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노비 자녀들의 운명

구름위 2014. 9. 2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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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자녀들의 운명

 

 

노비와 노비 혹은 노비와 양인이 결혼하면 그 자녀는 노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자주 거론된다. 이때마다 종모법이니 종부법(從父法)이니 하는 용어들이 나온다. 종모법과 종부법의 역사적 변천을 고찰하기에 앞서, 구체적 사례를 살펴본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 때 김무(金務)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죽기 전에 225명의 노비를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다. 노비를 225명이나 두었다면 오늘날로 치면 대기업이었다. 앞에서 2009년 현재의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에 따르면 300명 이상의 상시 근로자를 둔 제조업체는 대기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225명의 노동자를 둔 김무 가문은 중소기업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세종시대 인구는 오늘날 인구의 14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가통계포털(http://kosis.kr)에 따르면, 2010년의 내국인 인구는 47,990,761명이다. 권태환·신용하의 연구1)에 따르면, 세종 11년인 1429년의 추정인구는 6,435,000명이다.

 

오늘날의 인구가 세종시대 인구의 7.5배가 되니, 세종시대의 225명은 오늘날의 1,688명 정도는 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을 본다면, 김무 집안이 ‘농업 대기업’이었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다시 말해, 김무의 노비들은 당시로서는 꽤 잘 나가는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들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집안의 실상은 당시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방편이 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김무 집안의 노비 자녀들이 법적으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가 김무가 남긴 분재기에 남아 있다. 《경북지방 고문서 집성》에 있는 〈김무 도허여문기(金務都許與文記)〉란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 역시 한문뿐 아니라 이두로도 작성되었다. 이 분재기는 세종 11년인 1429년에 김무가 자손들에게 상속한 노비들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분재기 속에서 노비 자녀들의 운명을 살펴보자.

 

가. 장남인 고(故) 서령(署令) 탄지(坦之)의 몫
나. 아버지 쪽에서 전해오는 것
다. 여노비 범장의 소생인 여노비 반이, 나이 마흔 살
라. 같은 여노비 반이의 소생인 남노비 묘동, 나이 여덟 살
마. 다음 소생인 남노비 작연, 나이 여섯 살
바. 다음 소생인 여노비 작덕, 나이 두 살
사. 죽은 남노비 백동과 양인 아내가 낳은 자식인 여노비 막장, 나이 열두 살
아. 죽은 여노비 석이의 소생인 남노비 조송, 나이 열 살
자. 여노비 가질가의 소생인 남노비 금록, 나이 스물다섯 살
차. 죽은 남노비 한문과 양인 아내인 복수 사이의 소생인 여노비 나화이, 나이 미상
카. 같은 여노비인 나화이의 소생인 남노비 성춘, 나이 두 살


각 행의 항목 표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필자가 임의로 붙였다. 여기에는 김무의 장남인 김탄지에게 배당된 노비들의 신상명세서가 제시되었다. ‘서령’이란 관직을 가리킨다. 명칭이 ‘서(署)’로 끝나는 관청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고(故)’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김탄지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정확히 말하면, 김탄지의 아내와 자손들에게 배당된 노비들에 대한 내용이다.

 

‘아버지 쪽에서 전해오는 것’이라는 표현은 김무가 자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들임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노비 문서에는 노비주가 어떤 경로를 통해 노비를 취득했는지를 반드시 표시했다. 이 문서에서처럼 아버지에게 받은 것인지 어머니에게 받은 것인지 등등을 표시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김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 중에서 김탄지에게 물려준 노비는 훨씬 더 많다. 이 글에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일부만 제시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지만 김무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 외에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노비 중 일부도 김탄지에게 배당했다.

 

위에 적힌 노비 아홉 명을 보면, 부모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녀는 어떻게든 노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분재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여노비인 범장, 반이, 석이, 가질가, 나화이의 남편이 누구인지 표시되지 않았다. 이는 여노비의 경우에는 남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노비 본인에게는 자기 남편이 누구인지 중요했겠지만, 적어도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노비가 어떤 남자와 관계를 가졌든 그들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는 무조건 주인의 소유의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라’에서 ‘바’ 항까지를 자세히 음미해보자. 이 부분은 여노비 반이의 자녀들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이름이 어째 좀 이상하다. 묘동, 작연, 작덕이다. 둘째와 셋째는 ‘작’ 자 돌림이다. 이들의 성별은 다르다. 둘째 작연은 남자아이고, 셋째 작덕은 여자아이다. 그러면서도 남자아이인 첫째의 이름에는 ‘작’ 자가 없다.

