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100년전의 한국에 가다 4,5,6,7,8-정한론과 병탄의 첨병들 그리고 매국노..을사강제조약

구름위 2015. 10. 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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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병탄의 첨병(A)

한상일 | 최종편집 2009.09.11 16:20:04

 

"국내의 패배를 대륙 웅비로 풀자"
A. 대륙낭인(大陸浪人)과 한국

정한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서남전쟁(1877)에 참여했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그들이 품고 있는 한반도 지배와 대륙웅비의 꿈까지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국내에서 받은 패배와 실의를 대륙에 투영하여 그곳에서 ‘웅비의 천지’를 만들어가는 꿈을 키웠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꿈을 키우는데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꿈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실천적 행동으로 대륙을 찾았다. 한반도를 거쳐 만주, 중국, 시베리아, 몽고, 필리핀, 인도까지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그곳에 거점을 만들고, 정치·사회 변화와 그곳의 삶의 양태를 주시했다. 일본 역사는 이들을 가리켜, ‘대륙낭인’이라 부른다. 권력과 금력과 영달을 초개처럼 여기고, 오직 국가의 독립보존과 번영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본의 대륙진출이라는 목표를 위하여 대륙에서 활동한 민간지사라는 의미다.

대륙을 오가며 그들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한반도라는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본이 대륙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로 하여금 대륙진출을 위한 한반도 선점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하다는 ‘정한’의 의지를 더욱 불타게 했다. 이를 위한 첫 작업은 ‘한국의 실상’을 파악하고, 보다 효과적인 활동을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서양제국주의를 모방한 일본은 ‘함포’를 앞세우고 한국의 개국을 요구했다. 힘에 밀린 한국은 1876년 일본에 굴복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륙낭인의 활동은 국가적 보호 속에서 더욱 활발해졌다. 이들은 먼저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정찰하면서 정치, 군사, 경제, 사회상을 면밀히 조사하고 기록했다. 물론 그 기록들 가운데는 한국의 문명수준을 의도적으로 ‘야만’으로 만들거나 또는 허무맹랑한 거짓 정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들은 한국의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혼란스럽고, 국기(國基)는 허약했고, 독립의지는 희박했다. ‘정한’의 실현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가르침 "조선을 일본 세력안에 넣어라"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와 <서울에 남은 꿈[漢城之殘夢]>

메이지 초기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실정을 가장 소상하고도 비교적 정확하게 남긴 기록은 아마도 <한성지잔몽>이 아닐까 생각된다. 저자 이노우에 가쿠고로(1860~1938)는 1883년부터 4년 동안 오늘의 서울인 한성에 체류하면서 한국 최초의 신문이라 할 수 있는 <한성순보> 발행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한성지잔몽>은 그가 4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정부의 지배계층, 특히 개화파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권력층 내에 친일파를 형성하는데도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노우에가 한국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며 문명론자라 할 수 있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교육을 받으면서부터이다. 히로시마(廣島)출신인 이노우에는 게이오(慶應)대학에서 후쿠자와를 만났다. 이노우에의 투철한 국가관[大和魂]을 인정한 후쿠자와는 그를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여 자신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었다.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마치 ‘군신수어(君臣水魚)’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강조했지만, 국권확장론자였다.

그는 “정부의 형태나 실체 모두가 아무리 전제적이라 해도 나라를 강하게 만들 만큼 강력하기만 하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국권확장을 지지했던 인물이다.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주장한 후쿠자와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이노우에가 국권확장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대륙웅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한국지배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또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1882년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이노우에는 후쿠자와의 지시에 따라 12월에 한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의 나의 23세였다.
한국으로 떠나는 이노우에게 후쿠자와는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인이다’라는 것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훈시와 함께 그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한국이 완전히 독립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의 독립이 어렵지만] 일본 이외에 어떤 나라도 한국에 손을 뻗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을 계도(啓導)하는 것은 오직 일본의 권리이며 또한 의무이다....최근 중국이 서양 열강에 의하여 분열될 것이라는 논의를 듣고 있다. 결국 중국은 사분오열되어 서양 세력에 빠지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작은 섬나라인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대륙에 발판을 구축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은 위태로울지 모른다. 그 발판 구축의 첫 걸음이 한국을 우리의 세력범위 안에 놓는 일이다." (近藤吉雄, <井上角五郞先生傳>(1943), pp. 35~36)

이노우에의 사명은 한국을 ‘일본의 세력범위’에 넣고, ‘대륙진출의 가교’를 놓는 것이다.

 

박영효-김옥균과 함께 조선으로..한성순보 발행

1883년 23살의 나이에 조선에 와서 '한성순보' 발행을 뒤에서 주도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남긴 서울 체류기 '한성지잔몽'의 표지.

 

이노우에가 한국에 가게 된 직접적 동기는 한국에서의 신문발행이다.

임오군란(1882)의 뒷마무리를 수습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와 김옥균에게 후쿠자와는 한국에서 신문 발행을 권유했다. 게이오 대학과 더불어 <시사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여 운영하고 있던 후쿠자와는 ‘백성의 개명’과 ‘국론통합’을 위해서는 신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일본에서 자금을 마련한 박영효와 김옥균은 신문발행의 실무자로 후쿠자와가 추천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대동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통리아문(統理衙門) 동문학(同文學) 산하에 박문국(博文局)을 두고 1883년 10월 30일부터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한국 최초의 신문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추천사를 쓴 <한성지잔몽>은 자신이 한국으로 가게 된 연유, 1883년 당시 한국에서 중국과 일본의 지위, <한성순보>를 발행하기까지의 과정, 갑신정변과 그 후 한국정국의 변화, <한성순보>의 중단과 <한성주보>의 발행, 한국과의 이별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한성지잔몽>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고 있지만, 특별히 눈길이 가는 곳은 그가 본 한국의 지배계급과 그들을 둘러싼 정치현상이다.

그는 대원군, 민비, 양반을 중심으로 한 정권투쟁과 지배계층의 부패현상을 깊숙이 관찰했다.

이노우에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왕족(대원군파)은 척족(민비파)을 꺾으려하고, 반대로 척족은 왕족을 능가하려고 하는 서로의 알력 때문에 정국이 평탄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양반들은 각각 당파를 만들어 왕족이나 척족과 더불어 세도잡기에 여념이 없다.” 세도가들은 나라와 국민을 염려하기보다 “왕궁을 출입하며 제각기 가문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었다. 정부가 전환국, 화약국, 목축장, 제중원, 영어학교, 광무국 등을 신설할 때도 세도가들은 “이를 핑계 삼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멋대로 국고를 낭비”하고 있었다.
이노우에가 정리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부패와 부조리 그 자체였다. 국민 모두의 삶은 끝없이 피폐해지고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늘어났고, 지방 관리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인구는 감소하고 있었고 고유한 풍속이 점차 파괴되고 있었다. 더하여 교통이 정리되지 않아 천연적 부와 농산물이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
나라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어도 “나라의 자주와 독립, 그리고 백성의 삶을 걱정하는 뜻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고, 오히려 청국이나 러시아 또는 그 밖의 외국인에게 아부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무리”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노우에 눈에도 일본의 한국지배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생 불능의 나라 조선.."30대대 군대면 50일안에 먹을 수 있다"

한국을 돌아본 일본인이 쓴 '이면의 한국' 책 표지

 

