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인생 역전을 위한 마지막 승부 조선노비들

구름위 2014. 9. 2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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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역전을 위한 마지막 승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과도기인 해방 공간, 이 공간에서 활약한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준 《꺼삐딴 리》의 이인국 박사. 전광용이 지은 이 소설에서 외과의사로 등장하는 그는 일제 때는 친일을 했다가 해방 뒤에는 재빨리 소련에 빌붙었다. 그는 1·4 후퇴 때 남하한 뒤에는 상전을 미국으로 바꾸는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이인국은 뛰어난 의술을 무기로 각 시기의 주류들과 재빨리 제휴하는 신속함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출세와 영달이었다. 영어의 ‘캡틴’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까삐딴’이 와전된 ‘꺼삐딴’은 이인국의 인생 목표를 함축하고 있다. 그는 오로지 ‘캡틴’의 자리만을 꿈꾸었던 것이다.

 

소설 속 이인국과 유사한 실존 인물이 있었다.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활동한 목인해(睦仁海, ?~1408)가 그 주인공이다. 목인해는 노비 출신이었다. 《태종실록》에서는 “목인해는 사망한 재상 목신우(睦臣祐)의 기첩 자식이었다”1)고 했고 “목인해는 김해 관노”2)였다고 했다.

이런 자료들을 종합할 때, 목인해는 고려 때의 재상 목신우가 김해 관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혈통을 따라 관노가 되었던 것이다. 고려 때만 해도 천자수모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백과사전에는 목인해가 고려 우왕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왜 그렇게 적혀 있는지는 좀더 정확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인해가 관노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지위가 높았다고는 하지만, 목인해는 어디까지나 노비였다. 고위층의 자식이라 해서 무조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아버지를 상대로 호부(呼父)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재상의 자식이라 할 수 있었다. 목인해는 그런 형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지위를 잊고 노비 신분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주 경이로운 시도를 했다. 노비였던 그가 아버지의 지위에까지 오르려 했던 것이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말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한 그의 일생은 출세지향형 인물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

 

‘꺼삐딴 리’ 이인국의 출세 비결은 의술이었다. 아무리 약고 영리해도, 뚜렷한 능력이 없으면 격변기에 살아남기 힘든 법이다. 목인해에게는 그런 뚜렷한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활쏘기 기술이었다. 사극을 보면 검술이 무사의 기본이었던 것 같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까지도 조선군의 주력 무기는 활이었다. 심지어는 조선 전기의 기병들조차도 창보다는 활을 더 많이 썼을 정도였다. 정규 기병 중에서 활을 쓰는 병사는 60퍼센트, 창을 쓰는 병사는 40퍼센트였다.3) 무과 시험에서도 활쏘기가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무예를 경시한 선비들도 활쏘기만큼은 중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활을 잘 쏜다는 것은 중요한 출세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목인해는 애꾸눈이었는데도 활을 잘 쏘았다. 그런 그를 처음 발탁한 것은 이성계의 사위이자 경순공주(慶順公主)의 남편인 이제(李濟)였다. 경순공주는 이방원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의 누나였다. 그 뒤, 목인해는 이방원 수하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방원의 도움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의 도움으로 중앙군 장교인 호군(護軍)이 된 사실로 보아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목인해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반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승자 이방원의 반대편인 패자 정도전의 사람으로 분류됐던 것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을 묘사한 태조 7년 8월 26일자(1398. 10. 6.) 《태조실록》에서는 “목인해, 박미, 이천우는 청해수군(靑海水軍)으로 충군(充軍)하며”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청해는 동북면(함경도)의 지명이다. 수군은 신분은 양인이지만 직업은 천인인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일종이었다. 수군이 아닌 자가 수군이 되었다는 것은 죄인으로 전락했다는 뜻이다. 이는 목인해가 정도전 편에 섰음을 뜻하는 것이다. 왕자의 난 직전만 해도 정도전의 세력이 훨씬 더 강력했으니 출세를 위해 주군인 이방원을 등졌던 모양이다. 중앙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 그는 이 때문에 함경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에 붙들려 친일 혐의로 투옥된 이인국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꿈틀댔다. 그는 감옥 안에 퍼진 전염병을 치료하고 소련군 장교 스텐코프의 얼굴에 난 혹을 제거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의술이 그를 살린 것이다.

