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고종황제와 조선의 말로

구름위 2013. 11. 27. 14:11

 

 

 

 

 

 

 

 

 

 

 

1862년 철종이 자식없이 죽자 대원군은 조대비와 공모하여 고종을 후계자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안동김씨를 타도하고 서원을 철폐시키는 등 일련의 개혁도 있었지만  1860년 북경이 연합군에 의

함락되고 함풍제(청의 제7대 황제)가  만주로 도망가자  조선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연합군과 협상이 타결되어 함풍제는 북경으로 돌아왔지만 그 댓가로 연해주를

넘기게 되는 비극을 맞는다.

 

조만간 연합군이 상륙한다는 풍문에 조선민중들의 동요가 한동안 극심했고 이때의 교훈이 대원군

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873년 권력 10년만에 권좌에서 물러나지만 그 배후엔  민비가 있었다.

남은 개혁들이 많이 남았지만 눈물을 머금고 권력의 일선에서 사라지고 만다.

 

대원군이 물러난지 3년만에 민비는 문호개방을 단행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

민비가 권력을 잡는10년 동안 좋다는 절, 용하다는 무당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써 국고는 고갈되

고 민씨 일가들의 노략질로 관료들에게 줄 월급마저 지급이 중단된 상태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진다. 1년간이나 봉급을 못받은 군인들이 대원군을 찿아가 권력의 전면에

나설것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민비는 충주로 도망가고 고종은 모든 권력을 대원군에게 넘기고 만다.

하지만 민비의 다급한 구원요청에 청나라 원세게가 3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와 고종을

복위시키고 대원군을 잡아가고 만다.

1894년 청일전쟁때까지 12년간을 숨막히는 청나라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28살에 불과한  원세

폭정은 감히 중국이라 항의 한번 못하고 임오군란에 관련된 숱한 인사들을 처형시키고 만다.

 

1876년 일본하고 맺은 강화도조약 제1조가  조선은 독립국이다 이거늘 또 청의 식민지가 되어 버리

조선을 보고 일본은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1884년 원세계에 의해 반동보수로 돌아가는 상황을 견디다 못해 개화파인사들을 중심으로 갑신정

터진다. 월남을 두고 청불전쟁이 터지자 서울주둔 3000명의 청나라 군인중 청불전쟁에 참전

하기 위해 1500명이 철수하는 것을 기폭제로 시작하여 기습적으로 거사를 단행하여 성공하였으

나 청나라군사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 당하고 만다.

갑신정변 제1조가 대원군을 권력1인자로 모신다 이다.

개화파인사들은 대거 망명에 나서고 더러는 잡혀 처형 당하고 원세계의 압정은 절정에 달했다.

조금이라도 개화적인 인물에 대한 대대적  검거 작업이 있었고 다른나라와 외교도 맺지 못하게

하는 간섭이 말 할 수 없이 극심했다.

 

1894년 동학난이 터진다. 이 배후에는 대원군이 있었다.

동학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서울로 들어와 민비체포령을 책동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곳곳에서

된다. 동학난은 청일전쟁으로 확대 되고 일본군의 승리로 대원군은 정치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되고 개화파들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다시 한번 승부수를 띄운다.

전쟁에 승리하고도 아무것도 얻은게 없는 일본으로선 또 한번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대원군 역시 러시아의 보호아래 권력을 잡은 민비로 인해 권력전면에 나서지 못하자 일본과 모의

하여 민비 제거 작업에 들어간다.

암호명 여우사냥이라는 작전하에 1895년 서울 한폭판에서 권력1인자 민비가 무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1896년 공포에 사로 잡힌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절대 해를 끼치지 않을것이라는 러시아와 일본의 약속을 받아내고 러시아 공사관 생활을 끝내고

경북궁으로 돌아온다.

모든걸 새로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민비처럼 또 습격 당할까 봐 11개국 외교관들이 몰려 있는 자리에서

대한제국탄생하였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물러나고 순종이 왕위에 오른다.

순종의 장인 윤택영은 순종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에 고종의 두번째비였던 엄비에게 어마어마한

로비자금을 뿌려 성공하였다.

1919년 윤택영은  일제로부터 황실재정(財政)비를  좀더 많이 타 내기 위해 고종을 독살하고 만다.

  

아래는 고종의 국상(國喪) 장면이다. 

 

 

 

 

 

 

 

▼ 아래는 다음블로거 "민속불교"님의 "민비의 죽음을 통해 본 사술,풍수의 진정성"이란 글입니다

 

조선이 망하자 아편을 삼켜 자결한 선비 황현(黃玹). 그는 민비 시해를 듣고 “왕후가 정사에 간여

한지 10년만에 나라를 망쳤고 끝내 천고에 없는 변을 만나고야 말았다”고 개탄했다. 민비는 고종

(高宗)과 함께 조선말 부정부패의 핵이었다. 매관매직,족벌정치,외세초청,국고낭비가 그 큰 죄목

들이다. 매관매직은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로 이어진다. 지방관이 된 자는 맨 먼저 벼슬을 사기 위

해 고리로 빌린 돈을 갚느라 서둘러 세를 부과하고,다시 다음 벼슬값을 마련하느라 새로운 잡세

를 부과하고,한 숨 돌린 후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몫을 만들었다.