한국의 지배계층과 사회상에 대한 이노우에의 이와 같은 평가는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노우에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는 <은자의 나라 한국(Hermit Kingdom, 1882)>에서 “한국은 만성적 어려움”에 빠져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 중요한 원인으로 지배계층의 국가의식 결핍과 부패를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나라에는  진정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서 케케묵은 혈족이나 양반사회에 사악함과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매우 절망적인 일이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부와 관리와의 관계라는 것은 단지 젖과 그것을 빨고 있는 돼지의 관계에 불과했다. 음모와 질투가 끝없이 계획을 방해했다.”
이노우에보다 조금 뒤에 한국을 돌아본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일본인에 의하면 한국의 군대는, “무뢰한의 무리”로서 “국가를 보호한다는 의지가 없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철포를 버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도망”치고, 돈이 없으면 돈을 빌리기 위하여 “철포를 전당포에 잡히는 것을 조금도 괴이하지 않게 여기는 무리”였다.
일본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회생의 가능성이 희박했다. 지배층은 백성의 삶은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권력쟁취를 위하여 끊임없이 서로 투쟁하고 있었다.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백성 사이에는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고, 피지배층은 지배층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의 현상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정한론자가 “한국은 허약하기 때문에 30개대대의 군대를 파견하면 50일 이내에 정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병탄의 이념적 무기..감명받은 이용구, 아들이름도 '大東國男'으로 지어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한성지잔몽>이 한국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은 한국병탄의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한 일본 역사가의 지적처럼 이 책은 “한국병탄의 이념적 무기”였다.

1893년에 출간된 '대동합방론. 한국합방의 방법론을 제시한 다루이 도키치의 이 책은 당시 한국과 중국 지식인들을 세뇌시킨 이념의 무기가 되었다. 


서양으로부터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한중일의 ‘대등한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은 당시 한국이나 중국의 지식인들의 지적 관심을 자극했다. 출판 직후 중국의 개혁론자 량치차오(梁啓超)는 자신의 서문을 추가하여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라는 이름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출판했다. 또한 일본의 한국병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던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대동국의 사내’[大東國男, 오히가시 구니오]라고 지을 정도로 이 책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850년 나라(奈良)에서 태어난 다루이 도키치는 열렬한 정한론자였다.

평소부터 사이고 다카모리를 흠모해 온 다루이는 1877년 서남전쟁이 일어나자 사이고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사이고를 지원하기 위하여 내륙에서 군사를 일으킬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군사적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한’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다.
부산과 목포 일대를 몇 차례 내왕한 그는 ‘국면 타개책’으로 한국 근해의 무인도 수색을 착수했다. “나는 평소부터 일본이 무엇보다 먼저 한국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발전의 실마리가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는 다루이에 의하면 무인도 탐험의 목적은 “정한책(征韓策)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3년 동안의 무인도 탐험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정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대륙낭인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도야마 미츠루(頭山滿)와 함께 상하이에 동양학관 설립을 주도했다. 또한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과 두터운 친교를 맺으면서, 그의 재기를 위한 자금 조달과 후원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일본의 ‘대륙진출’과 ‘정한’의 실현에 귀착했다. 그의 <대동합방론>도 이를 위함이었다.

 

"일본+한국=대동국 건설"..한-중 지식인들 겨냥, 한문으로 저술
<대동합방론>의 초고가 완성된 것은 1885년이지만, 출판된 것은 1893년이다. 8년이라는 공백은 다루이가 두 차례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초고를 분실했기 때문이다. 1893년에 출판된 <대동합방론>의 특색은 초고와 달리 일본어가 아니라 한문으로 써졌다는 점이다. 그가 한문을 택한 것은 처음부터 <대동합방론>의 독자를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대동합방론>은 서양세력의 아시아 진출이라는 뚜렷한 국제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대전제로 삼고 있다. 아시아의 단결과 통합을 위하여 다루이는 구체적으로 세 단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 단계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대동국이 중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대동국,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을 포함한 ‘대아시아연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루이의 주요관심과 <대동합방론>의 핵심 주제는 첫 단계인 대동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대동합방론>의 상당부분은 서양세력의 동양진출로 인한 ‘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쇠잔해 가고 있는 중국의 사정과 호전적인 러시아를 포함한 주변정세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사회적으로 피폐한 한국의 현상을 그렸다. 다루이에 의하면 한국은 “이름만 자주국일 뿐 오래전에 자립을 상실”했고, “나라를 부흥시킬 방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가 아닌 나라였다.
주변사정을 볼 때 그동안 한국이 의존해온 중국은 “한국을 후원할 실력을 이미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한번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면 “두 번 다시 나라를 일으키기 어렵고 동양의 폴란드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에서 한국이 택할 길은 일본과 통합하는 이외의 다른 길이 없었다. 동종동문(同種同文)의 형제와 같은 일본의 보호와 지도를 받을 때 한국은 비로소 자주성을 확립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택해야 할 길은 명확해졌다.
다루이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의 ‘합방’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한국 침략으로 한국 내에 반일감정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한 가족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우리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의 지형은 입술과 이와 같고, 그 세력은 수레바퀴의 두 바퀴의 관계이고, 그 정은 형제와 같으며, 그 의리는 벗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방국의 국호를 ‘대동’이라고 함은 ‘동(東)’이라는 글자가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이 함께 사용한 또 다른 국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루이는 이처럼 친근하고 대등한 합방을 논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목의 한국, 합방국의 주권자로서의 일본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루이가 살펴 본 세계정세에 의하면 강대국들은 “속국(屬國)을 본토 면적의 몇 십 배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단 하나의 속국도 거느리지 못하고”있었다. 구미의 여러 나라와 대등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일본도 그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키워야만 했다. 결국 일본이 진출해야 할 곳은 ‘대륙’이고, 대륙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필요했다. 다루이는 “일한합동이 이루어진다면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포함한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870년대 정한론자의 논리와 다를 바 없었다.

결국 한반도는 일본이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징검다리’이고, 대등한 ‘합방’이라는 명분은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일본이 이 후 진행한 대륙정책은 <대동합방론>의 코스를 밟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동합방론>은 한국병탄의 ‘교본’이었고, 대륙정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5. 병탄의 첨병 (B)

한상일 | 최종편집 2009.09.14 16:41:47

B. 조직

좌절된 ‘정한’의 꿈을 실현하고, 일본에서의 실의(失意)를 대륙에서 보상 받으려는 대륙낭인들은 현지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행동을 위한 조직체를 만들었다. 흥아회(興亞會),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락선당(樂善堂) 등 많은 조직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정부보다 한 걸음 앞서 대륙진출의 길을 닦았고, 일본과 한국에서 한국병탄의 첨병으로 활동했다.

정한론의 열사들 단결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겐요샤(玄洋社)
일본 최초의 극단적 국가주의(ultra-nationalism) 단체라 할 수 있는 겐요샤는 1881년 조직된다. 주체세력은 후쿠오카 출신의 하급무사들이다. 그들은 막부말기에는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 참여했고, 메이지유신 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1877년 서남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규슈 일대에서 일어나는 반정부운동에 가담하면서 개인적으로 대륙웅비의 길을 모색했던 사람들이다.
겐요샤 결성의 중심인물은 세 사람이다. 광산업에서 성공한 규슈 제1의 부호인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일본 우익사의 대부이며 대아시아주의의 챔피언인 도야마 미츠루(頭山滿), 서남전쟁과 하기(萩)의 난(1876)에 깊이 관여했던 하코다 로쿠스케(箱田六輔) 등이었다.
하나같이 막말의 격동기를 살아오고 정한론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일본의 부강과 함께 대륙으로 그 영토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발기문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결성의 동기와 지향하는 목표는 이 조직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겐요샤는 우국지사의 단결이고, 애국지사의 단결이다. 그리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신의 단결이고 군국주의자의 단결이다. 천금을 가볍게 아는 의기(義氣), 천하를 짊어질 기상, 비분강개의 뜨거운 피,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 겐요샤가 태어났다.”

