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한성 최고 기생, 성산월

구름위 2014. 9. 26.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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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최고 기생, 성산월

 

 

16세기에 성산월(星山月)이란 유명한 기생이 있었다. 본래 경상도 상주 기생이었다. 관청의 기생이었는지 일반 유흥업소의 기생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는 “날씬하고 뽀얗고 수려”해서 당시 최고의 기생이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덕분에, 나중에는 한성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한성으로 옮긴 그는 고급 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웬만한 남자는 얼씬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성산월이 어느 정도나 예뻤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성산월이 한강에서 고위 인사들과 뱃놀이를 했다. 놀이가 끝난 뒤 술판이 벌어졌는데 그 자리가 지겨워서였는지 아니면 시간이 늦어서였는지, 성산월은 남자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그 자리를 몰래 빠져나갔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소매가 반쯤 젖은 상태에서 숭례문에 당도했지만,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성문은 새벽 4시 무렵에 열고 밤 10시 무렵에 닫았다. 성산월은 밤 10시 이후에 숭례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성문은 닫히고 비는 쏟아지니, 이래저래 마음이 급했던 그는 어느 집 처마 밑에 있는 불 켜진 창문에 접근했다. 창 안쪽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보니, 글을 읽는 젊은 선비가 보였다. 성산월은 작게 헛기침하며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이 선비는 김예종(金禮宗)이란 청년이었다. 소과 합격자 명부인 《사마방목(司馬榜目)》을 보면, 김예종은 1552년 진사시험과 1564년 대과에 합격했다. 또 선조 21년 7월 12일자(1588. 9. 2.) 《선조실록》에는 사간원이 “충주목사 김예종은 그릇이 적합하지 않으니 해임하십시오”라고 건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100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성산월의 방문을 받은 선비는 바로 그가 아닌가 생각한다.

 

빗소리와 함께 들리는 인기척에 의아함을 느낀 김예종은 창문을 열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예쁜 여자가 비를 맞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여자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하룻밤 자고 갈 수 있겠냐’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김예종은 눈앞에 닥친 상황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고 생각한 그는 ‘이는 필시 여인이 아니라 도깨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게 짐작한 그는 “어떤 괴물 도깨비가 감히 와서 사람을 현혹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성산월은 자존심을 무릅쓰고 ‘내가 그 유명한 성산월’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모르나 본데 내가 바로 그 성산월이니 제발 하룻밤만 재워달라”며 부탁했다.

 

그러나 김예종은 성산월의 부탁을 거부한 채 밤새도록 벌벌 떨며 귀신을 쫓는 주문을 외웠다. 성산월은 비가 쏟아지니 어디 가지도 못하고 성문이 열릴 때까지 그 집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날이 밝자 성산월은 창문을 밀치고 몇 마디 쏘아붙인 뒤 그 집을 떠났다. ‘너 같이 한미한 서생이 어찌 나를 알겠느냐? 너는 정말 복도 없는 남자다! 잘 보아라! 어딜 봐서 내가 귀신이냐?’라며 쏘아붙인 것이다. “김예종은 그릇이 적합하지 않으니 해임하십시오”라는 사간원의 건의처럼, 성산월도 김예종을 한심하고 시시한 남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날 밝은 뒤에야 실상을 깨달은 김예종은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후회했노라고 《어우야담》은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김예종의 성격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산월이 무척 예뻤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주 기생이었던 성산월이 한성으로 진출하고 또 고위층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선비가 귀신으로 착각할 정도의 대단한 미모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런 성산월의 명성을 일거에 무너뜨린 남자가 있었다. 성산월을 ‘차지’한 남자가 아니라 성산월을 ‘무너뜨린’ 남자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성명 미상의 일개 노비였다. 장흥고 소속의 공노비로 알려진 남자다. 장흥고는 궁중에서 사용할 물품을 조달하는 관청이었다. 이곳 소속의 관노가 성산월에 접근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신체적 콤플렉스도 갖고 있었다. 호리병처럼 생긴 큰 혹이 목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외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그에게는 상당한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성산월을 자기 여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목에 큰 혹이 있는 노비의 여자가 되었으니 당대 최고의 기생이라는 성산월의 명성이 일거에 붕괴된 것은 당연했다.

 

당대 최고의 기생을 자신의 여자로 만든 그 노비는 돈이 매우 많았다. 《어우야담》에서는 “재산이 거만(鉅萬)이었다”고 했다. 이 표현만으로는 재산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고위층 인사들을 제치고 성산월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던 모양이다.

 

《어우야담》에서는 성산월의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치적으로 생각할 때, 크게 두 가지 루트가 있다. 만약 납공노비였다면, 그는 농업보다는 상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선상노비였다면 근무 외 시간에 상업 같은 것을 경영할 수도 있었지만, 돈을 벌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일종의 조달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업무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개 관노가 당대 최고 기생을 유혹할 정도의 재산을 보유했다는 사실이다. 사극 속의 노비들은 좁은 방에서 별다른 재산도 없이 살지만, 이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노비들 중에는 상당 규모의 재산을 모은 이들도 있었다. 이어지는 항목에서, 노비의 재산 보유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