방과 망국(亡國)이 8월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방의 날을 늘 기리고 있다. 그러나 망국의 날은 기억조차 잘 못하고 있다. 지난날의 아픔을 다시 들추어내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잊어버린 것일까? 

서양제국주의의 물결이 동아시아로 밀려오던 19세기 중엽,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를 재빨리 간파했다. 그리고 이 제국주의의 파도를 타기 위하여 위로부터 체제개혁을 단행하고, 부강개명(富强開明)이라는 국가목표를 향하여 국론을 한 방향으로 모아나갔다. 체제가 안정되면서 메이지(明治) 일본은 서양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이웃을 향한 팽창을 시작했다. 그 첫 대상이 조선이었다.

당시 조선은 어땠나? 조선을 처음으로 서양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소개한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조선을 ‘잠자고 있는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조선은 “다른 세계 역시 자신들과 같은 환경에서 잠자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안심하고 깊이 잠들어버렸다..그곳에서는 변화란 의미 없는 것이며 시간은 정지”해 있었다.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들기 위하여 변화를 추구한 일본, ‘은자의 나라’이기를 고집하며 잠들어있는 조선. 두 나라의 운명이 갈라지는 시발점이다.

지금부터 99년 전인 1910년 8월부터 한민족은 나라를 잃고 일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종살이를 36년 동안 해야만 했다.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역사이지만 왜 우리는 나라 잃은 망국의 국민으로 전락하게 됐나를 되새겨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일그러진 자화상일지라도 정면으로 대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망국의 역사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서는 해방과 독립의 참 뜻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재되는 이 글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한국병탄을 위한 일본의 치밀한 계획과 간교한 책략을 추적하면서,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망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는 어느 한쪽을 비판하고, 어리석음을 탄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다는 지난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성찰함으로서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그 위에서 새로운 선린의 한일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순종실록>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맺은 '병합조약' 전문과 순종황제의 조칙(담화)내용을 기록한 <순종실록>. 위 페이지 오른쪽은 순종의 '담화'내용이고 아래쪽 조약전문 뒤에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이름과 일본통감 데라우찌 마사다케 이름이 적혀있다. 

 

‘합방’인가 ‘병합’인가 ‘병탄’인가?

1년 후인 2010년 8월이면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찬탈하고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복속시킨 지 꼭 100년이 된다. 한일 두 나라의 학계나 문화·언론계에서는 ‘이 사건’을 되돌아보고 재조명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학술 심포지엄이나 특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00년 전의 ‘이 사건’을 우리가 매일 접하는 언론매체는 물론, 학술논문, 역사책, 역사교과서 등에서 여전히 한일 ‘합방’ 또는 ‘병합(합병)’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나 역사가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있는 식민지 사관의 잔재(殘在)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의 한국주재 통감부는 '한국병합 전말서'를 만들었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 의하면, ‘합방(合邦)’은 “둘 이상의 나라를 병합하여 한 나라를 만드는 일”이고, 병합(倂合)은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와 결합하여 한 개의 나라를 구성하는 일(합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둘 이상을 하나로 만드는 이 ‘일’은 강제나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와 합의를 바탕으로 한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복속시킨 것이 ‘합의에 근거한 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강제와 폭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일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합의를 바탕으로 한 계약의 역사로 만들고 싶었다. ‘합방’이나 ‘병합’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합방’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주권찬탈에 앞장섰던 민간 활동가나 또는 그들이 중심이었던 단체들이 주도해서 보편화 시켰다. ‘합방’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것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하나로 합친 것은 일본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한국이나 일본에 유익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양국 ‘지사’들의 의기투합의 결과라는 것이다. 강압적이거나 일방적이 아니라 자주적이고 평등한 바탕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순종황제가 마지막 어전회의서 '한일병합'을 선언한 날, 일본천황이 '병합을 승낙'한다고 발표한 조서내용

 