사진-겐요샤 3걸(傑)과 최초의 본부

 

동학봉기에 개입, 청일전쟁을 유도하는 특수활동
겐요샤는 전국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규슈에 국한한 단체였다. 또한 뒤에서 볼 수 있는 고쿠류카이(黑龍會)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거나 또는 해외웅비의 실현을 위해 일선에서 직접 활동하는데 주력을 기울인 단체는 아니다. 그 보다는 정부 내에서 대륙으로의 국권확장 지지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관계와 군부의 보수 세력과 유대를 긴밀히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해서 겐요샤가 대륙팽창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효과적인 대륙팽창을 위하여 국내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힘썼을 뿐이다.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한국에서 동학봉기가 격화될 때 청일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특수조직을 만들어 한국에 파견하여 실상을 정탐하면서 활동케 하기도 했다. 물론 한국병탄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중국대륙에서 혁명의 기운이 소용돌이 칠 때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쑨원(孫文) 등과 같은 개혁파나 혁명파를 도와 대륙에 일본세력의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멸청흥한(滅淸興漢)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국권론(國權論)의 기둥' 도야마 미츠루, 김옥균등 각국 망명객들 지원

겐요샤는 많은 국권론자,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국사(國士)’를 배출했다. 그리고 근대 일본 우익활동의 원류로서 일본의 정치·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겐요샤 출범이후 끝까지 멤버로 활동해온 도야마 미츠루(頭山滿)는 오늘에 이르기 까지 국권론의 정신적 지주로,  그리고  ‘민간 지사’의 대표적 인물로, 우익의 영원한 대표자로 추앙받고 있다. 한 번도 관직을 가지지 않았으나 ‘무관의 제왕’으로 권력 안과 밖에 많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혁명아들도 고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망명할 때는 그의 지원을 받았다. 갑신정변 후의 김옥균, ‘멸청흥한’을 꿈꾸었던 쑨원과 황싱, 인도의 스브하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필리핀의 에밀리오 아귀날도(Emilio Aguinaldo) 등 모두가 일본에 있는 동안 도야마의 지원을 받았다.

사진-1931년 일본을 방문한 인도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와 도야마 미츠루

 
겐요샤는 한국문제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병탄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해 온 겐요샤의 상층부는 때때로 병탄의 방향을 제시하고 정부의 병탄정책을 독촉하기도 했다.

 

조선진출의 찬스 '동학봉기'..일본 정부에 청일전쟁 건의
덴유쿄(天佑俠)
덴유쿄는 겐요샤가 한시적으로 조직·운영한 행동단체였다. 목적은 동학봉기로 혼란한 한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와 명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 후 한국에서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반대로 중국의 영향력이 다시 강화됐다. 그러나 일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1894년 한국의 전라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동학이라는 대규모의 민중봉기는 일본으로 하여금 열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을 반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반외세’의 깃발을 내걸었던 동학운동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외세를 불러들이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는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관계 형성의 실마리가 되었다.

동시에 정한론 이래 한국에 진출할 틈을 엿보아 왔던 병탄론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였다.
겐요샤의 지도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찍부터 부산의 오자키(大崎正吉) 법률사무소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던 대륙낭인과 겐요샤의 요원들은 동학봉기와 이로 인한 혼란이 한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적시라고 판단했다. 그들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민중봉기를 계기로 “반일 망국의 한국정부와 오랫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청나라의 세력에 철퇴를 가하고” 한국반도에 “친일정부를 세울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을 실천하기 위하여 겐요샤의 지도자들이 움직였다. 도야마 미츠루, 히라오카 고타로, 마토노 한스케(的野半介)는 외무대신을 찾아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어서 육군참모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를 예방하고 조기개전론을 폈다. “전적으로 동감”의 뜻을 표시한 가와카미는 겐요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외무대신 "일단 불을 붙이시오, 불 끄기는 내가 맡겠소"

"원래 겐요샤는 많은 인재를 포용하고 있는 대륙진출의 근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지금의 시국을 급속도로 진전시키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바다를 건너가 불을 지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겐요샤 사람 가운데 그 일을 맡아 해낼 만한 사람이 없을까요? 일단 불만 붙여 놓는다면 그 다음 ‘소화작업’은 나의 임무이니, 그것은 내가 기꺼이 이행하겠소."(藤本尙則, <巨人頭山滿翁>(1922), p.340)

가와카미가 요청하는 ‘불 지르기[放火]’가 무엇을 부추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단체의 조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도야마 미츠루에 의하면, 덴유쿄는 “한국의 동학당을 고무하여 한국에서 풍운을 일으켜 급기야는 일청전쟁의 대결전을 꾀할 수 있는 계기를 잡자는, 이른바 가와카미 장군의 ‘방화의 역할’을 하기 위한 ‘조직체’였다

덴류쿄를 해체하면서 활동을 정리하여 발표한 <덴류쿄 보고서>

 

덴유쿄는 15명으로 구성된 유격대 형태의 작은 단체였다. 뒷날 고쿠류카이를 조직하여 한국병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위시한 겐요샤의 젊은 세력과 이미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륙낭인으로 구성됐다.    
그들은 1894년 6월 하순에 부산에 도착한다. 그 후 그들은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3개월 동안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사태의 흐름을 정탐하고, 소요를 일으키고, 폭력을 감행하는 게릴라식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활동이 청일전쟁 발발에 직접적으로 어떻게 또 얼마나 작용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과장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청일전쟁의 “불 지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덴유쿄는 해체했으나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일본군대의 정보원으로 한국에 남아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러일전쟁 후 다시 모여 한국병탄의 완성을 위하여 활동하게 된다.

