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 그리고 노비들의 신분 상승
노비가 신분 상승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천인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야 했다. 즉 면천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면천을 받은 노비는 행복했을까? 법적인 면에서 보면, 면천은 분명히 축복이었다. 하지만 실질적 측면을 고려할 때, 면천된다는 것은 어쩌면 직장을 잃는 것일 수도 있었다. 면천은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명예퇴직 같은 것이었다. 물론 부유층 양반가의 얼자가 면천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들의 경우에는 어차피 생계가 보장되어 있으므로, 면천은 곧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계가 보장되지 않은 일반인들은 달랐다. 이들은 면천이 되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면천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재앙이었다. 그러므로 면천이 노비에게 항상 축복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면천이 실질적인 행복이 되려면, 당사자인 노비가 먹고사는 데에 문제가 없어야 했다.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노비에게 노비라는 굴레를 벗는 면천은 당연히 반가운 일이었다. 이런 경우의 면천은 일종의 사후 추인과 같은 것이었다. 이미 양인보다 나은 경제력을 소유한 노비에게 양인의 지위를 인정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면천을 받으려면, 그 전에 이미 양인과 다름없는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어야 했다고 보아야 한다.
사극에서는 노비의 노력이나 노비주의 시혜가 면천으로 이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지만 면천은 주로 국가의 정책적 차원에서 시행됐다. 국가가 비상사태, 재정 부족, 자연재해, 기근 등을 타개해야 할 경우에 면천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이런 경우에 국가는 돈을 받고 면천을 시행하는 예가 많았다. 납속(納粟), 즉 곡식 헌납은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한 적절한 사례를 《선조실록》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초기에 명나라군은 보급 문제로 큰 곤란을 겪었다. 이 문제는 조선 조정에도 당연한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노비들에게까지 손을 벌리기로 했다. 곡식을 헌납하면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조치는 처음에는 공노비들에게만 한정됐다. 하지만 이들의 납속만으로는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결국 사노비들에게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째인 선조 26년 2월 13일(1593. 3. 15.)이었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재정적 곤란에 직면할 때마다 노비들에게 재화를 걷고 그들을 면천했다.
하지만 사노비에게까지 국가가 면천을 시행하는 것에는 당연히 노비주의 반발이 발생했다. 자기 노비가 납속에 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인들도 적지 않았다. 《명종실록》2)에 따르면 왜구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명종시대에, 정부에서는 군공을 세우는 노비에게 면천의 특혜를 제공하겠다고 보증했다. 그러자 자기 노비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적인 형벌을 가하는 노비주들이 많았다.
그들은 노비가 주인을 배반했기에 정당한 대응을 했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자 조정은 대응책을 강구했다. 사헌부에서는 그런 노비주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그들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부에서 노비주들의 피해를 고려한 적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노비주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면천을 시행하곤 했다. 그만큼 다급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면천을 약속한 국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사례도 제법 많이 확인할 수 있다. 면천을 전제로 노비들의 도움을 받은 뒤에 일이 끝나면 나 몰라라 했던 것이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인조 쿠데타’ 직후의 상황을 들 수 있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4개월여 뒤인 인조 1년 7월 17일(1623. 8. 12.)이었다. 이날 인조는 광해군 때에 면천된 공노비가 너무 많다면서, 이들의 면천을 취소하고 대신 일정 기간 이들의 의무를 면제해주라고 지시했다.
정치적 목적의 면천도 수시로 단행되었다. 이런 면천은 주로 정변을 계기로 단행되었다. 정변의 승자 쪽이 자신들에게 가담한 노비들을 대거 면천시키곤 했던 것이다. 《성종실록》3)에는 성종이 자신의 즉위에 기여한 노비들을 면천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세조실록》4)에 따르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에 조정에서는 진압에 참가한 노비들을 면천시키겠다고 선포했다. 그 결과 무려 1,200여 명의 노비가 반란 진압 후 면천되었다. 이 외의 정변들에서도 노비 출신 공신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렇게 면천이 될 경우 전답과 노비까지 받을 수 있었으므로, 신분 상승을 희망하는 노비들한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었다.
물론 노비주가 개인적 이유로 노비를 면천시킨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사례는 아니지만, 노비들을 과감하게 면천시킨 사례로 신라 사다함(斯多含)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사다함 열전〉에 따르면, 사다함은 562년에 대가야를 멸망시킨 공로로 진흥왕으로부터 300명의 노비를 받았다. 이 300명은 가야 유민들이었다. 사다함은 이들을 수용한 뒤에 모두 풀어주었다.
사다함의 사례는 노비주가 자발적으로 은혜를 베푼 경우에 해당하지만, 이와 달리 노비가 주인에게 은혜를 베푼 결과로 면천이 이루어진 사례도 있다. 《어우야담》에 있는 무사 권가술(權可述)의 이야기가 그런 예에 해당한다. 권가술은 수석(水石)이란 노비와 함께 대형 선박에 탑승했다. 이 배에는 100여 명이 탑승했다. 그런데 바람을 만나 방향을 잃은 선박이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른 승객들은 모두 익사했고, 권가술과 수석만이 판자 하나에 의지에 겨우 살아났다. 그런데 판자가 좁아서 두 사람이 동시에 올라타 있기가 어려웠다. 바람이 좀더 심하게 불자, 수석은 권가술에게 하직을 고하고는 물에 뛰어들었다. 혼자 남은 권가술은 판자에 의지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수석의 부인을 면천시켜 주었다. 수석의 희생이 부인의 면천으로 연결된 것이다. 국가가 면천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을 볼 때, 수석은 사노비인 데 비해 부인은 공노비였을 가능성이 있다.
면천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공문서 조작의 방법으로도 많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한 대형 사건이 《세조실록》5)에 기록되어 있다. 형조 서리인 진구(陳球)가 뇌물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양인으로 위조해주다가 발각된 것이다. 노비의 신분 위조를 포함해서 그가 벌인 공문서 조작이 수백 건이나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런 범죄행위가 많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남명 조식이 서리들에게 분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국가행정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사람들이 부정부패를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면천을 통해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노비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노비제도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음 장에서 이어질 것이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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