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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의 한국에 가다 17,18,19..송병준, 일본 수상과 '한국 병합' 가격 흥정..한국병탄에 투입된 경비는 3천만원뿐

구름위 2015. 10. 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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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송병준, 일본 수상과 '한국 병합' 가격 흥정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1.25 13:14:17

17. 우치다 료헤이와 '反이토' 캠페인

일본 정계-언론계 "특단조치 필요한 시기 다가온다"
헤이그 사건이후 일본에서도 통감부의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겐요샤(玄洋社)나 고쿠류카이(黑龍會)와 같은 우익단체는 물론이고, 정계나 언론계에서도 이토의 점진정책을 우려하면서 ‘병탄’을 의미하는 보다 강력한 조치를 촉구했다. 정부를 이끌어 가고 있는 권력의 실세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원로), 가츠라 다로(수상), 데라우치 마사다케(육상), 고무라 쥬타로(외상) 등은 이토의 점진정책을 표면적으로는 지지했으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는 ‘병탄’의 길로 접어들었다. 각계에 흩어져 있는 이러한 우려와 비판과 반대를 하나로 묶어 한편으로는 ‘반(反)이토’ 캠페인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진회를 조정하면서 조기병탄의 분위기를 만들어 간 인물은 통감 이토의 촉탁 참모인 우치다 료헤이다. 

1907년 7월 헤이그 사건의 결과로 새로 조인된 ‘정미7조약’은 우치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좀 더 강경한 조치를 기대했던 그의 표현에 의하면 새로운 조약은 1904년이나 1905년의 조약을 조금 더 확대한 것으로서 “요란한 빈 수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정책 결정자와 집행자가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간접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비판했다.

우치다 "통감부는 保身私利로 失政" 도쿄에 조치 촉구

이토를 중심으로 한 통감부의 한국통치정책에 대한 우치다의 불만은 헤이그 사건 처리과정에서 움트기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국익’을 늘 앞세우면서 활동해온 대륙낭인 우치다의 눈에 비친 통감부의 고위 관리들은 ‘국익’보다 ‘보신(保身)’과 ‘사리(私利)’에 더 밝았다. 통감부 관리들과 함께 1년 동안의 한국지배를 체험한 우치다는 크게 실망했다. 그에 의하면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 기조는 지나치게 유화적이고 점진주의적이었다. 일본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생각이 짧고 정치적 두뇌가 없는 인물로서 “한인 잡배들에게 현혹되어 항상 추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경찰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는 “일한연방을 위해 활용해야만 할 일진회를 증오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통감부의 고위 관리들은 자신의 지위를 “축재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어 한국인들의 원성을 자초하고 있었다. 1907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우치다는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통감부 시책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전달했다. 또한 이와 같은 통감부 정책이 계속된다면 일본은 머지않은 장래에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에 부딪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도쿄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일한연방의 급무”와 “통감부의 실정(失政)”을 사실 그대로 전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당부했다.

도쿄의 스기야마도 우치다의 상황판단과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지난 3년간의 통치 실적에 비추어 볼 때, 스기야마도 이토가 한국문제를 종국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이토의 “퇴임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토의 퇴임을 위한 공작이 서울과 도쿄에서 진행됐다.

야마가타, 政敵 이토의 귀국 반대..통감 경질 지연작전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러나 도쿄의 실권자들은 이토가 한국에 좀 더 오래 체류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원로 가운데 천황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이토 히로부미가 도쿄로 돌아와 다시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이끌고 직접 국내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야마가타도 이토가 한국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인물이라는 것과, 또한 그가 한국에서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가능한 한 이토가 외국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자신과 자파의 세력 확장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직 병탄을 단행하기에는 시기상조이고, 병탄을 위한 분위기가 좀 더 무르익을 때까지 이토가 한국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토는 한국인의 저항의 대상이었다. 그는 을사강제조약을 강행했고, 통감정치의 주체이고, 고종을 퇴위시켰고, 정미7조약을 주도했고, 군대를 해산하는 등 한국의 외교와 국내정치를 강압한 장본인이고, 그래서 한국인의 저항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가 한국에 좀 더 머물러 있는 것이 병탄의 ‘구실’을 무르 익게 만들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의병’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1908년 말 이토는 통감 사임의 뜻을 밝혔으나, 야마가타 파에서 “적절한 인물을 찾기에 곤란”하다는 이유로 이토의 사임을 수용하지 않았다.