대륙경영-한국병탄의 최전선 부대

고쿠류카이(黑龍會)
근현대 일본사에서 대표적 국권주의 단체로서 고쿠류카이를 내세우는 데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단체는 대륙을 향한 일본의 국력확장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나라 안팎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한국병탄을 위해서도 최전선에서 길을 열어나갔다.
고쿠류카이는 1901년 결성됐다. 주도자는 덴유쿄에 직접 참여했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그는 죽을 때까지 회두(會頭)로서 이 단체를 이끌면서 우익진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쿠류카이’라는 이름은 흑룡강(Amur River)에서 유래한다. 시베리아와 만주 사이를 흐르고 있는 흑룡강을 중심으로 대륙경영의 대업을 이룬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일본의 국력을 대륙으로 팽창하여 흑룡강까지 지배의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는 희망과 각오의 뜻을 담고 있다.
창립취지문은 이 단체의 성격과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취지문에 의하면 동아시아는 서양의 아시아 잠식이라는 “세계 역사상 미증유의 중대한 비상시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비상시국을 타개하고 아시아를 이끌어야만 할 능력과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본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시아의 실정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아시아의 오지를 누비고 다니면서 그곳의 세태를 수집하고 분석한 대륙낭인들이 한데 모여 대륙의 사정을 널리 알려 “모든 사람의 각성”을 촉구할 필요가 있었다. 고쿠류카이 결성의 일차적 목적은 ‘대륙문제’에 대한 국민계몽이었다. 그럼으로써 “황국의 백년대계의 틀을 튼튼히 하고 만리웅비의 길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장백산의 바람으로 저녁 지어먹고..요동의 들판 장막에서 밤을 지새우며..."
고쿠류가이는 겐요샤처럼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도 않았고, 또한 덴유쿄처럼 한시적인 단체도 아니었다. 물론 그 뿌리는 겐요샤라고 할 수 있지만 조직의 지도층이나 일반회원 모두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또한 취지에 동조하는 회원들을 꾸준히 영입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쿠류카이는 전국적이고 대중적이며, 또한 일반에게 공개된 조직이었다.
고쿠류카이가 활동은 다양했다. 결성하면서부터 <흑룡(黑龍)>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대륙의 사정’을 일반인들에게 전달했다. 물론 시기에 따라 관심부분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동아시아 전반의 실태를 알리는 한편, 초기에는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발전, 그리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05년 고쿠류카이가 한국병탄 프로젝트에 직접으로 뛰어들기 전까지는 러시아, 중국, 만주, 몽고, 한국의 사정을 일본사회에 전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흑룡강변에서 노숙하고, 장백산의 바람으로 저녁을 지어먹고, 요동의 들판에 세운 장막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얻은 그 지역의 풍속과 인정”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등의 지도를 발행하여 그 지역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또한 간다(神田)에 흑룡어학교(黑龍語學校)를 열고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고쿠류카이는 1902년 후쿠오카와 교토에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 활동범위를 해외, 특히 한국으로 넓히는데 주력했다. 한국의 사정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대구에 비룡상회(飛龍商行)라는 사무실을 열어 거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1903년에는 고쿠류카이의 해외본부를 부산에 설립하고 많은 회원들이 상주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다. 월간지의 발행소도 도쿄에서 부산으로 이전했다. 이 조직은 1905년부터 1910년 까지 한국병탄과정에 깊숙이 관여하여 한국의 지배계층과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을 넘나들며 병탄성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6. 병탄의 첨병(C)주역들

한상일 | 최종편집 2009.09.15 10:57:17

 

일본정부 고관, 외교관, 군부등 총출동
C. 인물

일본의 한국병탄에는 많은 인물들이 관여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위시한 관리, 무츠 무네미츠(陸奧光宗)와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포함한 외교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가츠라 타로(桂太郞)가 이끄는 군부, 시부사와 에이이치(涉澤榮一)로 대표되는 재계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물들이 ‘병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음모와 조작의 명수’로 알려진 한국주둔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本次郞)가 확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민간 지사의 헌신적 활동”이 없었다면 병탄 프로젝트는 실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지연됐을 것이다. 아카시가 지적하고 있는 ‘민간 지사’는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의미하고 있다.

 

거무줄을 팔방으로 친 막후의 거대한 그림자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병탄의 막후 조종자
‘정계상층부를 자유롭게 드나든 저명한 정치낭인’, ‘정계를 유영(遊泳)하는 책사’, ‘정보의 집결소’, ‘흑막의 인물’, ‘지사’ 등으로 알려진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정계의 막후 인물로서 역사적 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의 한 외교사학자는 스기야마를 가리켜 “얼굴을 숨기고 도쿄[帝都] 중앙에 뿌리를 내려 때로는 거미처럼 지하로 잠적하고, 때로는 토굴을 나와 거미줄을 팔방으로 넓히고, 천하대사가 있을 때마다 항상 무대 뒤에 숨어서 능숙하게 많은 것을 조종하고 해결”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일청전쟁에서 시작하여, 러시아의 대전을 거쳐, 한국병합을 만들어 내기까지 최근 20년의 역사에서 오직 무대 전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만 보았지, 배후에서 이들을 움직이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는 보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바로 스기야마 시게마루다.
그는 “공명이 안중에 없고, 허영의 질곡에 초연”하며, 제국 건설을 보지 못하고 “한을 품고 세상을 하직한 지사”들을 위로하고 나라의 부강만을 탐하는 철저한 국권확장론자였다. 그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지배해야하고, 이를 위해서 민관군은 힘을 합쳐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스기야마는 유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후쿠오카의 집에 학교[家塾]를 열고 젊은이들을 가르친 그의 아버지는 미도(水戶)학파의 유학자로서 철저한 근황파(勤皇派)에 속했다. 시게마루는 아버지 밑에서 한학과 국학을 공부했으나, 근대적 교육을 받은 흔적은 없다. 1880년부터 도쿄와 후쿠오카를 오가며 “사방의 지사들과 교류”하면서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83년부터는 한국의 부산, 인천, 한성을 내왕하고, 김옥균, 송병준 등과도 교류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륙낭인과는 달리 그는 ‘서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자주 돌아보았다. 그는 여행을 통해서 견문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지식’을 몸으로 터득했다.

독학-여행..세계를 누빈 거구의 '해결사'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체구(키-6척, 몸무게-82kg)를 지닌 스기야마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대륙낭인이 국내적 지지 기반이 약한 것과 달리, 그는 각 계의 중요 인물들과 긴밀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대의 최대의 권력자인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물론, 정계, 관계, 재계, 군부의 거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근대적 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과 여행을 통하여 살아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영어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1888년 이후 일 년에도 몇 차례씩 홍콩을 오가며 영국의 재정운영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1897년 이후에는 미국도 자주 내왕했다.  또한 빠른 판단력과 추진력을 가진 그는 ‘해결사’로서의 천부적 자질을 갖추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0년 처음으로 정당(정우회) 내각을 꾸리면서 스기야마에게 경시총감의 자리를 권유할 정도로 그의 능력을 평가하고 신뢰했다. 물론 스기야마는 고사했다.

스기야마는 대륙낭인의 대부인 도야마 미츠루로부터 많은 영양을 받았다. 그와 함께, 또는 그의 지시를 받아서 크고 작은 많은 사건을 막후에서 조종했다. 그는 도야마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후배였고, 두 사람의 관계는 ‘물과 고기’와 같았다.

도야마 미츠루와 스기야마 시게마루(왼쪽).

 

스기야마도 겐요샤의 중요한 회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직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했고,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재계나 정부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 만주, 대만, 홍콩, 미국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공식 직함 없이 일본흥업은행 창립, 대만은행설립, 경부철도회사 설립, 만철 설립과 운영, 철도국유화 등과 같은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러일전쟁 당시에는 가츠라 다로(桂太郞)수상의 요청을 받아 루즈벨트 대통령과 동문수학한 가네코 겐타로와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모건회사(J.P. Morgan)회사로부터 차관을 얻어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구입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본격적인 한국병탄을 위하여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본 최대의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다. 스기야마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고쿠류카이의 우치다 료헤이를 이토의 막료로 추천했다. 그리하여 스기야마는 도쿄에서, 우치다는 한양에서 병탄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는 계기를 열었다. 그 후 1910년 병탄이 완성되기까지 그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원로와 중신, 그리고 군부를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고문으로서 병탄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국병탄 후 그는 죽을 때까지 만주와 시베리아로 국력확장을 위하여 진력했다.