‘합방’운동에 교본으로 사용됐고, 또한 “일한양국의 민간유지에게 일한합동의 근본이념을 준 역사적 명저”라는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형제관계”에 있기 때문에 “가족의 정[一家一族의 情]을 발휘”하여 “하나의 나라[一邦]을 이룬 것”이 곧 한국과 일본의 ‘합방’이다. 여기에는 강제성이나 어느 한쪽의 이불리(利不利)가 있을 수 없다. 오직 한일 두 민족은 형제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여 번영을 누리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자는 데 뜻을 같이하는 ‘지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8월29일은 일본이 공식발표한 날
일본의 외교문서를 위시한 대부분의 공문서나 또는 학술적 성격의 서적에서는 ‘병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한국이 일본에게 ‘병합’을 요구하고, 일본이 이 ‘요구’를 받아 들였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물론 이 단어가 시사하고 있는 ‘병합요구’는 한국 정부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최고통치권자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여를 수락하고 병합을 승낙”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즉 1910년 일본이 한반도에 지배권을 확립한 것은 한국 민중의 복리증진과 공공의 안녕유지, 그리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일본의 최고통치자에게 ‘적극적’으로 병합을 간청했고, 일본이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내비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강제성은 없다. 다만 한국의 요구를 일본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1905년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장악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한 원칙의 하나는 일본의 한국 ‘병합’은 일본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 강압적인인 것은 더더욱 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여 ‘병합’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일본이 일진회를 위시한 친일단체를 동원하여 ‘합방청원서’를 한국과 일본 요로에 제출케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1910년 이후 일본의 모든 외교문서, 공문서, 역사책 등에 기록한 ‘병합’은 ‘한국인의 요구와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우리도 그것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

1910년의 사건은 ‘합방’도 아니고 ‘병합’도 아니다. 그것은 강제적이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병탄’이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주권 상실 100년을 맞이하는 이제라도 식민사관의 산물인 ‘합방’이나 ‘병합’이라는 단어는 ‘병탄’으로 정리돼야 할 것이다

 

 

 

2. 대한제국(大韓帝國) 마지막 어전회의

한상일 | 최종편집 2009.09.02 16:00:36

 

1910년 8월22일 오후 1시, 대한제국이 망하는 순간

정장차림의 순종황제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어전(御前)회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다. 이 회의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이완용 내각의 국무대신, 황족대표, 그리고 문무 원로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형식적으로는 일본이 제시한 ‘일한합병조약안’을 토의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은 이를 최종적으로 승인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순종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이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한국 통치를 통틀어” 자신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할 것을 결정”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참석한 모든 신하들에게 “짐(朕)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할 것을 명하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군주가 나라를 버리는 순간이다.

 

같은 날 전권을 위임받은 이완용 총리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통감은 <한일병합조약>에 기명하고 조인했다. 조약의 제1조는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고, 제2조는 “일본국 황제폐하는 제1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고 기록했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도 견딘 한국이 망하는 순간이다.

"짐은 한국의 통치권을 믿고 의지하는 대일본 황제폐하께 양여하노라..."

매국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조칙이고 조약이 아닐 수 없다. 제 나라 강토와 백성의 생명과 재산도 보호하지 못하는 군주가 ‘동양의 평화’와 ‘만세의 행복’을 논하고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군주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신하가 앞장서서 주권을 넘겨주고 있다. 군주가 군주가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순종은 한국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된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현대판 ‘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사직을 이어가는 어렵고 막중한[艱大] 업무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이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을 먼저 자신의 ‘부덕’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동안 난국을 타개하고 국면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노력했음을 강변했다. 그러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됐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도저히 만회할 시간이 없고 또한 방책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했다. 순종의 ‘담화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이런 위기를] 맞아서 사태의 지리멸렬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을 찾고 공을 들여 혁신의 효과를 얻게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오늘 짐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이렇게 해서 이조 500년의 사직이 무너져 내렸고, 4000년의 민족사가 끝났다. 그리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한민족은 망국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의 압력에 의해 7월19일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황제

젊은 시절의 순종과 윤비

 

같은 날 일본 정부도 천황의 이름으로 특별담화가 발표됐다.
일본 천황은 대한제국의 병합에 이르게 된 ‘전말’을 간단히 설명했다.

 

 

한국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화란(禍亂)의 연원(淵源)’이라는 것,

이 화근을 끊어내기 위하여 일본은 한국을 보호하면서(을사강제조약, 1905) 시정의 개선을 주도했다는 것,

4년의 보호기간을 통해서 한국의 사정은 크게 개선됐다는 것,

그러나 지금의 ‘보호체제’만으로는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고 민중의 복리를 증진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

그래서 보다 혁신적인 조치, 즉 병합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한국이 병합을 원하고 있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일본천황 "한국 병합은 시세에 응하는 것"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에 서명한 당시 일본 통감부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 통감

천황의 담화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짐은 한국 황제와 함께 이러한 사태에 비추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으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하게 됐다”라고 병탄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황제와 황실은 병합 후에도 “상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고, 한국의 민중은 “직접 짐이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별도의 문서를 통해서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칭하고, 순종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부를 것을 명시했다.

망국은 수치의 역사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망국의 역사를 주도한 군주와 지배계층이 그 후 오랫동안 일본의 보호 속에서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는 사실 또한 망국에 못지않게 부끄러운 역사다.