병탄론자 야마가타 "종기가 충분히 곪을때까지 기다리자"

야마가타는 공개적 병탄 지지자였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결코 급진적 병탄론자는 아니었다. 병탄을 위한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지극히 현실론자였다. 헤이그 사태 직후 우치다 료헤이가 병탄 단행을 주장할 때, 야마가타는 한국문제를 종기(腫氣)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종기는 충분히 곪은 뒤에 째서 농과 뿌리를 한 번에 짜내야지, 너무 일찍 손대면 덧나서 더욱 커지고, 너무 늦으면 문드러질 위험이 있다. 그 적시(適時)를 찾아내는 것이 명의(名醫)다”라고 설명하면서 서두르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는 이토가 통감직을 좀 더 수행하는 것이 ‘적시’를 앞당기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야마가타는 헤이그 밀사사건 후 한국정책을 결정하기 위하여 소집된 원로와 대신회의에서도 ‘즉각 병탄’을 단행하는 것을 반대한 인물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낭인들 "한국 병합은 일본 國是..통감 갈아치워라"

그러나 서울의 우치다 료헤이와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중심으로 한 조기 병탄론자들은 여전히 이토 통감의 사직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우치다는 도쿄의 실력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츠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에게도 비공개적인 사신과 보고서를 통하여 통감부의 한국 지배정책을 비판하고 통감 경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토는 한국의 실상(實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한국인의 국민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국사회의 계급제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치다의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통감은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활용치 못할 뿐만 아니라, 사상누각과 같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정책을 수립하게 되고, 따라서 정책의 지속성과 신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통감 경질은 “필요불가결하고 화급한 대사(大事)”였다. 

우치다와 의견을 같이하면서 “조선 문제 해결에 생애를 건” 스기야마 또한 이토의 사임을 촉구하고 나섰다. 스기야마에 의하면 일본의 ‘국시(國是)’는 그 세력을 중국대륙과 시베리아로 진출하는 것이고, 이는 한국이 ‘발받침[足場]’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스기야마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일로전쟁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일한병합이 예정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토는 이 ‘국시’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기야마의 전기 작가에 의하면 그는 “1907년 11월 경성을 찾아가 이토에게 사임을 권유”했다고 한다.

우치다, 이토 떠나 도쿄로..黑龍會 동원 이토 비판 캠페인
1909년초 통감부 막료직에서 사임한 우치다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보다 공개적이고 본격적으로 이토의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1909년 1월 <한성사연(漢城私硏)>이라는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병탄 실현에 동조하고 있는 도쿄의 실력자인 야마가타, 가츠라, 데라우치, 고무라 주타로 외상, 그리고 요로의 중요한 인물들에게 전달했다. “국정이 잘못돼 가고 있는 것을 묵시(黙視)할 수 없어 통감부 개설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정세를 분석”했다고 시작한 이 보고서에서 이토의 통감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리고 “하루 속히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방침을 확립하고 실행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우치다가 뜻하는 당면한 가장 중요한 ‘근본방침’이라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교체하고 병탄의 기본방침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치다는 고쿠류카이를 동원하여 이토의 정책을 비판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고쿠류카이는 한편으로는 회의 부설기관으로 조선문제동지회(朝鮮問題同志會)를 조직하여 조기병탄을 주장하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관지인 <黑龍>에 한국문제를 특집으로 꾸며 통감부의 통치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고쿠류카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의원의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오타케 간이치(大竹貫一) 의원 등을 통해서 정치권에서도 이토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한국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이토 "나를 반대하는 저의 뭐냐?" 우치다 "일본 국시에 반하기때문"

통감부 정책에 대한 우치다의 이와 같은 비판과 통감의 경질을 위한 그의 움직임을 이토가 결코 모를 리 없었다. 1909년 초 정무협의차 잠시 귀국한 이토는 우치다를 자신의 관사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는 우치다에게 “군은 통감정치에 반대의 뜻을 표시하고 이를 문서화하여 정부 요로에 돌리고 있다는 데 그 저의가 무엇인가” 하고 추궁했다. 이에 우치다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료헤이는 통감정치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통감정치가 제국의 국시에 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어 저의 소신을 피력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일한합방은 일본 제국의 국시입니다....그러나 통감정치의 현상이 과연 국시를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료헤이는 다만 이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치다는 이미 이토의 통제권 밖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출신 다른 이완용-송병준, 세력 확대위해 일본 지지 쟁탈전
이완용과 송병준의 알력
우치다는 스기야마와 함께 통감의 경질을 위한 여러 형태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진회와 송병준을 조정하여 정적인 이완용과의 불화를 조장했다. 한국내각의 혼란을 조성하여 이토를 궁지로 몰려고 했다.
출신 배경을 달리하는 이완용과 송병준은 처음부터 물과 기름처럼 융화할 수 없었다. 귀족배경을 지닌 이완용은 송병준의 입각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일진회의 정계진출을 될 수 있는 대로 억제하려고 했다. 고종을 퇴위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송병준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일진회의 세력을 중앙과 지방 정계에서 확대해 나갔다. 통감정치체제 안에서도 이완용 파와 송병준 파는 세력 확장에 필요한 일본의 지지와 신임을 얻으려고 서로 경쟁했다. 주도권 장악을 위한 두 파의 갈등은 불가피했고, 시간이 갈수록 더 심화됐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나라를 파는’ 일에 서로 경쟁했고. 이토 히로부미와 우치다 료헤이는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불안한 이완용, 이토에게 송 제거 애원..우치다, 송 사퇴 지시