 

평생을 한일병탄에 바친 '정한론의 괴승'
다케다 한시(武田之範): 일진회 조종자
일진회는 일본의 한국병탄을 앞장 나서서 주장한 당시 가장 큰 한국인 민간단체였고, 이용구(李容九)가 그 회장이었다. 일진회로 하여금 ‘합방’을 주도하도록 나서게 한 배후에는 승려 다케다 한시가 있었다. ‘괴승’, ‘걸식방주’, ‘대화상’으로도 불리는 다케다는 그의 생애 최대의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국병탄의 큰 몫을 담당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다케다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나가오카(長岡)의 조동종(曹洞宗) 전문학교에서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했다. 뒷날 그는 조동종의 명찰이고 호쿠리쿠(北陸) 지방에서 가장 큰 현성사(顯聖寺)의 31대 주직(住職)을 맡았다. 다케다가 10년 동안 사찰을 운영하는 동안 사세는 크게 성장했다.

일진회 조종자 승려 다케다 한시

 

다케다는 1863년 구류미(久留米)의 하급무사 사와시 고(澤之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 그의 아버지가 반정부운동에 연류 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그래서 그의 나이 10살에 아버지의 친구이면서 의사인 다케다(武田貞祐)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다케다’의 성을 취했다.
불우한 그의 소년시절은 그로 하여금 10여 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게 만든다. 1881년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난 다케다는 일본 전역을 유랑하면서 사찰을 전전했다. 1883년 현성사에 정착하여 출가하면서 불교 수업에 힘을 쏟았다. 동시에 다케다가 아시아 문제, 특히 한국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케다가 이웃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직접적 연유가 무엇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방랑시대의 친구’인 세키 쇼기치(關常吉)가 여러 차례 한국의 실상을 설명하면서 ‘정한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다케다에게 설명했다. 다케다와 같은 나이의 고향친구인 세키는 뒷날 고쿠류카이의 회원으로 한국병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892년 현성사에서 하산한 다케다는 그 후 상당기간 포교활동보다 사업에 몰두했다. 규슈, 대마도, 부산을 넘나들면서 산림, 개간, 어업 등과 같은 사업을 통하여 ‘일획천금’을 꿈꾸었다. 다케다가 당시 전라남도 순천 앞에 있는 금오도(金鰲島)에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있었던 이주회(李周會: 을미사변당시 명성황후 시해의 한국 측 주범)와 연결되면서 일본측 자본과 어부를 끌어 들여 대대적인 어로사업을 벌렸다. 목적은 보다 활발하고 튼튼한  ‘활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한국의 실정을 몸으로 배웠고 또한 이주회 등을 비롯하여 많은 한국인들과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시나리오에 깊이 개입

다케다가 한국에 머무르기 시작한 1892년 이후 한국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동학운동, 청일전쟁, 삼국간섭, 민비시해, 아관파천 등의 사건이 계속됐다. 이 격동의 시대에 다케다는 한국에서 활동했다.

사업에 실패한 다케다는 일본으로 돌아가기보다 ‘조선낭인’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부산의 오자키(大崎正吉) 법률사무소를 근거지로 하고, ‘채권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경성, 경상도, 전라도 등을 여행했다. 전라도에서의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겐요샤가 청나라와의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방화역’으로 조직한 덴유쿄의 일원으로 행동에 참가했다. 그 후 덴유쿄가 해체되면서 다케다도 귀국하여 다시 현성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산사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삼국간섭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희망에 부풀었던 일본의 꿈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한국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일본도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그 ‘비상대책’은 한국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민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비상대책을 실행할 인물로 미우가 고로(三浦梧櫻)를 선정하고 새 공사로 임명했다. 다케다는 1895년 가을 미우라의 고문격인 정치 소설가이면서 중의원 의원인 시바 시로(柴四朗)의 요청을 받고 현성사에서 내려와 미우라를 동행하여 다시 경성으로 향했다.
경성에 도착한 다케다는 당시 군부협판의 자리에 있던 이주회와 협력하면서 민비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민비시해 후 미우라, 시바 등과 함께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잠시 구속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고, 그 후 정식재판에서도 무죄로 풀려났다.

다케다가 민비시해 사건에 관여함으로서 대륙진출론자나 조선낭인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과 지위가 크게 올라갔다. 특히 미우라 고로, 시바 시로, 다케다 한시 세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더욱이 불교에 심취돼 있는 미우라는 다케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896년 현성사로 돌아온 다케다는 현성사의 말사(末寺) 동림사(東林寺)의 주지로 자리를 잡았다. 동림사를 운영하면서도 다케다는 미우라 고로의 요청에 따라 민비사건에 연루된 한국 훈련대의 우범선, 이두황, 구연수, 황철 등에게 망명처를 제공하고 그들의 신변 보호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림사 주지로 있으면서 다케다는 현성사 사세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다케다는 미우라와 시바의 지위를 활용하는 등 “권력밀착의 특기를 발휘”하여, 현성사 주변의 국유림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관할 영역을 확장했고, 본당을 중축하고, 포교를 확대하는 등 교세를 넓혔다. 점차 교단 내에서 다케다의 지위와 발언권이 강화됐다. 1901년에는 드디어 현성사 31대의 주지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현성사와 같은 대찰의 주지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이용구 상대역..우치다와 2인3각

우치다 료헤이가 고쿠류카이를 결성할 당시 다케다도 그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결성 당시 축시도 전했고, 그 후 기관지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직접 활동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다케다 한시가 우치다 료헤이와 함께 ‘한국문제’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우치다와 함께 1906년 9월 다시 한국을 찾으면서 부터다.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에 의하여 통감부의‘촉탁’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경성에 부임한 우치다의 역할은 일본의 한국병탄을 “한국인에 의한 합방”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사정을 조사한 우치다는 일진회가 이 역할을 담당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체라고 판단했다. 또한 ‘동학’이라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상대역으로 다케다 한시가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우치다와 다케다는 ‘한국병탄’이라는 문제를 놓고 다시 의기투합했다. 다케다는 현성사의 주지 자격으로 한국을 넘나들면서 조동종을 포교하면서 병탄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했다. 특히 그는 이용구를 설득하여 한국병탄에 앞장서도록 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 냈다.

 

냉철하고도 치밀한 리얼리스트..20세부터 6년간 준비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병탄 프로젝트의 총지휘관
우치다 료헤이는 대륙낭인 2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메이지 초기 일본 사회에 충만해 있던 ‘해외웅비의 꿈’을 체계적인 팽창주의 이론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의 구체적 실천을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최전선에서 강력하고도 조직적인 활동을 이끌었다. 그에게서는 초기 대륙낭인의 세계에서 볼 수 있었던 감상주의나 낭만주의의 색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일본의 대륙팽창을 위한 계획을 세웠고, 냉철하고도 치밀한 계산 아래 조직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일본의 세력을 대륙으로 팽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대륙웅비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한국병탄의 일등공신이다.
우치다는 후쿠오카의 한 하급무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후쿠오카 일대에서 이름난 검객이었던 아버지는 메이지 유신을 지지하여 이의 성공을 위하여 전쟁(戊辰戰爭, 1867)에 참여했다. 정한론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정한파가 주도한 사가(佐賀)의 난과 서남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메이지 체제가 안정된 후에도 겐요샤 결성에 앞장서는 등 ‘정한’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우익활동에 동참했다.

한일병탄의 총 지휘관 우치다 료헤이.