 

 

어전회의, 병탄조약, 순종의 대국민 담화, 일본천황의 담화, 그 어느 곳에도 ‘강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황제가 동양의 평화와 한국인의 안녕을 위해서 일본에게 병합을 ‘당부’했고, 일본의 천황이 이를 ‘승낙’했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한국을 ‘병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임의적(任意的)으로 ‘병합’을 원했기 때문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간교함과 치밀함이 배어있고, 한국의 허약과 무능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3. 정한론: ‘병탄’ 프로젝트의 출발점

한상일 | 최종편집 2009.09.29 18:29:26

 

일본은 1910년 한국병탄을 완결한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구체적 정책논의는 메이지(明治) 유신과 함께 시작된다. 1873년의 정한론(征韓論)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후 40년 가까이 일본은 ‘병탄’ 프로젝트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병탄’이라는 이 ‘역사적 사건’은 일본의 관(官)과 군(軍), 그리고 민(民)이 합동으로 일구어 낸 업적이다. 그러나 실은 일본의 한국병탄은 그들이 ‘지사’ 또는 ‘대륙낭인’이라 일컫는 민간인이 병탄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국병탄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민간 또는 민간집단의 원류는 정한론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양의 충격’과 체제변혁

위기감 <일본인 눈에 비친 중국의 위기>

 

1853년 페리의 ‘흑선(黑船)’ 내항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위력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에도(江戶)의 한 백성이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이 “검은 연기를 품으며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쇳덩어리” 배에서 나온 “한발의 포성은 일본인을 250여년의 긴 꿈에서 깨어나게”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위기극복을 위한 대처 방안을 모색케 했다. ‘쇄국’과 ‘개국’의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역사적 상황에서 일본은 ‘개국’과 ‘개혁’의 길을 택하고, 이를 위한 메이지유신(1868)이라는 체제변혁을 단행했다. 270년 동안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라는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메이지라는 중앙집권체제가 출범했다.

모든 정치적 대 변혁은 사회적 혼란을 몰고 온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그 혼란을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변혁의 성사가 결정되게 마련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270년 동안 지속된 도쿠가와가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메이지’라는 체제가 정착하기까지는 상당한 혼란과 진통이 뒤 따랐다. 메이지유신이 비록 무혈혁명이라 할지라도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아니었다. 물론 준비된 체제도 아니었다. 오랜 평화 속에서의 사회적 변동과 19세기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몰고 온 ‘서양의 충격’이라는 국제적 상황이 정치적 대변혁을 촉발 시켰을 뿐이다.
유신의 주체세력 또한 일사분란하게 통합된 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정부는 경쟁적 관계에 있는 사츠마(薩摩), 조슈(長州), 도자(土佐), 히젠(肥前) 네 번(藩)의 연합으로 이루어 졌다. 주체 세력들 사이에도 주도권 장악을 위한 권력투쟁이 물밑에서 끊임없이 진행됐다. 혁명 후 반혁명이 나타나듯이 반(反)유신 세력도 등장했다. 더하여 서양의 세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혼란이 뒤 따른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유신주체세력의 한사람이었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가 일본은 “하나로 통합된 국가가 아니라, 3백 개의 작은 독립국으로 되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메이지)정부는 오합(烏合)의 정부로 조령모개, 일정한 방침도 없는 마치 사상누각과 같은 상태다”라고 할 정도로 새로 들어선 메이지 체제는 혼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메이지 지배체제가 제일 먼저 맞부딪쳐야 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밖으로부터의 위협과 안으로부터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하면 국민적 통합을 이루고 민족적 독립을 지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가 정책적 선택이라는 구체적 과제로 나타난 것이 일본이 한국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군을 파견할 것인가를 논의한 1873년의 정한논쟁(征韓論爭)이다. 이 사건은 새로 들어선 메이지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무력항쟁의 빗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을 꿈꾸며 등장한 메이지 체제가 품고 있는 한국인식의 근본시각과 정책의 기조를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정한논쟁의 정치적 역학

오쿠보 도시미치 ⓒ 뉴데일리

 

정한논쟁의 발단은 이렇다. 1868년 12월 메이지 정부는 이제까지와 같이 대마번(對馬藩)의 사자를 통하여 일본에 정권교체가 있었음을 한국정부에 통고하고 수교의 갱신과 계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황(皇)’, ‘칙(勅)’의 문자를 사용한 문서의 형식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일본의 한국침략 의도, 그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해 온 도쿠가와 막부를 힘으로 무너뜨린 메이지 정권에 대한 불신 등이 복합돼 있었다. 한국정부는 일본에서의 정치적 변화를 승인하지 않았고, 또한 일본이 시도하는 교역과 외교관계의 복원을 승낙치 않았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모욕’이라고 규정하고 한국에 문책원정을 보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됐다.