고종의 퇴위와 ‘정미7조약’의 성사를 계기로 한국정부 안에서 송병준의 영향력이 확대됐고, 일진회의 진출도 눈에 띠게 드러났다. 또한 송병준과 이용구는 우치다와 스기야마를 통하여 도쿄의 실력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세력을 과시했다. 이완용 파는 불안해했다. 송병준 파의 세력이 강해지면 질수록, 이완용 파의 세력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토가 1908년 7월 이후 사임을 구상하면서부터 일진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이를 계기로 이완용 파가 다시 권력의 전면에 부상했다. 1909년 초 이완용은 송병준이나 일진회와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토에게 호소했고, 이토가 이를 받아들이자, 송병준은 우치다의 지시에 따라 내각에서 물러났다. 일진회의 세력도 크게 위축됐으나 내각 또한 불안정했다.

송병준-이용구, 도쿄로 직행..일본 정부에 "한국병합 시급합니다"

송병준(왼쪽)과 이용구.


1909년 2월 내각에서 물러난 송병준은 이용구와 함께 도쿄로 가서 그곳에서 이토 퇴임과 병탄 실행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우치다와 스기야마의 후원을 받아 야마가타, 가츠라, 데라우치를 찾아다니면서 신속한 한국 병탄을 촉구했다. 통감부의 외사국장이며 ‘병합준비위원회’의 한 사람이었던 고마츠 미도리(小松錄)의 회고록에 의하면 송병준은 가츠라에게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병탄을 촉구했다고 한다.

송병준 "1억원이면 병합" 가츠라 총리 "비싸다, 반으로 깎자"

“송병준은 도쿄에 도착하자 즉시 가츠라 총리대신을 면회하여 자신의 합방론을 제시했다. 그는 가츠라에게 “이토 통감은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한합방의 실행은 진실로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청컨대 각하의 영단을 기다립니다”라고 병탄을 독촉했다. 가츠라 수상은 그에게 합방의 취지는 잘 알겠지만 실행이 대단히 어렵다고 말하자, 송병준은 “합방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억 원(一億圓)만 있으면 간단히 실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가츠라 수상은 “일억 원은 일본의 재산으로서는 대금(大金)이네, 너무 비싼 것 아닌가, 그 절반정도면 어떤가?”라고 값을 깎자, 송은 “아닙니다. 절대로 비싸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8천6백 방리(方里)의 면적과 2천만의 인구를 가지는 것이고, 그 위에 수십억이 될지 또는 수백억이 될지 알 수없는 부원(富源)을 지니고 있는 한국을 사는 대가로서는 턱없이 싼 값입니다.”(<朝鮮倂合之裏面>)

훗날 실제로 한국병탄에 투입된 경비는 3천만원뿐

그러나 가츠라가 실제로 병탄을 단행할 때 투입된 총 경비는 “송병준이 제시한 값의 3분의 1인 3천만 원”으로 충분했다.

우치다나 송병준의 조기병합운동과는 별도로, 야마가타와 가츠라도 병탄의 ‘적시’가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가츠라는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한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방침’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고무라 외상은 정무국장 구라치 데츠키치(倉知鐵吉)에게 자신의 복안을 설명해 주면서 안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수정에 수정을 거친 ‘기본방침’은 3월 30일 가츠라 수상에게 제출됐다. 근본방침의 핵심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실행”하는 것이다. 즉 “한국을 제국의 판도에 편입하고, 우리 천황 폐하가 그 통치권을 완전하게 장악” 한다는 방침을 확실히 했다.     

1909년 5월 이토 히로부미가 3년 반의 통감직책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정되자, 일본 정부 주도하의 한국병탄 프로젝트는 신속하게 추진됐다. 도쿄에 머물러 있던 송병준과 이용구는 우치다의 지시에 따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병탄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업에 뛰어 들었다.

 

 

18. 노회한 여우 "한국도 먹고 자신도 살다"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2.02 10:07:51

 

18. 한국병탄과 이토의 속마음

‘보호정치’의 실패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5월 천황에게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천황은 일단 기각했으나 이토가 사의를 굽히지 않자 이를 받아들였다. 후임은 그가 추천한대로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임명됐다(1907.6.14). 출발 당시 품었던 큰 기대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통치는 실패로 끝났고, 좌절의 심정으로 통감직에서 물러났다. 

이토의 통감정치를 곤궁한 지경으로 몰고 간 것은 고종의 강제 퇴위 후 행동으로 나타난 한국인의 저항이었다. 특히 ‘의병’의 도전은 결정적이었다. 이토를 위시한 통감부는 처음부터 의병투쟁을 과소평가했다. 의병의 저항은 일시적 현상이고, 또한 힘으로 평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의병과 일본군의 교전회수와 사상자가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15회 표 참고), 의병투쟁은 전국적 현상이었고, 1907년 이후 크게 늘어났다. 1909년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약화되는 현상을 보이기는 했으나, 병탄이 강행될 때까지 한국인의 의병투쟁은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의병 씨를 말려라" 마을 초토화 방화..살육작전

일본은 무자비한 무력탄압으로 일관했다.