 

이는 당시 여노비들의 성관계 혹은 혼인 실태를 반영한다.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여노비가 아이를 ‘무조건’ 많이 낳는 게 이익이었다. 그래서 자기 집 여노비가 밖에 나가 남자들을 많이 사귀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노비들 중에는 이 남자 저 남자와 복잡하게 얽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에서 소개한 김대섭은 덕개와 허봉의 사랑을 반대했다. 그것은 허봉이 고위층이라서 자칫 덕개는 물론 덕개의 자녀까지도 빼앗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김대섭이 덕개를 짝사랑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재산인 노비를 늘릴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된다면 노비주로서는 여노비의 ‘애정 행각’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여노비가 솔거노비라면, 노비주가 배후에서 이런 조종을 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여노비의 출산에 대한 노비주들의 반응은 ‘환영’이었다. 여노비 반이가 낳은 자녀들의 이름에서 좀 이상한 느낌이 나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반이의 세 자녀 중에서 작연과 작덕만 돌림자를 사용한 것은 이들과 묘동의 아버지가 다를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반이는 묘동의 친부와 관계를 갖다가 작연과 작덕의 친부와 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다. 여노비가 낳은 아이는 무조건 주인의 노비가 되는 시대였기에, 반이가 이 남자 저 남자와 관계해서 여러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애정행각을 숨길 필요도 없었던 것은 그것이 당연시됐기 때문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세 아이의 친부들이 양인인지 노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양인 중에서도 고위층 양반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양인에 불과하다면 이것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낮았다.

 

‘사’ 항과 ‘차’ 항에는 양인 여성과 결혼한 남노비들에 관한 정보가 나온다. 양인 여성과 결혼한 것을 볼 때, 이들은 일반 노비들보다 경제력이 좋았을 가능성이 있다. 외모가 좋았거나 언변이 탁월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경제력이 높았으리란 추정이 좀더 현실적이다. 높은 경제력으로 양인과 결혼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외거노비로서 재산을 축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관계에서 태어난 나화이(‘차’ 항)의 나이를 주인집에서 파악하지 못한 것을 보면, 남노비 한문이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남노비와 여성 양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무조건 노비였다.

 

분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인 경우 자녀는 어떻게든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서얼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본 것처럼, 아버지가 고위층 양반이고 과거시험을 준비할 만한 경제력이 있는 경우에는 신분상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 역시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가 무조건 노비가 될 수밖에 없는데도, 어머니를 따르는 종모법이니 아버지를 따르는 종부법이니 하는 논쟁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각주
1 권태환·신용하, 〈조선왕조시대 인구추정에 관한 일시론(一試論)〉, 《동아문화》 14집,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324쪽.

 

종모법이냐 종부법이냐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은 여진족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 〈희종본기(熙宗本紀)〉에 근거한 “사람이 의심스럽거든 쓰지 말고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用人勿疑(의인물용용인물의)]”란 문구를 인재채용의 금과옥조로 삼았다고 한다. 〈희종본기〉에는 “의인물사 사인물의(疑人勿使使人勿疑)”라고 되어 있다. 원문의 사(使)가 용(用)으로 바뀐 것이다.

 

노비제 사회의 경영인들은 인재채용에 대해 오늘날의 기업만큼 많이 고민하지 않았다. 직원 중 상당수가 ‘채용’이 아니라 ‘출산’으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주인이 직접 출산하는 게 아니라 직원이 출산해주었다. 여노비만 많이 있으면 신입사원 채용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의 기업에서 고민하는 인재채용의 문제가, 노비제 사회에서는 여노비 관리를 통해 자연스레 해결되었던 것이다. 여노비만 잘 관리하면 직원 충원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 셈이다.

 

노비주들의 이 같은 이해관계를 반영한 조치가 최초로 나온 것은 고려 제10대 정종 때였다. 《고려사》 〈형법지〉에서는 “정종 5년(1039), 천것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고 했다. ‘천것은 어머니를 따른다’란 문장의 한문 표현인 ‘천자수모(賤者隨母)’를 따서, 학계에서는 이 법을 천자수모법이라 부른다. 고려시대의 천자수모법과 조선시대의 종모법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지만, 둘 사이에는 뉘앙스의 차이가 약간 있다. 이 점은 뒷부분에서 설명한다.