그러나 정한문제가 정책의제로 각의에서 논의된 것은 1873년 여름이었다. 각의에서 메이지 정부의 실권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한국과 교섭을 위한 전권대사로 자신을 파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전권대사로 파견되어 한국의 개국을 촉구하면, 한국은 전권대사인 자신을 ‘살해[爆殺]’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명분이 확보되어 한국을 정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찬반의 논의가 있었으나 각의는 사이고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각의의 결정은 천황도 원칙적으로 승낙했다. 다만 최종적 결정은 미국과 유럽순방 중에 있는 메이지의 최고행정관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일행의 귀국 후라는 단서를 달았다.

사이고 다카모리 ⓒ 뉴데일리

 

이와쿠라 일행이 귀국한 후인 1873년 가을 정한문제가 다시 정면으로 대두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위시한정한론자들은 이미 각의에서 결정된 사절파견의 실천을 요구했다. 이에 반하여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은 사절파견을 반대했다. 특히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절파견은 전쟁과 직결된다는 것, 이는 재정적으로나 대외정책상 문제가 많다는 것, 불평등조약 개정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필요한 것은 국내안정과 국력배양이라는 것 등의 ‘정한론반대 7개조’를 내세워 사절파견의 연기를 주장했다. 정한론자와 반정한론자 사이의 갈등과 타협과 음모라는 복잡한 정치과정을 통해서 이미 결정되었던 사절파견은 무기한으로 연기됐다. 반(反)정한론자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을 유도한다는 특사파견은 연기됐고, 정한론은 폐기됐다.

정한론이 폐기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를 위시한 정한론자들은 신정부의 요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도쿠가와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일치했던 유신세력은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이 후 지속된 정한파와 반정한파의 대립은 결국 1877년 서남전쟁(西南戰爭)으로 이어졌고, 사이고를 중심으로 한 정한파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정국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정한론은 더 이상 정책문제로 논의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한’의 의지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심층에서 더 강하게 내연하고 있었다.

 

정한론의 실체
메이지 정부의 진로 설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정한논쟁은 대외정책보다는 오히려 국내정치의 한 부분으로 보려는 시각이 있다. 달리 표현하여 정한논쟁은 한국을 정복하기 위한 군대를 파견할 것이냐를 중심으로 한 의견대립이 아니라, 국내문제가 정한론이라는 구실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사절(사이고)파견→한국의 거부(사절폭살)→원정군파견으로 알려진 사이고의 정한론은 한국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국내정치문제가 정한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기도 다카요시 ⓒ 뉴데일리

 

이 주장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사이고의 대사파견 주장이 ‘사절폭살-전쟁’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본질은 평화적인 교섭을 통한 수교를 목표하고 있었다. 반정한파는 위축되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대외정책을 활용했다. 즉 이와쿠라를 대표로 하는 미국과 유럽 사절단의 외교는 결국 실패했다. 이로 인해 흔들리는 정치적 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오쿠보가 반대파, 즉 정한파를 추방하는 ‘쿠데타’였다. 또한 조슈파의 상당수가  연루된 부패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히 로부미(伊藤博文)가 이를 ‘구실’로 삼아 문제를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었다. 결국 정한논쟁이라는 것은 정권초기의 혼란과 모순을 슬기롭게 처리하지 못하고, 또한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이 당사자의 예측범위를 넘어 정부의 대분열까지 가게 됐다는 것이다. 즉 권력투쟁의 틀과 기준이 성숙되지 않은 초창기 “정부를 덮친 불행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할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정한논쟁의 실체라는 주장이다.

무릇 국내정치나 체제 안팎의 권력 갈등과 무관한 대외정책은 있을 수 없다. 모든 대외정책은 국내정치나 권력의 함수와 직간접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정한정책’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유신체제 내의 권력투쟁, 정비되지 않은 정부의 정책결정, 대응의 미성숙, 복잡한 인간관계 등과 같은 요인들이 정한논쟁에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도 다카시의 표현과 같이 정한논쟁(서남전쟁)의 원인은 “몇 사람(3-5인)의 사사로운 감정[私怨]으로 생긴 것”으로서 “실로 끝없이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측면이 있다. 또한 유신 직후부터 조슈의 핵심인물들이 연루된 부정부패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략적으로 활용된 흔적도 있다.

그러나 정한론의 본질은 한국지배와 혼란한 시국수습에 있었다.

