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여종의 사랑을 막은 김대섭 조선노비들

구름위 2014. 9. 2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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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의 사랑을 막은 김대섭

 

 

16세기에 덕개(德介)라는 여자 노비가 살았다. 김대섭(金大涉, 1549~94)이란 이의 사노비로 외거노비였던 듯하다. 김대섭은 경상도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 종2품)를 지낸 김윤종(金胤宗)의 손자로 서른다섯 살에 소과에 합격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대과 응시는 포기했다. 임진왜란 때 자진해서 선조 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조지서별제(종6품)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 격무로 사망했다.

 

덕개가 사랑한 남자가 있었는데 허봉(許篈, 1551~88)이었다. 유명한 문인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자 허균(許筠)의 형이었다. 허봉 역시 재주가 탁월했는데 스물세 살 때 선조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기도 했다. 사가독서란 왕이 신하에게 휴가를 주어 글을 읽도록 하는 제도로 세종 때 집현전 학사 중에서 우수한 이에게 학문 연구를 위한 휴가를 준 데서 비롯됐다. 허봉이 살았던 16세기에는 국가에서 두모포(豆毛浦,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 동호당(東湖堂)이란 건물을 지어 그곳에서 사가독서를 하게 했다. 지금도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 혹은 독서당길이라 한다. 허봉은 학문적으로뿐 아니라 당쟁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동인당(東人黨)의 선봉이 되어 활약했던 것이다. 서른네 살 때는 서인당의 율곡 이이(李珥)를 탄핵했다가 함경도로 유배되기도 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덕개와 허봉이 처음 만난 것은, 허봉이 함경도에 귀양 갔다 돌아온 직후인 1585년 무렵이었다. 둘은 만나자마자, 금세 활활 타올랐다. 명망이 높은 관료인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이 두 남녀를 두고 풍마(風馬)라고 놀릴 정도였다. 풍마란 발정 난 암말과 수말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이들의 열애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덕개는 허봉이 아니라 김대섭의 노비였다. 그렇기 때문에 덕개의 혼인은 주인인 김대섭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래서 김대섭의 의사가 이들의 사랑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대섭도 덕개를 좋아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번 가정해보자. 만약 허봉이 일반 평민이었다면, 김대섭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이 결혼할 경우, 거기서 생긴 자식은 어머니의 주인에게 귀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 노비의 주인으로서는 자기 노비가 양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덕개가 허봉과 혼인하는 경우에는 사정이 좀 복잡해진다. 허봉의 사회적 지위가 높기 때문에, 김대섭이 덕개의 아이를 데려가기가 힘들 수도 있었다. 당시 허봉은 동인당의 선봉장으로 요즘 말로 하면 정당 원내대표 정도의 인물이었다. 김대섭은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아직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봉을 상대로 덕개의 아이를 빼앗아올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허봉이 아이를 순순히 내준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녹록하지 않은 싸움을 각오해야 했다. 법적으로는 아이를 빼앗아올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김대섭으로서는 덕개와 허봉의 만남을 방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책이었다.

 

물론 허봉의 입장에서 덕개의 주인인 김대섭의 반대는 덕개 부모의 반대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런 우려는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허봉은 말을 보내 덕개를 자기 집에 데려가려 했다. 첩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앞에서 덕개가 외거노비였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덕개가 노비주와 함께 거주하는 솔거노비였다면 허봉이 함부로 말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보를 입수한 김대섭이 제지에 나섰고 그 결과 덕개는 그대로 집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덕개와 허봉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비의 사랑과 결혼은 노비 자신의 의지나 판단만으로 성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비의 사랑과 결혼은 주인의 이해관계와 직결되기 때문에 주인에게 불이익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노비는 물건으로 취급되었으니, 그들의 사랑과 결혼도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비의 사랑과 결혼을 제약하는 것은 노비주만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권력까지 나섰다. 이어지는 항목에서 그 실상을 확인해보자.