 

1039년에 나온 천자수모법은 기존의 사회관행을 성문법규에 담은 것뿐이다. 이미 그 전부터 노비의 자녀는 어머니의 주인에게 종속되었다. 여자 노비와 남자 노비가 성관계를 맺거나 혼인을 하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여자 쪽 주인에게 귀속되었던 것이다.

 

그럼, 부모 중 한쪽만 노비인 경우는 어떻게 됐을까? 이런 경우는 법으로 금지되었다. 노비와 양인의 혼인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성 상당수가 노비인 상황에서 노비와 양인의 결혼 내지는 성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길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대비한 관습법이 있었다. 관습법의 내용이, 몽골 간섭기 때 충렬왕이 몽골제국에 보낸 문서에서 나타난다.

 

《고려사》 〈형법지〉에 따르면, 충렬왕 26년 10월(1300. 11. 13.~12. 11.) 몽골제국이 고려의 노비제도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다. 몽골이 자국의 관할 혹은 영향권에 있는 민족들에게 제도개혁을 요구한 사례는 많이 발견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몽골제국 제4대 카칸(황제)인 몽케(재위 1251~59)는 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있는 하미(카물)란 지역을 상대로 문화개혁을 요구했다. 나그네에게 아내를 제공하는 풍습을 개혁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몽골은 고려에 대해서도 제도개혁을 주문했다. 고려의 노비제도가 몽골인들의 눈에는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충렬왕은 ‘노비제도는 이미 오래된 관행’이라며 개혁을 거부했다. 그렇게 거부 의사를 밝히는 중에 그는 “천인들의 경우는, 아비나 어미 중 한쪽이 천하면 곧 천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는 무조건 노비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을 한쪽이 천하면 무조건 천하다는 의미의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리’라 한다. 어머니만 노비인 경우에는 일천즉천의 원리와 천자수모의 원리가 동시에 적용되었다. 그래서 그 자녀는 어머니 쪽의 노비가 되었다. 아버지만 노비인 경우에는 일천즉천의 원리만 적용됐다. 그래서 그 자녀는 아버지 쪽의 노비가 되었다.

 

일천즉천의 원리는 노비주들에 의해 악용되었다. 그들은 이것을 노비 확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12세기 이후 귀족들과 불교 사원들이 노비 숫자를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일천즉천의 원리를 이용해서 여노비와 양인의 혼인 내지 성관계를 부추겼다. 이런 현상은 고려왕조의 멸망을 초래한 핵심 요인 중 하나였다. 병역과 납세 의무를 지는 양인들이 줄어들고 귀족이나 불교 사원의 지배를 받는 노비들이 늘어났으니, 국가가 병사나 세금을 모으기가 어려워졌던 것이다. 고려 말의 국방이 사실상 사병에 의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노비들을 대거 보유한 민간 귀족들이 자체적으로 사병을 키웠던 것이다. 이런 사병들은 조선 태종 때 가서야 꼬리를 감추었다.

 

일천즉천의 원리로 고려왕조가 붕괴한 것을 목격한 조선왕조에서는 양인의 수를 늘리고자 노비제도를 개혁했다. 조선왕조는 기존의 천자수모법에 종부법을 결합하는 절충안을 채택했다. 이것이 이른바 종모법이란 것이었다. 이 제도는 천자수모법을 바탕으로 하면서 여기에 종부법을 결합시킨 형태였다. 그러므로 종모법과 종부법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전자가 후자를 포괄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이런 절충안이 나온 때는 태종 14년 6월 27일(1414. 7. 13.)이었다.

 

이날 나온 조치는 ‘공·사 노비가 양인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아버지를 따라 양인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노비 자녀의 신분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하되, 아버지가 양인인 경우에만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도록 한 것이었다. 노비 자녀의 신분은 원칙상 천자수모법에 의거하도록 하되, 아버지가 양인인 경우에만 종부법에 의거하도록 한 것이다. 아버지가 노비인 경우에는 천자수모법에 따랐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노비 여자와 양인 남자의 자녀, 즉 얼자가 종부법에 따라 양인 신분을 받으려면 보충군에서 복무해야 했다. 보충군은 오늘날로 치면 방위병이나 공익근무요원에 해당했다. 보충군의 주된 역할은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다. 태종은 고려 말에 설치된 적이 있는 보충군을 태종 15년 3월 8일(1415. 4. 17.) 새로 설치하면서 얼자들을 여기에 소속시켰다. 보충군 복무는 얼자들에게는 면천의 통과의례였던 것이다.