 

목인해도 살아났다. 수군으로 쫓겨난 지 얼마 후에 그는 이방원의 곁으로 되돌아갔다. 이를 계기로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승자의 편에 설 수 있었다. 사병이 권력자의 무력 기반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목인해는 뛰어난 궁술을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 입문》에서 결혼식 시각을 깜빡 잊고 교회 대신 실험실로 직행한 어느 유명한 화학자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 때문에 결혼식은 엉망이 되었고, 결국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프로이트는 결혼식을 망각한 사건이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될 운명의 전조(前兆)였다고 해석했다. 독신(A)을 희망하는 내면 심리가 ‘결혼식 깜빡’(B)이란 사건으로 나타났으니, B를 통해 A의 조짐을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한번 주인을 배반한 목인해의 행동을 또 다른 일의 전조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잠시 후 소개될 것이다.

 

1·4 후퇴 때 남하한 이인국은 이번에는 친미파로 변신했다. 북한에 있을 때는 아들에게 러시아어를 열심히 배우라고 채근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남한에 와서는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그는 자기도 미국에 다녀와야겠다고 판단했다. 미국 연수를 다녀와 국내 의료계에서 큰소리를 쳐보자고 결심한 그는 미국 대사관의 브라운에게 고려청자를 선물하고 출국의 편의를 봐줄 것을 부탁했다. 이인국이 브라운의 집에서 나온 뒤 자신의 처세술에 스스로 만족하며 항공편을 알아보러 택시에 탑승하는 장면과 함께 《꺼삐딴 리》는 끝난다.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이인국이 미국 진출을 시도했듯이, 목인해 역시 인생 역전을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가다듬었다. 그것은 태종 이방원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목인해가 조대림을 끌어들인 배경은 그가 태종 8년 11월 10일(1408. 11. 17.)부터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 소속의 좌군도총제를 겸직했기 때문이다. 삼군도총제부는 오늘날로 치면 합동참모본부에 해당하고, 좌군도총제란 삼군의 하나인 좌군의 감독자에 해당한다.

 

세 명이 좌군도총제를 겸했기 때문에 조대림 혼자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군부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에 조대림을 끌어들인 것이다. 조대림은 목인해가 역모를 도모하고 있는지는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목인해는 도리어 조대림을 역모 혐의로 고발했다. 동시에, 그는 비상 상황이라 속여 조대림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인솔하고 출동하도록 만들었다. 이때가 태종 8년 12월 5일(1408. 12. 21.)이었다.

 

미국 연수를 위한 편의를 얻고자 브라운을 찾아가기 직전, 이인국은 병원에서 큰 수술 하나를 끝냈다. 아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환자를 두고 나오면서 이인국은 왠지 불안했다. ‘오늘은 웬일인지 뒷맛이 꺼림칙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동안 쌓은 명성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브라운을 만나는 동안에도 그는 그런 꺼림칙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으로써, 소설가 전광용은 이인국의 운명이 밝지 않으며 그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목인해의 운명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암시만 받은 게 아니라 실제로 철저히 무너졌다. 조대림이 반역 혐의로 체포됐지만 사건의 진상은 곧 밝혀졌다. 목인해가 아무것도 모르는 조대림을 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사실, 조대림은 스물두 살밖에 안 된데다가 큰일을 벌일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태종은 격노했고 사건을 주도한 목인해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대림은 어찌 됐든 반역에 연루됐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태종은 사위에 대해서만큼은 관용을 보였다. 조대림이 목인해의 꾐에 넘어갔다는 점만 부각시킨 것이다. 태종의 신뢰를 받는 맹사성 등이 관용 없는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지만, 태종은 맹사성을 귀양 보내면서까지 사위를 살렸다. 목인해가 즉각 처형된 것도 조대림에게 혐의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태종의 의지 때문이다. 제일 밑바닥에서 제일 위를 추구했던 목인해의 마지막 승부수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각주
1 태종 2년 6월 25일자(1402. 7. 25.) 《태종실록》.
2 태종 8년 12월 5일자(1408. 12. 21.) 《태종실록》.
3 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 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