유신지도체제를 분열시키고 결국 내전으로까지 발전시킨 정한론은 두 개의 중요한 요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째는 한반도를 교두보로 삼아 일본이 그 세력을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대륙웅비’의 이념이다.

즉 한국을 지배해야한다는 논리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나타난 것은 메이지 정권이 출범하면서이지만, 그 발상은 도쿠가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쿠가와 시대의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는 일찍이 한국은 일본의 국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한국연구의 긴급성을 강조했다(<海國兵談>). 하야시에 의해 싹트기 시작된 한국지배의 논리는 사토 노부아키(佐藤信淵),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하시모토 사나이(橋本佐內), 히라노 구니오미(平野國臣) 등과 같은 막부말기의 지식인들로 이어지면서 ‘한국공략론’으로 발전했다. 
이들의 일관된 논리는 서세동점이라는 당시의 국제추세 속에서 일본이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세력을 대륙으로 진출하는 길 밖에 없고, 한국은 그 진출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병탄’은 일본이 수행해야 할 1차적 과제였다. 이러한 정한론은 막말의 지식인과 지배계층 사이에 상당히 보편화돼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 통합과 체제개혁에 실패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정한론을 정책으로까지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메이지 체제가 들어서고, 한국이 메이지와의 외교관계 요구를 거부하면서 정한론은 하나의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과제로 등장했다.

메이지 정부가 군대를 파견해야만 한다는 중요한 논거는, 메이지 초기 외교를 담당했던 야나기바라 사키미츠(柳原前光)가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제출한 의견서에 잘 나타나 있다. 야나기바라는 일본이 열강에 앞서 한국을 지배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는 “한국은 북만주로 연결되고 대륙에 접한 곳으로서 이곳을 지배하면 실로 황국보존의 기초가 되고 후일 만국경략진취의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정한론이 나타나기 시작할 당시(1870) 유신체제의 실력자의 한사람으로서 외상이었던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이 “만세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대륙을 지배해야 하고, 이를 위한 가장 기초적 단계는 한반도 지배”에 있음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1868년 이후 한국을 내왕하면서 교섭을 직접 담당했던 실무자들도 한국정벌을 정부에 건의하면서 “한국은 허약하기 때문에 30대대의 군대를 파견하면 50일 이내에 정복”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한국관은 “진구(神功)황후가 정벌했던 땅”이고,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여광(餘光)이 있는 땅”이었다.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해야 할 땅이고 대륙진출의 디딤돌이었다.

 

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 정부의 논쟁 현장 ⓒ 뉴데일리

 

정책으로서 ‘정한’이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국내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정략적 요소이다.

메이지유신 후 진행된 급격한 체제변화와 사회변동은 많은 정치·사회적 불안과 불만을 조장했다. 특히 폐번치현(廢蕃置縣), 개병제(皆兵制) 실시, 신분제 철폐 등과 같은 내정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특권을 상실한 사족(士族) 계급과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하급무사의 불만과 불평이 사회에 팽배했다. 이는 ‘내란’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메이지 초기 메이지 체제를 힘으로 무너뜨리기 위한 내란이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정한’의 주장은 이러한 국내적 불만을 대외전쟁을 통하여 해소하려는 정략적 발상이다.

정한파의 수령이었던 사이고의 표현을 빌리면 정한론은 “내란을 바라고 있는 마음을 외국으로 이전시켜 국가의 발전을 꾀하는 원략(遠略)”이었다. 이는 사이고만의 의견이 아니라 정한논쟁 당시 정한론에 반대했던 기도 다카요시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기도도 1870년에는 자신을 특사로 파견하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그도 한국이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면, 무력을 발동하여 한국의 무례를 응징할 것이고, 이는 한국정벌과 동시에 급격한 체제 변화로 인한 국내의 모순, 특히 하급무사의 불만과 불평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방책이라는 것을 명확히했다. 
정책결정자뿐만 아니라 실무자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과의 교섭을 위하여 왕래했던 외무성의 관리(小錄)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도 정한론은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내란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는 불평사족(不平士族)을 한반도에 이식(移植)시킴으로써 내란의 열기를 밖으로 돌려 국내안정을 이룰 수 있음과 동시에 대륙진출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정책이라고 강조하며 군사를 급파할 것을 건의 했다. 결국 한국은 일본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과 불만의 전출지(轉出地)였다.

‘대륙웅비’의 거점으로서, 내부 불만과 불평의 ‘전출지’로서 한반도를 지배한다는 정한논은 1877년의 서남전쟁을 계기로 정책으로서는 ‘당분간’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보다 확실하고 안전한 ‘정한’과 ‘대륙경영’을 위하여 물밑에서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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