한국의 현상을 취재하기 위하여 당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특파원 프레드릭 매켄지Frederick A. McKenzie)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은 무력탄압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지금 그들에게(의병) 일본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동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군을 거의 본적이 없거나 전혀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강한가를 그들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현장에서 본 것은 마을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방화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살육이었다. 현장을 목도한 매켄지는 “이 때 뿌려진 증오의 씨앗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수세대가 지나야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탄압을 위한 병력이 계속 증강됐다. 한국군 해산 직전에 증파된 12여단을 시작으로, 4개 중대의 기병대(1907년 9월), 2개 연대의 보병(1908년 5월)을 강화했고, 한국주둔군과는 별도로 2개 연대로 구성된 한국파견대를 창설(1909년 5월)했다. 이들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은 도처에서 계속됐다. 그러나 매켄지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의병의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 했다.

통감부는 무력탄압과 병행해서 강화되는 민중의 반일여론을 통제하기 위한 법도 새로 정비했다. 1907년 7월 신문지법을 시작으로, 보안법(7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9월), 신문지법을 더욱 강화한 개정법(1908년 4월), 학교령(9월) 등이 차례차례 제정됐다.

 

"황제를 이용하자" 순종 동원해 전국 지방 순무여행
순종의 지방순행
무력탄압과 강력한 통제정책을 실시해도 한국 민중의 의병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양민을 학살하는 일분군의 가혹하고 난폭한 행동이 점차 외국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토는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했다.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그는 순종을 이용하려고 했다. “민심의 일신을 꾀하기 위해 한국 황제의 지방 순행” 구상이 그것이다. 순행의 목적은, 이토가 가츠라 수상에게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 민중으로 하여금 모두가 일본을 신뢰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토는 이완용 수상에게 메이지 천황의 지방순행을 본받아 순종의 순행을 종용하고, 자신이 수행할 뜻을 밝혔다. 

1909년 1월 4일 순종은 다음과 같은 조칙을 발표했다.
“지방의 소란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말을 하고 보니 다친 듯 가슴이 아프다. 더구나 이런 혹한을 만나 백성들의 곤궁함이 더 심하여질 것은 뻔한 일이니 어찌 한시인들 모르는 체하고 나 혼자 편안히 지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단연 분발하고 확고하게 결단하여 새해부터 우선 여러 유사(有司)들을 인솔하고 직접 국내를 순시하면서 지방의 형편을 시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짐의 태자태사(太子太師)이며 통감(統監)인 공작(公爵) 이토 히로부미가.....이번 짐의 행차에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하여 짐의 지방의 급한 일을 많이 돕게 해서 근본을 공고하게 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여 난국을 빨리 수습하도록 기대하는 바이다”(<순종실록>).
그리고 7일 서울을 출발하여 대구, 부산, 마산, 대구를 경유하여 13일 궁에 돌아왔다. 이어서 27일에는 서북부 순행 길에 올랐다. 평양, 의주, 정주, 평양, 황주, 개성을 거쳐 2월 3일에 서울에 돌아왔다. 순행의 분위기가 어떠했나는 <대한매일신문>의 논설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대한매일신문 "일본 공갈 심해도 일본기 걸지마라"

"대왕대폐하께서 서도에 순행하시는데 지방 관리가..태극국기 옆에 일본 국기를 함께 달라고 한번 말하고 두 번 말하며 말 할 때마다 크게 공갈하였으되..우리 대왕대폐하께서 지방에 순행하사 우리민정을 두루 살피시는 이때에 우리 백성은 당당히 우리 대한 국기만 달지니 아무리 관찰사의 영이 엄하고 (일본)순사의 공갈이 심할지라도 우리 대한국기 곁에 다른 나라 국기가 와서 걸림을 허락하지 아니하리라."(1909.2.7)

순행은 이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 효과는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했다.”
황제의 권위를 이용한 순행 행사는 민심을 수습할 수 없었고, 의병투쟁을 전혀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이 때 이토는 이미 사임을 결심했다. 순종의 지방 순행을 끝낸 후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2월 17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본에 머무르면서 사임을 결정했다. 그해 5월이었다.