 

민비가 살해된 다음날 고종은 엉뚱하게도 폐후(廢后) 명령을 내리며 민비를 비난했다.
“왕후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나의 주위에 배치하고 나의 총명을 가리우며 백

성을 착취하고 나의 정령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고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

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또 닷새도 안돼 상궁 엄씨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10년전 고종의 총애를 받다가 민비에게 찍혀 죽

음을 면하고 민간으로 쫓겨난 이다. 임금이 양심도 없다고 백성들이 한탄했다.
황현은 민비가 정권을 잡은 “갑오년(1874년) 이래로 대궐에서 쓰는 비용이 끝이 없다보니 국고가

모두 비어 군사들의 봉급을 주지 못한 것”이 임오군란의 원인이라고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지

적한다.


민비가 정권을 장악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국고가 바닥난 것이다. 대원군 집권기에는 그래도

했던 국고가 바닥난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군졸뿐만 아니라 조정의 문무백관은 5년 이상

봉급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리를 보전 할 수 있었던 것은 혹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던 것은 아

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직접적으로 착취할 수 없었던 군졸들은 말 그대로 춥고 배

고픈 고난의 행진을 갈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대원군 집권기 경복궁 중건 등 대 토목공사를 벌리

면서도 현상유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정자들의 민비 일족 보다 상대적으로 덜 무능하고

부정부패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민비가 국고를 탕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자신이 나은 아들로 하여금 세자책봉을 위해 청의 실력

자인 이홍장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쳤고 병약한 아들을 위해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금강

산 일만이천봉의 봉우리마다 쌀 한 섬, 배 한 필, 돈 천 냥씩을 바쳤다. 그리고 점치는 것을 좋아해

유명한 점쟁이 이유인은 점 한 번 쳐주고 즉석에서 비단 100필과 돈 1만 냥을 받을 정도였다. 공무

원들의 봉급도 주지 못하는 처지에 이런 비상식적인 행위를 통해 국고 적자를 낭비하고....결국 국

고가 바닥난 상태에 명목상 구식군대가 란을 일으켜 쫓겨난 민씨는 가까스로 몸을 피한 뒤 곧 바

 청국 군대를 불러들여 자신과 정적이면서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청에 볼모로 잡아가게 하는 행

위를 하는 것이다. 조선을 청과 일본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한 민비. 임오군란으로 몸을 피신했을

때 조선 역사 이래 최초로 무당으로서 君에 봉해진 진령군를 만나게 된다.

 

 진령군 이씨는 과부로서 장호원에 살고 있던 소위 말하는 신들린 여인인데 임오군란시 민비가 장호원에 숨어 있을 때 민비의 환궁을 예언해 신임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아비인 고종이 살아있고 국모로 추앙(?)받고 있다면 그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그의 환궁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것을 예언했다고 그리고 민비가 그녀를 궁에 데리고 와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내리고 “출세를 위해선 성균관이 아니라 진령군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 생겼다.면 상식의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진령군 외에도 맹인 이당주는 정이품 자헌대부의 작호를 받아 처첩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살았는데 그가 국가를 위해서 한일은 대원군의 화상을 붙여놓고 그의 첩에게 시켜 네번 절하고 마흔번 주문을 외면서 왼손으로 49발의 화살을 쏘아 7일 안에 죽게 하는 저주를 거행한 것이라니..... 정 이품의 품계가 얼마나 높은가하면 위로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있을 뿐이고 그밑에 참판들과 같은 서열이며 종이품인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관찰사보다 높은 품계인 것이다.

 민비가 미신에 의존한 것은 하루 이틀된 일이 아니고 원자 척을 낳기 훨씬 전부터인데 고대하던 아들을 낳은후에도 음양을 모르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궁전 내에서의 푸닥거리는 그치지 않았고 내전은 박수, 무당 소경의 소굴이 되어 빈약한 국고로는 이들을 유지하는 비용을 당해낼 수가 없게 되었다. 적자를 메꾸기 위해서 당오전을 발행했는데 이것은 당백전에 못지않은 악화로서 피폐한 조선 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조선의 쟌다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원조 쟌다크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민비는 무당뿐 아니라 풍수도  믿어 천하 명당을 찾아 친정아버지의 묘를 네 번 이장했다. 그러나 마지막 이장 후 1년만에 일인의 손에 죽고 그 시신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민비의 정적 대원군(大院君) 역시 풍수의 신봉자다. 두 대(代)의 군왕을 낳을 명당이 있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절에 불을 질러 터를 빼앗은 곳이  충남 예산의 남연군묘가 그것이다. 준봉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에 아늑하게 자리한 이 곳에 서면 이른바 명당론에 고개를 끄덕이게도 된다. 그러나 명당의 지기를 받았다는 고종과 순종에 이르러 나라는 망했으니 진정 이땅이 명당인가 명당이란 대체 무엇인가. 국가와 백성의 안락 대신에 가문과 일신의 영화를 위해 주는 것이라면 명당일까.

민비의 죽음 조선의 멸망이란 역사앞에 무당의 예언,명당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