 

그러나 우치다 료헤이는 어려서부터 숙부인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밑에서 성장했다. 광산업으로 성공한 규슈 제1의 부호이기도 한 히라오카는 자신의 부를 일본의 대륙확장을 위하여 투자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중국대륙과 한국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많은 대륙낭인들을 지원했고, 겐요샤가 결성되면서 초대 회장직을 맡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의원으로 정치권에 진출하여 의회 내에서 겐요샤와 같은 노선을 지향하는 단체나 정치인에게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히라오카의 직접적 지원을 받는 동안 우치다는 글과 칼을 함께 배웠다. 숙부의 지도에 따라 그는 날마다 겐요샤의 체육관에서 검술과 유도를 익혔다. 또한 가정교사를 통하여 중국의 고전, 일본외사, 18사략 등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히라오카 곁에서 밤늦도록 흔들거리는 촛불 밑에서 논의하는 국권론자들의 대륙웅비의 경륜을 듣기도 했다. 우치다의 표현을 빌리면 히라오카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칼로 4백여주의 중국대륙을 석권하려는 기개를 가진 지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사귐은 나에게 대륙을 향한 웅지”를 심어주었다.
우치다의 나이 20세가 되면서 히라오카의 직접적 후견에서부터 자립하게 된다. 그는 독자적으로 활동 노선과 방향을 정했고, 대륙낭인의 세계에서 점차 명성을 축적해 나갔다. 첫 해외에서의 활동은 청일전쟁의 ‘방화’역이었던 덴유쿄에서의 행동이었다.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후 그는 히라오카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도도장을 열고 활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3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간도를 위시한 그 일대를 조사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그의 도장은 대륙낭인과 군 첩보원들의 활동 본거지가 됐다.
우치다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생활을 통해서 러시아의 ‘실체’가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보다 정확한 러시아의 실상을 알기 위하여 1897년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긴 ‘조사여행’을 단행했다. 1년 가까이 걸린 이 여행의 결과로 우치다는 그 당시 일본사회에서 러시아 문제에 가장 정통한 인물로 부상했다.
6년에 걸친 한국, 간도,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등의 해외활동을 통해서 쌓아 올린 그의 업적으로 우치다로 하여금 국권주의자로서의 위상과 대륙낭인 세계에서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는 보다 구체적 활동을 위한 기반으로서 고쿠류카이(黑龍會)를 결성하게 이르렀다.

이토 히로부미의 '촉탁'..민간파트 총사령관
러일전쟁이 종식되면서부터 우치다는 한국병탄이라는 과업수행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촉탁으로 한국에 머무르면서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통해서 일본 내 병탄 강경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한 군부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케다 한시로 하여금 일진회가 일본의 ‘합방’을 지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도록 조정했다. 우치다는 일본의 한국병탄이라는 프로젝트의 한 가운데서 기획하고 조정한 중심인물이었다. 우치다 료헤이가 없었다면 병탄이 상당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아카시 모토지로의 회고담은 결코 의미 없는 말이 아니었다.

 

 

 

7. "러시아 품속의 한국을 빼앗자" 인천 러함대 기습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0.07 12:00:39

 

7. 절반의 병탄: 을사강제조약(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20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의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한반도가 놓여 있었다. 한반도의 주도권 장악을 놓고 일본, 중국, 러시아 사이에 불꽃 튀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19세기를 마감하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세계의 중심국가라는 ‘중국’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일본은 아시아 지배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대륙으로 뻗어 나갈 ‘징검다리’인 한반도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를 놓고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 힘을 겨루었다. 20세기의 첫 날인 1900년 1월 1일의 <지지신보(時事新報)>는 중국대륙에서의 세력 부식과 한반도 지배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국을 개방시키고 조선을 개척해야할 사명"

"일청전쟁의 결과 다음으로 조약개정을 완수하여, 우리나라도 드디어 세계강국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지난 겨울이후 안과 밖에서 일로개전(日露開戰)의 소문이 들려오고 있다.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나 결코 이를 일소(一笑)에 붙일 일은 아니다....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중국의 형세를 살펴볼 때, 세계문명제국의 방침은 중국의 전토(全土)를 개방하여 각자 스스로의 상공업상 이익을 거둘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은 다행스럽게도 중국의 동쪽에 가깝게 접하고 있어 개방의 이익을 취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위에 있다. 일본은 중국 개방의 솔선자로서 보다 커다란 이익을 취하려는 각오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조선이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동시에 우리 상공업의 이해와 크고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은 모든 열강도 인정하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 일본인은 정상의 범위 안에서 조선을 유도하고 개척하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책임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明治三十三年を迎ふ”) 

일본은 중국에서 ‘보다 큰 이익’을 취해야 하고, 한국을 ‘유도하고 개척’하여 지배의 토대를 굳혀야 했다.

한반도(COREE)를 지배하기 위한 3국경쟁, 일본 중국 러시아의 각축을 상징하는 만화 '낚시놀이' (TOBAE, 1887.02.15)

 

와신상담 10년..영일동맹부터 맺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는 듯 했다.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의 결과로 중국은 한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했다. 오랜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랴오둥(遼東) 반도와 타이완(臺灣), 펑후(澎湖) 열도를 전리품으로 취하고, 2억량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냈다. 총리대신으로 전쟁을 이끌고 또한 시모노세끼조약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표현에 의하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국운이 뻗고 나라의 위광을 드러내는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환희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남진정책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등에 업고 일본이 대륙진출의 거점으로 확보한 랴오둥반도를 다시 중국에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목구멍으로 넘어갔던 랴오둥반도를 토해 내야만 했다. 이른바 1895년의 삼국간섭이다.

청일전쟁후 중국이 한국을 포기한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의 현장인 슌판로(春帆樓), 협상당사자인 일본의 무츠 무네미츠(陸上宗光, 오른쪽위)와 중국의 리홍장(李鴻章)

 

민비시해-아관파천.."다 잡은 한국을 잃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전쟁을 통해서 획득한 한국에서의 우월권도 위협했다. 특히 ‘국가적 범죄(national crime)’라고 할 수 있는 명성황후 시해(1895)와 이어서 전개된 고종황제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俄館播遷, 1896)은 일본이 그동안 가까스로 확보했던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의 표현을 빌리면 이 사건을 계기로 “절대적인 패권으로 조선을 휘어잡은 지 2년 만에 일본은 평소 두려워 해 온 라이벌인 러시아의 벌려진 품속으로 조선의 국왕을 던져버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는 한국 조정에서 친일파를 몰아내고 친러파를 등장시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러시아의 세력 확대는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삼국간섭 후 만주에서도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해 나갔다. 일본의 전리품이었던 랴오둥반도의 뤼순(旅順)과 다렌(大連)을 오히려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25년 간 조차하여 이곳을 극동팽창의 전진기지로 개발했다. 숙원의 부동항을 확보한 것이다. 러시아의 세력이 확대되면 될수록 일본은 불안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은 10년 동안 ‘와신상담’하면서 전쟁을 준비했다. 군사력을 보강하는 한편, 외교를 통한 국제적 지지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1902년의 영일동맹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강화했다. 이 동맹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전제하고 체결됐다. 동맹 완성의 주역 하야시 다다스(林董)에 의하면 “일영동맹이 없었다면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반도의 러일전쟁..만주 점령후 '무적의 발틱함대' 완파