순종을 수행하여 한국지방 순행을 끝내고 귀국하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수상-외상 3자밀담 "한국병합 만장일치"
레이난사카(靈南坂)의 밀담
이토의 사임이 확정되기 직전인 1909년 4월 10일 가츠라 수상과 고무라 외무대신은 레이난사카의 관저로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갔다. ‘합병 반대론자’로 알려진 이토의 진의를 파악하고, ‘한국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가츠라는 구라치 데츠기치(倉知鐵吉)가 작성한 ‘합병’ 방침을 설명했다. 이토의 전기 작가는 그날의 회담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9)4월 10일 양상(兩相, 가츠라 다로와 고무라 쥬타로)은 병합에 관하여 서로 협의하고, 당시 추밀원 의장의 관사에 있었던 공(公-이토 히로부미)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의 현상에 비추어 장래를 내다 볼 때 한국을 병합하는 이외에 다른 계책이 없다는 사유를 설명했다. 처음에 양상은 공이 당당하게 반대 의견을 주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에 대응할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양상의 설명을 듣고, 예상 밖으로 병합에 이론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양상은 크게 기뻐하며 병합의 방침을 제시하고 협의했다. 공은 대강을 모두 시인했다. 다만 이로 인하여 중대한 외교문제가 야기되지 않도록 사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주의했을 뿐이다."(<伊藤博文傳>)

이토, 질문 한마디 없이 즉석 동의

그리고 고무라가 준비해 간 병탄의 ‘실행방침’을 보고, 고마츠 미도리(小松綠)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토는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질문도 없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옳다면서 모두 동의했다.” 가츠라와 고무라가 ‘환희의 실망’을 느낄 정도로 이토의 병탄지지는 간단하고 확실했다.

이토는 이어서 4월 24일 가츠라가 회장으로 있는 동양협회가 주최하는 한국 진신단(搢神團)의 일본관광환영회에서 “종래 두 나라는 두 나라로써 존립을 같이 해왔고, 지금은 협동적인 관계에 있으나 한 걸음 더 나가 일가(一家)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개석상에서 “처음으로 한국병합에 대한 의향”을 밝혔다. 이토가 한국병탄에 동의하면서부터 정부의 병탄프로젝트는 신속히 가동하기 시작했다.

 

3년반동안 "병합 안한다" 공언 되풀이
이토 히로부미는 병탄을 반대했었나?

일본 수상 가츠라 다로.  

이토는 그가 사임을 결심할 때까지 공석이나 사석에서 한 번도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국내외적으로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의지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보호정치를 하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한국을 부익(扶翼)하여 문명의 경지로 인도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한 연유로 그는 일본 정치권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합병 ‘반대론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이토는 처음부터 병탄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이를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병탄주역의 한 사람인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러한 이토의 내심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는 이토가 만년에 병합론에 찬성하였다고 추단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토의 가슴 속에는 의외로 일찍부터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다” 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토가 신뢰하는 막료가 조기 병합의 급진론을 제시했을 때 이에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신원훈의 한사람이면서 이토의 1차 내각에서 농상무상을 역임한 다니 간쇼(谷干城)에 의하면 이토는 한국문제에 대해서 “치밀한 정견(定見)”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병탄해야 한다는 데는 야마가타와도 다를 바 없었다. 다시 고무라의 기록을 보자.
“1909년 봄 이토가 오이소(大磯)의 별장에서 야마가타와 회견할 때, 한국의 장래에 대하여 야마가타의 일한일제론(日韓一帝論)에 대하여 이토는 그 실행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 소식이 밖으로 전해지자, 야마가타의 병합론에 대하여 이토가 비병합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정계 일각에 전해졌다. 그러나 이는 이토가 비병합론을 주의(主義)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를 결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깊이 우려했을 뿐이다.”(<小村外交>)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 


즉 병탄에는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나, 3년 반 통치를 담당했던 책임자로서 이를 실행함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을 뿐이다.

3년 가까이 이토의 휘하에서 병탄운동을 전개했던 우치다 료헤이도 이토의 진의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통감 이토는 한국이 부강해지고 발전하면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늘 공언하지만,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토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토의 통치 방법은 “한국의 군주와 백성의 음모가 나타나고 소요가 일어날 때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인의 권리를 하나씩 삭제하고, 일본의 이익을 하나씩 확보하여 점차적으로 정치상의 실권을 빼앗고, 한국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용의주도하고 신중한” 점진주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치다가 이토의 경질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한 것은 이토가 ‘비병합론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병탄 시기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병탄의 시기에 관해서는 우치다를 위시한 조기병탄론자의 견해에도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국내외적으로 1907년 말에 이르러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거의 제거됐다. 나라 안팎의 여건은 성숙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본의 전체적인 여론이 한국에 대해 더욱 강경한 정책을 요구했고, 원로와 내각 역시 강경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미국-영국-러시아 차례차례 "일본의 한국지배 인정"

국제적으로는 1905년 7월의 태프트-카츠라 밀약에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결과”라고 승인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인정했다.
1905년 8월 12일 런던에서 조인된 제2차 영․일동맹조약에서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그리고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소유하고 있고, 일본이 그 이익을 옹호하고 증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 감리 및 보호의 조치를 한국에서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함으로써 영국 또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사실상 승인했다.
1907년 7월 30일 합의된 이즈볼스키․모토노(本野) 비밀협약에 러시아는 한국에서 수행되는 일본의 정책에 “방애(妨礙)하지 않는다”고 다시 확약함으로써 1905년에 조인된 포츠머스 조약을 재확인했다.
이와 같이 강대국들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기병탄론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이 일본이 병탄을 강행한다 해도 국제적으로 큰 물의가 일어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했다.