 

국가가 강제이혼을 시킨 노비들

 

 

노비는 신분적으로 남에게 예속된 존재였기 때문에, 결혼문제에서도 제약을 많이 받았다. 경제력이나 지위가 높아진 노비들은 그렇지 않은 노비들에 비해 제약을 덜 받았겠지만, 이들 역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경제력이나 지위를 보유한 배우자를 고르려면, 아무래도 노비라는 신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비 입장에서 가장 편한 선택은 같은 주인을 둔 이성을 고르는 것이었겠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같은 주인 밑에 있다고 해서 연정이 무조건 생길 리는 없었다. 노비의 결혼에 가해진 제약을 이것저것 논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노비의 결혼에 관한 법적 제약만 살펴보기로 하자.

 

법에서 제약을 둔 결혼 형태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이다. 이런 경우의 일차적 동기는 노비 숫자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녀의 신분은 원칙상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했으므로, 이런 결혼을 인정할 경우 자식은 모두 양인이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노비의 숫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 양인 남자들의 ‘자존심’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양인 여자를 노비들한테 빼앗기지 않으려는 동기도 작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관련 규정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 《고려사》 〈형법지〉에서는 정확히 언제부터 금지했는지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을 방조한 노비주나 가장을 처벌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이런 형태의 결혼을 금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법제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년 7월 27일(1401. 9. 5.)에는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 금지를 분명히 하고, 이를 위반한 남녀는 강제로 이혼시키도록 했다. 관련자를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이혼을 시키기로 했으니 고려시대에 비해 한층 더 엄해졌다고 볼 수 있다.

 

태종 6년 1월 1일(1406. 1. 20.)부터는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결혼한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을 강제로 이혼시키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모두 공노비로 만들었다.1) 단, 예외 규정이 있었다. 남자 노비가 사노비일 경우, 이 규정이 노비주에게 재산상의 손실을 주게 된다. 그래서 남자 노비의 주인이 이 사실을 몰랐을 경우, 남자 노비는 그대로 사노비로 두도록 했다. 이 규정은, 노비주들이 자신의 노비가 양인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태종 13년 9월 1일(1413. 9. 25.)에는 태종 6년 조치에 비해 다소 완화된 규정이 나왔다. 남자 노비와 혼인한 여자 양인이 공노비가 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두 남녀가 강제 이혼을 당하는 것과 남자 노비 및 그들의 자녀를 공노비로 만드는 조치는 여전했다. 여자 양인의 신분만 보호한 것이다. 이 조치는 태종 6년 1월 1일에 언급한 법령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남자 노비의 경우에는 노비주가 결혼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공노비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면서 여자 양인만 공노비가 되도록 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 양인의 신분을 그대로 인정했던 것이다.

 

단종 2년 5월 8일(1454. 6. 3.)에는 남자 사노비가 여자 양인과 혼인하면 그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귀속시켰다. 남자 사노비는 종전대로 공노비가 되도록 했다. 물론 주인이 결혼 사실을 몰랐을 경우에는 예외였다.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주도록 한 것은 노비주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조치였다. 신랑인 남자 사노비를 국가가 데려가는 대신, 그 자녀를 사노비의 주인에게 줌으로써 노비주의 손해가 최소화되도록 한 것이다. 한편, 남자 공노비와 여자 양인이 결혼할 경우에 취해진 조치는 태종 13년 9월 1일의 것과 똑같았다.

 

이때까지 발포된 법령들이 《경국대전》 〈형전〉에 통합적으로 규정되었다.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이 혼인하면 이들을 강제로 이혼시키는 동시에 남자 노비를 공노비로 만들었다. 단, 남자 노비가 사노비이고 노비주가 자기 노비의 결혼 사실을 몰랐을 경우만은 신랑을 공노비로 만들지 않았다. 여자 양인은 그대로 양인 신분을 보유했다. 자녀의 법적 처리는 두 가지 경우로 나뉘었다. 남자 노비가 공노비인 경우에는 자녀를 공노비로 만들고, 남자 노비가 사노비인 경우에는 자녀를 사노비로 만들었다. 산속에서 숨어 살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결혼은 꿈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노비는 노비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법을 위반한 혼인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법에서 엄단했던 것이다.

 

각주
1 태종 5년 9월 22일자(1405. 10. 14.) 《태종실록》. 이때 취해진 조치는 태종 6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