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낯설지 않은 노비의 재산 보유 풍경

구름위 2014. 9. 26.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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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에 법인(法人)이란 개념이 있다. 법인이란 법률에 의해 창조된 사람을 의미한다. 법인제도를 만든 것은, 자연인 즉 사람만으로는 법률관계를 온전히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100명이 모여 하나의 단체를 결성했다고 가정해보자. 단체 활동을 하다보면 돈도 모이고 채권도 생기고 채무도 발생한다. 이런 경우, 오로지 자연인만 법률관계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면, 단체 내의 자산과 부채를 처리하기가 곤란하다. 사무실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단체 구성원 100명의 공동 명의로 해야 할 것이다.

 

대표를 세우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단체의 채권이나 채무가 대표 한 사람에게 귀속될 경우, 채권보다 채무가 많아지는 순간에 대표는 해외나 또는 상응하는 다른 곳으로 도피할 것이다. 만약 단체를 사람으로 인정하고 단체의 명의로 법률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민법상의 법인제도는 바로 여기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 자체가 법인격을 부여 받은 사단법인, 재산 자체가 법인격을 부여 받은 재단법인 등, 이런 법인들은 형식적으로만 사람일 뿐이지 실상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으로 간주하는 법인제도를 만든 까닭은,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사람이 아니면 법률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람만이 인간사회 안에서 집도 사고 물건도 사고 거래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관념이다. 이처럼 인간이 아니면 재산을 소유하고 처분할 수 없다는 관념은 노비의 재산권을 제약하는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노비는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노비가 재산을 보유하지 못하는 것이 이치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원칙일 뿐이었다. 전체 인구에서 적어도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노비들이 국민총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다가 주인이 모든 노비를 완력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노비가 자신의 재산을 확보하고 증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외거노비가 세공을 바치고 남은 쌀을 아껴 먹고 비축해둔 경우, 주인이 그것까지 가로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인들이 그렇게 했다가는 노비제도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노비들은 먹고살기도 바빴겠지만, 일부 노비들 중에는 재산을 축적하여 부자의 반열에 올라서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부자가 된 노비들 중 일부는 축적한 재산으로 토지나 가옥 등을 매입했다.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소수의 노비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노비가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장흥고 노비가 당대 최고의 기생을 유혹할 수 있는 재산을 모은 것은, 이처럼 노비의 재산 보유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거부의 반열에 오른 노비들을 사료에서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중 한 명을, 함길도(함경도)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것과 관련한 세조시대의 사례에서 만날 수 있다. 함길도는 여진족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다. 그렇기 때문에 군수물자를 충분히 공급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국가재정이 그리 넉넉지 못했다. 또 변방이어서 군수물자를 제때 공급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은 민간에, 그리고 노비에게까지 손을 벌렸다.

 

세조 13년 7월 4일자(1467. 8. 3.) 《세조실록》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공노비나 사노비가 쌀 50석(100가마니)을 함길도까지 직접 운송해주면 면천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쌀 50석은 상당한 재물이었다. 울산 옥현의 경우, 1968년 이전까지만 해도 논 한 마지기(300평)의 연간 수확량이 112킬로그램에 불과했다. 한 마지기에서 쌀이 한 석도 안 나왔던 것이다. 조선시대 수확량은 이보다 훨씬 적었다. 수확량이 적었으니,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에 비해 쌀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보면, 쌀 50석을 국가에 헌납하고 자기 비용으로 함길도까지 운반하는 것은 대단한 경제력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국가가 노비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제법 많은 수의 노비들이 꽤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너무 많은 노비들이 이 제안에 호응하는 바람에 국가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조정에서는 위의 조치를 시행한 지 2개월 만인 세조 13년 9월 10일(1467. 10. 7.)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 함길도에 군수물자를 제공함으로써 생기는 군사상의 이익보다는 노비들을 대거 면천시킴으로써 생기는 체제상의 불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부유한 노비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재벌들이 거액의 성금을 내는 일이 있다. 이것은 재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는 일이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재벌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도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부자들이 재산을 헌납하곤 했다. 그런데 노비들이 거액을 헌납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충청도 진천에 사는 사노비 임복은 기근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자 곡식 2,000석을 바쳐 성종에 의해 면천을 받기도 했다.1)

 

이 일이 전국의 부자노비들에게 큰 영향을 준 모양이다. 한 달도 안 돼서 충분한 양의 곡식이 모아진 것을 보면, 적지 않은 수의 부자노비들이 기부 대열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뒤늦게 이 대열에 동참한 사노비가 있었다. 전라도 나주의 남평에 사는 가동이란 노비도 임복과 똑같이 2,000석의 곡식을 납부한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이번에는 임복과는 다른 명을 내렸다. 이미 충분한 양의 곡식을 모았으니 더는 면천을 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2)어쨌든 이처럼 부유한 노비들의 존재를 사료에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장흥고 노비와 관련해 그의 재산 증식이 상업 경영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상업 외에 농업 경영도 재산 증식의 주요 방법 중 하나였다. 직접 농사를 지어 돈을 버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부유한 양인의 대토지를 관리해주는 방법으로도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수건이 엮은 《경북지방 고문서 집성》에 담긴 하씨(河氏) 여인의 〈화회문기(和會文記)〉(재산분배 문서)에서 그런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에 작성된 이 문서에 따르면, 김부필(金富弼)이란 이의 미망인인 하씨는 대토지를 소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런데 하씨 집안의 전답은 100여 년 전부터 노비가 관리했다. 일종의 마름이 이 집안의 토지를 관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고 하씨 집안의 감독이 느슨해지니, 이 집안의 토지는 어느새 노비의 실질적 소유로 넘어가고 말았다. “태반이 줄어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토지가 노비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조선이란 나라를 실무적으로 운영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다름 아닌 노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가 직접 토지를 관리하기보다는 노비가 권한을 위임받아 대신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주인의 토지를 은근히 잠식해서 자기 재산을 증식하는 노비들도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노비들도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국가 입장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는 제대로 운영될 수 없는 것이 국가다. 노비들 중에도 가진 자들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들의 재산권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농업생산과 그로 인한 조세 수취를 기대할 수 없었다.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을 경우 노비주가 노비의 재산을 빼앗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노비의 노동에 근간을 둔 경제체제가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세조 4년 1월 30일자(1458. 2. 13.) 《세조실록》에서는 노비의 재산을 보호해주려는 국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노비주가 노비의 재산을 함부로 침탈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 사례를 통해 노비든 양인이든 가진 자를 배려하는 국가의 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노비들 중에도 재산을 축적한 이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유한 노비의 모습을 전체 노비의 이미지에 대입해서는 안 된다. 부유한 노비가 적지 않았음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전체 노비의 일부에 불과했다. 노비는 주인이나 일반 양인에 비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는 그들의 재산이나 신체가 부당한 침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양인에 비해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도 적었고 재산을 지킬 수 있는 힘도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노비들은 양인들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번 장에서는 그것의 예외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각주
1 성종 16년 7월 24일자(1485. 9. 2.) 《성종실록》.
2 성종 16년 8월 30일자(1485. 10. 8.) 《성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