노회한 정략가 "건축공사만 완벽하게..완공식은 후임자에게"

빈틈없는 정치가인 이토가 물론 이와 같은 나라 안팎의 정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우치다를 비롯한 조기병탄론자들이 병탄을 강력히 주장하던 1907년 이후에도 왜 이토는 병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을까? 통감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할 때까지 왜 이토는 일본의 병탄정책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았을까?  이토는 병탄반대론자였나? 우치다와 일진회를 중심으로 한 이토 경질 캠페인, 이완용과 송병준의 갈등, 1907년 이후 일본 정치권에서 강화된 통감정치에 대한 비난과 공격, 치열한 의병투쟁 등과 같은 이유가 작용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이나 여건 변화 때문에 사임하기에는 이토는 너무나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또한 정치적 책략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면 왜일까? 물론 정확한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몇 가지 이유를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만일의 국제간섭 우려..일본내 정치생명을 최우선으로
첫째,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가진 정책 결정자는 권한과 책임을 함께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더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정책 수립과 집행자로서 권한과 책임을 가진 이토가 아무런 책임도 없는 대륙낭인이나 ‘매국’에 앞장선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욱 신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야마가타와 같은 정적이 도쿄에 도사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이토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따르는 과감한 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커다란 모험이었다.
둘째, 비록 열강이 한국에서 일본의 ‘탁월’한 지위를 인정했으나, 이토는 열강의 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던 듯하다. 물론 이토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할 경우 삼국간섭과 같이 열강이 부정적으로 간섭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감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한국을 병탄함에 있어서 열강의 움직임에 늘 주의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간섭의 쓰라린 외교적 실패를 체험한 이토는 열강으로부터 확고한 보장을 받은 후에 병탄을 실행하는 것을 한국정책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겉으로 "한국 독립해야" 속으로는 "반드시 병탄해야"
셋째, 이토는 처음부터 일본의 한국병탄을 공식적으로 부인했고, 또한 한국의 독립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초대 통감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떠나기 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이토는 통감부의 근본이념과 기본정책 노선은 한국정부의 개혁을 돕고,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정미7조약이 조인된 직후에도 이토는 일본은 한국을 병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언했다. 그리고 한국은 반드시 자치국이 되어야 하고, 이를 성취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기회 있을 때 마다 거듭 공언했다. 그는 때가 무르익으면 일본의 한국병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토는 스스로가 거듭 부인해 온 병탄을 수행하는 장본인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고무라 주타로가 적절히 표현한 것과 같이 이토는 다만 “흉중의 계획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절묘한 사임'..결정되자 "병탄 지지" 공개 선언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토는 수완 있는 정치가였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3년 반의 경험을 통하여, 일본은 한국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병탄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모든 조건이 성숙되면 자신이 병탄정책을 수행하지 않아도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토는 1909년 초가 사임의 시기라고 판단했고, 병탄을 승인함으로서 그 책임을 후임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므로 이토가 통감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은 조기병탄론자와 대륙낭인의 비판이나 정부 내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신중히 계산하고 계획한 결과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이토의 전기 작가 고마츠 미도리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토는 자신이 “통감직에서 물러날 시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이토는 자신의 사임을 결정한 1909년 4월 이후부터 일본의 한국병탄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고 나섰다.

 

 

 

19. "고종-황태자등 황족 전체를 동경으로 이주"

한상일 | 최종편집 2009.12.14 12:37:44

19. 한국병탄 준비 "완료"
이토, 영친왕 데리고 일본 견학여행

한국통감에서 추밀원 의장으로 관직을 옮긴 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의 잔무를 정리하고 사무를 후임자에게 인계하기 위하여 1909년 7월 1일 한국으로 향했다. 그의 마지막 한국행이었다.

7월 5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이미 통감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법권 및 감옥사무 일본으로 위탁’(각서 조인, 7월 14일)과 ‘군부폐지’(칙령, 7월 31)를 정리함으로서 한국의 국가적 강제장치를 완전히 해체했다. 이는 후임 통감의 부담을 덜어주고, 동시에 병탄을 위한 길을 깨끗이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7월 19일 귀국한 이토는 8월 1일부터 ‘일본 교육’을 받고 있는 영친왕을 대동하고 3주간에 걸친 일본의 동북지방과 북해도 견학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목적은 황태자로 하여금 “우방(友邦)의 정의(情誼)”를 느끼고, “형제와 같은 일한관계”를 보다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만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만주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국 병탄' 천황의 재가를 받다
‘대방침(大方針)’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병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면서부터 병탄을 위한 정부 당국의 준비는 급물살을 탔다. 일본정부는 7월 6일 구라치 데츠기치(倉知鐵吉)의 안을 기초로 한 ‘대한대방침(對韓大方針)’과 ‘시설대강(施設大綱)’을 각의에서 결정하고, 같은 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이로써 한국을 일본에 귀속시킨다는 한국 ‘병탄’이 국가 정책으로 확정됐다. 그동안 미루어졌던 정한론이 36년 만에 국가정책으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대방침’은 두 개의 원칙을 담고 있다. 하나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합병을 단행할 것. 한국을 합병하여 이를 제국 판도의 일부로 삼는 것은 반도에서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제국이 내외 형세에 비추어 적당한 시기에 단연코 합병을 실행해 반도를 명실 공히 우리나라의 통치 하에 두고, 또 한국과 여러 외국과의 조약 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은 제국백년의 장계(長計)가 된다”는 것이다.