 

초기에는 서민층 얼자든지 특권층 얼자든지 똑같이 보충군을 거쳐 양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평등이 세종 때부터는 사라졌다. 세종 14년 3월 26일(1432. 4. 26.)에는 아버지가 관료·생원·과거합격자 등인 경우에만 원칙상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어떤 서적들에서는 양반의 아들만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양반’의 아들이 아니라 ‘관료’의 아들이다.

 

양반은 관습적 개념이고 관료는 법제적 개념이었으므로, 이 둘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당시 이런 법령을 통과시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양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형평성 때문이었다. 남자 노비와 여자 양인의 혼인은 금지하면서,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의 혼인은 인정하고 그들 사이에서 생긴 자녀를 양인으로 만드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1432년부터는 원칙상 관료 등의 얼자에게만 양인 신분을 인정했지만 예외 조항도 있었다. 일반인이 마흔 살을 넘어 자녀를 낳은 경우에는 그 자녀도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가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세조 5년 8월 29일(1459. 9. 25.)에는 혜택의 범위를 축소시켰다. 관료·생원·과거합격자 등의 얼자에게는 동일한 혜택을 주되, 일반인의 얼자에 대해서는 혜택의 범위를 줄였다. 종전에는 일반인이 마흔 살 이후에 낳은 자녀도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지만, 이때부터는 이 부분에 제약을 두었다. 마흔 살을 넘어서 낳은 자녀 가운데 제사를 승계할 아들에게만 양인이 될 기회를 주었다. 그동안 양인의 숫자가 많이 불어났기 때문이다.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어느 정도까지 양인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 논의되었다. 양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다 싶으면 그 범위를 다시 제한하고, 노비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다 싶으면 그 범위를 다시 확대했다. 노동력 수급 사정에 따라 종부법의 혜택 범위가 조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을 부모로 둔 자녀는 국가의 노동력 사정에 따라 노비가 될 수도 있고 양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자 노비와 남자 노비의 자녀는 종모법의 적용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여자 양인과 남자 노비의 혼인은 국가에서 금했으니 그들의 자녀는 법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논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아버지가 관료였던 홍길동 같은 얼자들은 그 자신은 무척 불행했을지 몰라도, 일반적인 노비 자녀들이 보기에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보충군 근무만 무사히 마치면 양인 신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보충군에서 얼마나 근무해야 양인 신분을 얻을 수 있었을까? 보충군 설치 당시의 복무기한은 사료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보충군의 복무기한이 명시된 때는 세종 31년 4월 14일(1449. 5. 5.)이었다. 세종이 죽기 1년 전이다. 이 날짜 《세종실록》에서는 보충군의 복무연한이 10년으로 확정된다고 했다. 이것은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근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문종실록》에서는 해마다 윤번제로 근무했으며 근무일은 최고 70일 정도라 했으니1) 계산해보면 복무연한 10년 동안 근무 일수는 많으면 700일이 된다. 하지만 1년에 70일은 결코 적은 날이 아니었다. 평균 5일 중 하루를 복무해야 했으니, 생계에 허덕이는 서민들은 근무 일수를 채우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부유층 얼자들만 보충군 복무를 끝내기가 쉬웠다고 봐야 한다.

 

복무연한을 10년으로 명시한 이 규정은 문종 즉위년 12월 6일(1451. 1. 8.) 개정되었다. 근무 일수가 1,000일이 되면 ‘제대’를 시켜준 것이다. 근무 일수를 빨리 채우는 사람은 빨리 제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개선’이었다. 하지만 근무 일수가 종전의 700일에 비해 1,000일로 늘어났다는 점에서는 ‘개악’이었다. 당사자들로서는 이 역시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1,000일을 채워야 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관료인 경우에는 관품에 따라 300일이나 500일만 근무할 수 있도록 혜택을 주었다. 그 외의 얼자들은 1,000일을 다 채워야 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10년 700일 규정보다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1,000일을 다 채우려면 10년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이 소요되었을지도 모른다. 보충군을 통한 면천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요원한 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문종 즉위년 12월 6일자(1451. 1. 8.) 《문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