선전포고 이틀 전인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의 연합함대가 인천과 뤼순 외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전황은 일본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유리하게 전개됐다. 1904년 5월에는 제1군이 압록강을 넘어 쥬렌청(九連城)을 점령하고, 제2군이 랴오둥반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6월에는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9월에 랴오양(遼陽)을, 그 다음해 1월에는 뤼순, 3월에는 펑텐(奉天)을 점령했다. 그리고 5월에는 쓰시마 해협에서 무적의 발틱 함대를 수장시켰다. 승리의 기선을 잡은 것이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역들--왼쪽부터 위테, 로젠 러시아대표, 루즈벨트 미국대통령, 고무라, 다카이하라 일본대표.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은 점차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 들었다. 전쟁초기 러시아가 수세에 몰렸던 것은, 타임스(The Times) 기자가 “러시아는 저녁을 위해 싸웠고, 일본은 생명을 걸고 싸운 것”이라고 비유해서 설명했듯이,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러시아는 혼잡한 내정문제를 뒤로 미루고,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하여 병력과 전쟁 물자를 전선으로 수송하면서 전력을 계속 증강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투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전선으로 보급하는 데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황은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됐다. 만주군총사령관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가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비밀리에 도쿄를 찾아와 전선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불을 붙였으면 끌 시기 또한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책결정자들을 몰아붙였다. 도쿄 정부, 대본영, 전선의 전쟁 지휘관 모두가 조기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제3국의 간섭 막아라" 청일전쟁 교훈 살린 외교전 승리
외교전쟁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전장(戰場)에서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외교에서의 승리가 더욱 돋보인다. 삼국간섭의 쓰라림을 맛본 메이지의 지도자들은 러시아와의 전쟁과 강화조약에 강대국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이는 랴오둥반도의 반환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터득한 국제정치의 교훈이었다. 국민사학자로 인정받는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앞 차(시모노세키조약)의 뒤집힘이 뒤차(포츠머스조약)에 훈계”가 됐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탐색했다. 그리고 전쟁 터지면서 강화를 준비했고, 러시아를 지지하는 세력이 전쟁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입체적 외교 노력을 폈다. 1902년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서 일본은 제3국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어전회의에서 전쟁을 결정한 바로 그날 일본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를 미국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스에마츠 겐쵸(末松謙澄)를 영국으로,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를 미국과 영국으로 파견했다. 전쟁 내내 미국과 영국에 체류한 그들의 역할은 두 나라 국민들에게 러시아의 침략성과 일본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특히 하버드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동문수학한 가네코는 “미국에 부임한 이래 시종 루즈벨트 대통령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적절한’ 시기에 중재를 당부했고, 루즈벨트로부터 “일본을 위해 적절한 시기에 최선을 다해 주선의 역할에 나서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일본으로부터 ‘거중조종’을 요청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5년 6월 9일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에게 강화조약을 위한 협상을 권고했다. 그리고 8월 10일부터 포츠머스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전쟁의 근본원인이고 오랜 숙원사업인 한반도 지배권 확보를 위하여 외교적 노력을 일층 강화했다.

3대강국 승인아래 공개적 한국병탄 작업 박차
일본의 반도 지배권 승인은 미국으로부터 시작됐다. 1905년 여름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William Taft) 육군 장관은 가츠라(桂太郞) 수상과 한반도 지배권에 관한 밀약을 맺었다. 7월 29일 작성된 이 비밀각서에 의하면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과”라고 승인했다. 일본의 한국지배를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1905년 8월 12일 런던에서 개정된 제2차 영일동맹에서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 및 경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고, 이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일본은 필요한 지도, 감리 및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영국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한 것이다. 그리고 9월 5일 조인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및 경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한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러시아도 한국 지배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인정했다.

태프트-가츠라 비밀협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서 일본은 한국 지배권을 미국, 영국,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다. 이제 일본은 강대국의 승인 아래서 한국병탄을 공개적이고도 강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8. 이토, 조정에 300만원 뿌려..."대궐은 총칼의 숲"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0.07 11:58:15

 

8. 절반의 병탄: 을사강제조약(하)

군사협력 의무화 <한일의정서> 강요
강대국으로부터 한국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에게 남은 과제는 한국을 요리하는 것이었다.
미국이나 영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적 노력과 달리, 한국에 대하여 일본이 취한 행위는 군사력을 앞세운 억압과 위협이었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야시 곤스케(林勤助) 특명전권공사는 한국의 ‘군사적 협력’을 의무화하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했다. ‘군사적 제압’ 아래서 이루어진 이 <의정서>에 의하면 일본은 한국 내 어디서든지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점유”할 수 있게 됐다.
조약체결 직후인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위문특파대사라는 직함으로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한국을 방문했다. 전쟁 중 나타날 수도 있는 한국의 독자적 행동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명목은 친선이지만 실제로는 위협이었다.
이토는 세 번 고종을 알현했다. 3월 20일 두 번째 알현에서 그는 한국이 “일본과 존망을 함께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협력한다면 일본은 최대한의 동정을 표명해 영구히 한국의 산과 강이 횡포한 열강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도록, 즉 일본 자신의 존망과 마찬가지의 아픔으로 순치보거의 관계로 함께 대처”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보호국화를 시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보호국' 방침 공식화..외교-재정권 박탈
일본 정부는 원로회의와 내각회의를 거쳐 5월 31일 <대한(對韓)방침에 관한 결정>을 확정했다.  “제국은 한국에 대해 정치·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장악하고, 경제적으로 가일층 일본의 이익을 도모한다.”라고 시작하는 이 <결정>은 한국에서 일본이 취할 군사, 외교, 교통, 통신, 척식의 기본정책을 확정하고 있다.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정부의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 <결정>에 기초하여 8월 22일 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국인 외교고문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한 <한일협약>에 도장을  찍었다. 외교와 재정권을 빼앗긴 한국은 이미 주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1905년 4월 8일 일본 내각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고, 한국의 대외관계를 장악”하기 위한 “보호조약 체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10일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0월 27일 내각은 보호권확립과 실행을 위한 구체적 방법과 절차를 확정했다. 즉 외교권 박탈,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 사전 통고, 11월초 실행, 조약교섭의 전권을 하야시 공사에게 위임,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한국주둔군사령관에게 협력명령, 일본군대의 서울집결, 한국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보호권 설정을 한국에 통고한다는 단계적 수순과 구체적 방침을 확정했다.

고종황제 "한국이 아프리카 열등국이란 말이오?"
치밀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집행만이 남았다.

일본 정부는 협상대표는 하야시 곤스케 공사로 하지만, 한국 황제를 설득하고 압력을 가하기에는 함량미달이었다. 보다 거물급 인물이 필요했다. 이미 고종을 몇 차례 알현했고, 일본 정계의 최대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또다시 특파대사로 임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9일 한성에 도착했다. 10일 경운궁의 수옥헌(漱玉軒)에서 고종을 알현하고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15일 다시 하야시 공사를 대동하고 고종을 알현하여 외교권 위임을 핵심으로 하는 협약 초안을 제시했다. 이토가 귀국하여 천황에게 제출한 복명서(<韓國特派大使伊藤博文復命書>)에는 고종황제와의 대화록 (伊藤特派大使內謁見始末)이 들어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종은 먼저 그동안 자신은 “나의 신료들에게 의존”한 것 이상으로 이토를 신뢰하고 의존했다는 뜻을 전하면서, 초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경이 제시한) 이번 사명의 기초, 소위 외교위임과 같은 것은 (한국이) 형식조차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서, 필경 이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관계와 같은 것이오? 아니, (한국이) 최열등국, 예컨대 열강이 아프리카를 대하는 것과 같은 지위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오?”   
이토는 고종이 협약의 참 뜻을 오해하고 있고, 협약의 본뜻은 한국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다시 설명했다.  
“히로부미(博文)는 폐하의 특별한 대우에 늘 황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역시 폐하의 황실과 나라를 위해서 제안하는 것입니다. 폐하를 속이고 일본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헝가리에는 황제가 존재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는 각각 군주가 있고 독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에 이르러서는 독립국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일한관계에 인용하고 비교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치 않습니다. 다만 동양화란(東洋禍亂)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본은 한국의 위임을 받아 외교를 담당할 뿐이고, 그 외의 모든 국정은 지금과 같이 한국 스스로가 이끌어 가게 될 것입니다.”