‘대방침’의 또 다른 원칙은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는 병합의 방침에 기초하여 충분한 보호의 실권을 거두고, 힘써 실력의 부식을 도모할 것. 전항과 같이 병합의 대방침이 이미 확정되었으나, 그 적당한 시기가 도래하기까지는 병합 방침에 기초하여 우리의 제반 경영을 진척함으로써 반도에서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내용이다(<日本外交文書>).

"한국인이 합방 요구하는 분위기 성숙시킨다"

일본 정부가 한국 병탄을 정책으로 확인하고 있는 이 ‘대방침’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적당한 시기’다. 고무라 쥬타로가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이 ‘대방침’의 핵심은 “병합을 단행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고무라는 ‘적당한 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깊이 고려하고 있었다.

하나는 “열국의 사혹(思惑)”이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시모노세키 조약, 포츠머스 조약, 미국의 승인, 1905년의 ‘보호조약’, 영국의 승인, 정미7조약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은 “종국의 운명(병합)에 귀착하리라는 것을 열국이 양해하고 있지만, 유유히 병합을 단행할 경우 외교의 운영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강대국의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가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동안 한국의 독립을 강조해 온 일본이 병탄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다. 고무라는 일본이 “한국정부의 독립 부익(扶翼), 독립 유지를 여러 차례 선명(宣明)”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설령 이러한 선명들은 각 시대에 벌어진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서, 시세의 변천은 정책의 변천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앞장서서 병합을 결행하는 것은 바림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합방’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성숙될 때가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한국인들이 앞장서서 ‘합방’을 요구하도록 작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병합'은 연방이 아닌 한국의 완전한 폐멸(廢滅) 귀속"

‘대방침’이 안고 있는 두 번째 중요한 점은 ‘병합’의 의미다. 일본의 한국 ‘병합’은 “한국을 제국 판도의 일부로 만들”고, “반도를 명실 공히 우리의 통치하에 둔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최초로 밝힌 한국과 일본의 ‘병합’은 연방제도나 위임통치의 형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완전한 소멸과 한국의 일본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대방침’의 기초안을 작성하면서 ‘병합’이라는 단어를 조어(造語)한 구라치 데츠기치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이 완전히 폐멸(廢滅)하여 제국영토의 일부로 귀속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면서 동시에 그 어조가 지나치게 과격하지 않은 문자”가 곧 ‘병합’이라는 것이다. 합방론자들이 주장했던 대등한 국가연합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대방침’과 함께 각의는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의 정책목표라 할 수 있는 다섯 조항의 ‘시설대강’을 결정했다. 그것들은 (1) 질서유지를 위한 군대의 주둔, 헌병과 경찰관 증파, (2) 한국에 관한 외국교섭사무 장악, (3) 한국 철도를 제국 철도원의 관할로 이관하고, 남만주철도와 긴밀한 연락망 구축, (4) 일본인의 한국 이주와 한일경제의 긴밀화, (5) 재한 일본인 관리의 권리 확장 등이다.

 

일본의회도 배제, 천황의 초헌법적 대권 행사로
실행방안
‘대방침’과 ‘시설대강’이 확정되자, 고무라는 구체적 실행방안을 준비했다. 병탄 단행은 국내외 정세의 향방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지만, ‘적당한 시기’가 도래하면, 언제든지 지체 없이 병탄을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 방침과 조치를 미리 강구할 할 필요가 있었다.

고무라 외상은 구라치 정무국장에게 극비리에 이를 준비토록 하였다. 구라치는 고무라 외상의 구상을 기초로 “병합의 방법과 순서 등의 세목(細目)을 작성”하였고, 이를 외상이 수정하여 ‘의견서’의 형태로 7월 하순 가츠라에게 제출했다.

