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고종의 국상(國喪) 장면이다.
▼ 아래는 다음블로거 "민속불교"님의 "민비의 죽음을 통해 본 사술,풍수의 진정성"이란 글입니다
조선이 망하자 아편을 삼켜 자결한 선비 황현(黃玹). 그는 민비 시해를 듣고 “왕후가 정사에 간여 한지 10년만에 나라를 망쳤고 끝내 천고에 없는 변을 만나고야 말았다”고 개탄했다. 민비는 고종 (高宗)과 함께 조선말 부정부패의 핵이었다. 매관매직,족벌정치,외세초청,국고낭비가 그 큰 죄목 들이다. 매관매직은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로 이어진다. 지방관이 된 자는 맨 먼저 벼슬을 사기 위 해 고리로 빌린 돈을 갚느라 서둘러 세를 부과하고,다시 다음 벼슬값을 마련하느라 새로운 잡세 를 부과하고,한 숨 돌린 후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몫을 만들었다.
민비가 살해된 다음날 고종은 엉뚱하게도 폐후(廢后) 명령을 내리며 민비를 비난했다. 성을 착취하고 나의 정령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고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 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음을 면하고 민간으로 쫓겨난 이다. 임금이 양심도 없다고 백성들이 한탄했다. 모두 비어 군사들의 봉급을 주지 못한 것”이 임오군란의 원인이라고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지 적한다.
했던 국고가 바닥난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군졸뿐만 아니라 조정의 문무백관은 5년 이상 봉급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리를 보전 할 수 있었던 것은 혹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던 것은 아 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직접적으로 착취할 수 없었던 군졸들은 말 그대로 춥고 배 고픈 고난의 행진을 갈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대원군 집권기 경복궁 중건 등 대 토목공사를 벌리 면서도 현상유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정자들의 민비 일족 보다 상대적으로 덜 무능하고 부정부패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자인 이홍장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쳤고 병약한 아들을 위해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금강 산 일만이천봉의 봉우리마다 쌀 한 섬, 배 한 필, 돈 천 냥씩을 바쳤다. 그리고 점치는 것을 좋아해 유명한 점쟁이 이유인은 점 한 번 쳐주고 즉석에서 비단 100필과 돈 1만 냥을 받을 정도였다. 공무 원들의 봉급도 주지 못하는 처지에 이런 비상식적인 행위를 통해 국고 적자를 낭비하고....결국 국 고가 바닥난 상태에 명목상 구식군대가 란을 일으켜 쫓겨난 민씨는 가까스로 몸을 피한 뒤 곧 바 로 청국 군대를 불러들여 자신과 정적이면서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청에 볼모로 잡아가게 하는 행 위를 하는 것이다. 조선을 청과 일본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한 민비. 임오군란으로 몸을 피신했을 때 조선 역사 이래 최초로 무당으로서 君에 봉해진 진령군를 만나게 된다.
진령군 이씨는 과부로서 장호원에 살고 있던 소위 말하는 신들린 여인인데 임오군란시 민비가 장호원에 숨어 있을 때 민비의 환궁을 예언해 신임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아비인 고종이 살아있고 국모로 추앙(?)받고 있다면 그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그의 환궁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것을 예언했다고 그리고 민비가 그녀를 궁에 데리고 와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내리고 “출세를 위해선 성균관이 아니라 진령군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 생겼다.면 상식의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진령군 외에도 맹인 이당주는 정이품 자헌대부의 작호를 받아 처첩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살았는데 그가 국가를 위해서 한일은 대원군의 화상을 붙여놓고 그의 첩에게 시켜 네번 절하고 마흔번 주문을 외면서 왼손으로 49발의 화살을 쏘아 7일 안에 죽게 하는 저주를 거행한 것이라니..... 정 이품의 품계가 얼마나 높은가하면 위로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있을 뿐이고 그밑에 참판들과 같은 서열이며 종이품인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관찰사보다 높은 품계인 것이다. 민비의 죽음 조선의 멸망이란 역사앞에 무당의 예언,명당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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