고종 "형식만이라도 권한 남겨주오" 애원 되풀이

고종은 비록 그것이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싶었다.
이토에게 다시 청했다.
“그 내용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거절하지 않겠지만, 다만 형식적으로라도 한국에 권한을 남겨주기 바라오. 이를 위해 경의 알선과 진력을 기대하오. 짐의 이러한 절실한 희망에 경의 충분한 고려를 더하여 귀국의 황실과 정부에 전달한다면 다소 변경을 이룰 수 있지 않겠소?”

복명서는 “이와 같은 폐하의 애소적(哀訴的) 정실담(情實談)이 여러 차례 반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이 결정은 일본정부가 모든 것을 고려하여 내린 것입니다. 추호도 변경할 여지가 없는 확정안입니다...폐하의 결정만 남았습니다. 이를 수락하든 거부하든 이는 폐하의 뜻입니다. 만일 폐하가 거부해도 그대로 시행하기로 한 것이 일본의 결정입니다. 거부할 경우 한국의 지위가 대단히 어려워 질 것입니다. 한층 더 불리한 결과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과 더 이상 이토와의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고종은 최종결정을 신하와 국민의 뜻에 미루었다.
“짐도 이처럼 중대한 일을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소. 짐이 정부신료에게 자문[諮詢]을 구하고 또한 일반인의 의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오.”

이토 "국민선동하여 반항하면 안됩니다"

이토는 냉담한 태도로 답했다.
“폐하가 정부 대신들의 자문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저 역시 오늘 폐하의 결정을 요구하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인민의 의향을 살핀다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奇怪千萬]일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헌법정치가 아닌 모든 것을 폐하가 결정하는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 인민의향 운운 하지만 실은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하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고, 그 책임이 폐하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이미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일본 군대가 탐지하고 있습니다.”   고종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 2시반 조인.."대궐은 총칼의 숲이었다"
조약은 18일 새벽 2시 반에 조인됐다. 그때까지 이토 대사, 하야시 공사, 하세가와 사령관은 각각 정부의 대신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회동하고 협박, 위협, 회유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특히 17일 이토가 하세가와 사령관을 대동하고 입궐하여 대신들을 하나씩 불러 개별적으로 면담할 때 일본 군대가 궁중의 안팎을 포위하여 긴장감을 고조시켰다.『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당시의 분위기를 “일본군들이 대궐에 들어와 철통같이 수옥헌을 포위하고 총칼을 수풀처럼 늘어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영국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현장을 지켜본 멕켄지(F.A. McKenzie)에 의하면 “하루 종일 일본군 총검의 덜거덕거리는 소리만 귀에 쟁쟁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특사가 군대를 이끌고 궁중까지 들어와 국왕과 대신을 위협하면서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의 생명이 다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토, 300만원 가져와 뿌려.."을사오적은 갑자기 부자 되다"

일본에 포섭된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박제순(朴齊純), 이완용(李完用), 권중현(權重顯) 등 다섯 대신이 조약체결에 찬성했다. 그들은 한국역사에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기록되고 있다. 『매천야록』은 그들의 ‘매국’을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박문(博文)이 이번에 올 때에 금 삼백만원을 가지고 와서 정부에 두루 뇌물을 돌리며 조약을 성립시키려했다. 여러 역적 가운데 조금 약은 자는 그 금으로 농장을 넓게 마련하고 시골에 돌아가서 편히 쉬었으니, 권중현 같은 자가 그렇게 하였다. 근택과 제순 등도 또한 이 금으로 인해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껍질만 남은 나라 "대한제국은 이날로 멸망하였다"
조약의 실체
“한국의 부강지실(富强之實)이 인정될 때까지” 조약이 유효하다는 소위 ‘을사보호조약’(한일협약, 또는 제2차한일협약)은 5개 조문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의 외교사무 일체를 일본이 감리지휘 한다는 것, 한명의 통감이 황제 직속으로 서울에 주재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 황제의 안녕과 존엄을 보증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는 다만 외교권의 박탈이 아니었다. 장지연(張志淵)이 “오 슬프고 분하다. 우리 2천만 노예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기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럽게 멸망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 슬프고 슬프도다. 동포여, 동포여”(是日也放聲大哭)라고 곡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조약은 민족사의 종식을 의미하고 있었다.

'국책 2000년 숙원 달성" 일본천황은 이토를 치하

조약체결이 완료됐다는 소식이 도쿄정부에 전달되자 외무대신을 겸하고 있는 수상 가츠라 다로(桂太郞)는 19일 이토에게 “각하의 진력으로 협약이 속히 체결된 것을 경하 드리며 [정부는] 이에 깊이 감사”드린다는 전문을 보냈다. 다음날에는 “짐은 경의 깊은 노고에 크게 치하[嘉賞]”한다는 천황의 ‘칙어(勅語)’가 전달됐다. 이어서 20일 일본정부는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모든 나라에게 조약사실을 통보하고, 한국과 관련된 일체의 외무업무를 일본이 담당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로써 일본은 하야시 공사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동안 고심해 온 대한국책 2000년의 현안을 완성”했다.

고종 "통감으로 다시 와주기 바라오" 이토에게 당부
업무를 완수한 이토는 29일 귀국길에 오른다.

그 전날 귀국인사차 궁중을 찾아온 이토에게 고종은 “경의 머리를 보니 흰 머리칼과 검은 머리칼이 반반씩이구려. 백발은 그동안 일본황제폐하를 보필함에, 한 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한 징표이겠지요. 나머지 검은 머리칼이 희어질 때까지 짐을 위하여 마음을 열고 성심성의껏 힘을 다해주기 바라오[啓沃의 勞]”라고 정담을 보냈다. 그러면서 고종은 “짐은 경이 통감으로 다시 서울에 오기를 간절히 바라오.”라고 당부했다. 을사강제조약 조인 과정에서 협박과 수모를 당한지 열흘 후다. 고종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름 할 수 없다. 고종의 당부가 외교적 발언일까? 모르는 사람이 통감으로 오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토가 낫다는 판단에서일까? 아니면 마음 한 구속에 이토에 대한 어떤 친근한 정이 있어서일까? 그러나, 뒤에서 볼 수 있듯이, 고종은 이토에게 ‘啓沃의 勞’를 당부한지 16개월 만에 그의 강압에 밀려 결국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성공을 기념하며, 이토 히로부미(오른쪽)와 하야시 공사.


"병탄 완결할 사람은 이토뿐" 한국통감으로 부임
일본정부는 12월 20일 통감부의 관제를 발표하고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임명했다.

한국은 물론 서양제국을 상대하면서 ‘병탄’이라는 막중한 통감의 임무를 수행해낼 수 있는 인물은 경력이나 능력으로 이토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데 이론이 없었다. 이토는 한국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지휘권 장악을 조건으로 통감직을 수락했다. 통감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군부의 간섭이나 관여를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일본군은 천황 직속으로 다른 문민은 지휘할 수 없는 특수한 영역에 존재했다. 실질적 통수 책임자인 참모총장이 천황의 칙명을 받아 지휘하게 돼있다. 일본군이 군부의 영역을 벋어나 문민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토에게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은 한편으로는 한국병탄의 과업이 그만큼 중대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토의 위세가 당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