이 ‘의견서’는 한국병합의 선포, 한국 황실의 처분, 한반도의 통치, 대외관계라는 4개의 항목을 포함하고 있다.(<小村外交史>). 이에 따르면 병합실행의 시기는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적당한 시기’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병합을 단행”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한국병합의 선포는 “조칙(詔勅)”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한국 지배 통치는 일본 헌법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천황대권의 행동”에 속한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여 한국에 대한 통치권은 일본 헌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초헌법적인 천황 대권에 기초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식민지 한국의 ‘통치권’ 문제로 뒷날 정치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논쟁을 사전에 봉쇄하고, 의회나 국무대신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고종-황태자등 황족전체를 동경으로 이주시키기로
한국 황실에 대해서는 병합과 동시에 “한국 황실로 하여금 명실 공히 일체 정권에 관계치 못하게 하여 한국인이 다른 뜻을 품지 못하도록 근본을 제거”하고, 이를 위해 한국 황제를 완전히 “폐위”할 것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명칭도 ‘황제’가 아니라 “대공(大公)전하”라 부르고, 고종, 황태자, 의친왕을 포함한 황족 전체를 “도쿄에 이거(移居)”시킨다는 것이다.

한반도 통치는 중앙관청, 지방관청, 재판소로 나누고 있으나 구체적 내용은 생략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통치기구에 대한 연구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한국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은 “병합과 동시에 소멸”하고, “법권 및 세권은 모두 일본에 귀속”한다는 것을 조칙으로 선포할 것을 제시했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내지잡거와 토지소유권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고무라 외상-가츠라 수상-대륙낭인 "의견 일치"

가츠라는 고무라의 이 ‘의견서’를 각의에 부쳐 “각료 일동으로부터 찬동”을 받고, “병합방침의 대강”을 작성했다. 이 ‘대강’에는 ‘의견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병합의 방법’을 명시하고 있다. ‘대강’의 전문은 “병합 단행의 시기에 이르면 제국정부와 한국정부 사이에 하나의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뜻에 따르는 형식에 의해 병합을 실행하는 것이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 하겠지만, 만일 이 방법에 의해 병합을 실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우리의 일방적인 행위에 의해 제국정부에서 한국에 대해 병합을 선언”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뜻에 따르는 형식,’ 즉 한국인의 ‘요구’에 의해서 체결되는 임의적 형식의 조약이 바람직스럽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한국 ‘병합’은 일본이 주도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위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고무라 외상이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고, 또한 우치다 료헤이를 위시하여 일찍부터 한국에 들어가서 활동한 대륙낭인들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우치다 료헤이와 송병준. 

 

우치다, 일진회 막후조종..'합방제안' 세가지 방법 강구
일진회의 역할
우치다 료헤이를 비롯한 조기 병탄론자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임과 가츠라 내각의 적극적이고도 신속한 병탄정책을 환영했다. 정부가 ‘대방침’을 확정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일진회의 활동을 보다 강화하고, 병탄 프로세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우치다는 일진회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일진회의 고문으로 추대할 것을 이용구와 송병준에게 종용했다. 스기야마는 당시 일본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야마가타-가츠라-데라우치 파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기병탄을 위해서 도쿄의 권력층과의 교량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진회는 우치다의 제안대로 1909년 8월 대표총회를 열고 스기야마를 고문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그에게 통지했다. 그러나 가츠라 수상과 협의한 스기야마는 일진회라는 단체의 고문이 아니라, 개인 이용구와 송병준의 ‘지도 고문’으로서의 직책을 받아들였다. 가츠라 수상은 스기야마가 전면 나서서 일진회를 지휘하기보다, 배후에서 송병준과 이용구를 조정하여 일진회를 관리하는 길이 ‘한국인의 요청’에 의한 병합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정부가 추진하는 병합 프로젝트가 보다 신속하고 원활하게 진행되게 하기 위하여   우치다는 다케다 한시, 이용구, 송병준과 협의하여 일진회가 택할 수 세 가지 행동 대안을 마련했다. 첫째는 일진회 내각을 구성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합방’을 제의케 하고 이를 내각회의에서 결정하여 상주하는 방법, 둘째, 한국 황제로 하여금 일본 천황에게 직접 통치권을 위임케 하는 방법, 셋째, 제1안과 제2안으로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 일진회 회원을 규합하여 내각에 압력을 넣어 ‘합방’을 강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완용 내각 붕괴시키고 일진회 내각 구성
이러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우치다와 이용구는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의 3파가 연대하는 3파 제휴를 시도했다.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는 배일(排日)을 지향하고 있어 일진회와는 그 입장을 달리하고 있으나, 이완용 내각을 반대한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므로 세 파의 정략적 제휴가 가능하다고 우치다와 이용구는 판단하고 있었다. 세파가 제휴하여 이완용 내각을 붕괴시키고, 일진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합방 청원’을 제기한다는 것의 그들의 구상이었다. 구상대로 실현된다면, 일본의 한국 병탄은 한국인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난 움직임이 된다. 앞서 소개한 ‘대강’에 나타나는 “한국의 뜻에 따르는 형식에 의해 병합을 실행”한다는 것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병탄을 위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만이 필요했다. 이 ‘적당한 시기’의 단초를 통감에서 물러난 이토 히로부미가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