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노비와 주인 간의 형사 문제

구름위 2014. 9. 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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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와 주인 간의 형사 문제

 

 

현행 대한민국 형법 제32장의 제목은 ‘강간과 추행의 죄’다. 그런데 제32장에는 외형상 강간이나 추행이 아닌 범죄도 있다. 제303조 1항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가 그러하다. “업무·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부녀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 규정은 업무·고용 등으로 인해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남성이 위계(僞計)와 위력(威力)을 사용해서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위력은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다.1)상대방의 ‘신체’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사용한 경우는 강간죄에 해당한다. 위력은 그런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않은 경우를 가리킨다. 예컨대, 고용주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면서 성관계를 요구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이런 경우 비록 강간은 발생하지 않았어도 고용인의 입장에서는 강제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강간죄와 같은 범주로 처벌하고 있다.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고용주의 범죄를 막겠다는 의지는 형법 제24장 ‘살인의 죄’에서도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지지만(살인죄), 상대방에게 자살을 지시하거나 상대방의 자살을 돕는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자살교사·방조죄). 생명을 침해했다는 점에서는 살인죄와 자살교사·방조죄는 다를 게 없지만, 후자를 더 가볍게 처벌하는 것은 자살자 본인의 의사에 따라 생명 침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2)그런데 업무상 우위에 있는 고용주가 위력을 사용해서 자살을 유도한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때는 자살교사·방조죄가 아니라 일반 살인죄로 취급한다(위계·위력에 의한 살인죄). 우월한 지위에 있는 고용주가 위력을 동원해서 고용인을 자살로 몰아가는 행위는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없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현대 법률에서는 고용주가 우월한 지위를 악용해 고용인의 정조나 생명을 침해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지만, 노비제 사회에서는 정반대였다. 현대 노동자 사회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고 있지만, 과거 노비제 사회에서는 그런 ‘액션’마저 취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노비주의 입장을 옹호했다. 노비주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고용인의 생명·신체를 침해하는 것을 묵인하고 합법화했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조선시대 법률규정을 살펴보자.

 

노비주가 위해를 가한 경우: 《대명률직해》 권20의 제목은 〈투구(鬪毆)〉다. 싸움과 구타에 관한 규정이다. 이에 따르면, 노비주가 노비를 구타한 경우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구타로 인해 사망의 결과가 발생했을 경우에만 처벌을 가했다. 현행 형법으로 말하면 폭행은 처벌하지 않고 폭행치사만 처벌한 셈이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리면, 원칙상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폭행치사가 발생했다고 해서, 노비주가 무조건 처벌받는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관청에 신고도 하지 않고 사망에 이를 정도로 폭행을 가한 경우에 처벌을 받았다. 사전에 신고해둔 경우라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 집 노비가 이러이런 죄를 범해서 혼 좀 내주겠다”고 신고하면, 노비가 죽더라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런 절차를 지키지 않고 노비를 죽인 노비주는 곤장 100대에 처했다.

 

하지만 이서구의 사례에서 봤듯이, 노비주가 신고 없이 노비를 죽여도 관청에서 눈감아주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폭행과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인정되면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노비가 주인의 폭행이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다고 인정되면 처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노비를 죽인 뒤에, 그 노비에게 지병이 있었고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주장하면(그래서 타당하다고 인정되면), 주인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현행 형법 제17조에서도 “어떤 행위라도 죄의 요소가 되는 위험발생에 연결되지 아니한 때에는 그 결과로 인하여 벌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A라는 행위와 B라는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해야만 A란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형법에서는 모든 범죄에 대해 제17조를 규정한 데 비해, 《대명률직해》에서는 노비의 범죄에 대해서는 이런 규정을 두지 않고 주인의 범죄에 대해서만 이런 규정을 두었다. 노비주에게만 형사특권을 인정한, 상당히 편파적인 규정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특권이 노비주뿐 아니라 노비주의 기복친(朞服親)과 외조부모에게도 인정됐다는 점이다. 기복친이란, 본인이 죽을 경우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할 2촌·3촌의 부모뻘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부모·백부모·숙부모 등을 가리킨다. 노비주와 이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노비를 폭행치사에 이르게 해도 노비주와 똑같은 특권을 향유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비는 자기 주인은 물론이고 그 집안의 어른들에게도 깍듯이 대해야만 했다. 괜히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서구의 노비처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주인이나 주인집 어른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행위는 염라대왕을 부르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노비주의 우월적 권리가 형법적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에, 노비는 주인이 아무리 가혹하게 노동을 시키고 아무리 가혹하게 수탈을 한다 해도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참을 인(忍) 자는 이런 경우를 위해 존재하는 글자였다.

 

선조의 사위 중에 신익성(申翊聖)이란 이가 있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그의 집에는 사위 홍명하(洪命夏)가 얹혀살고 있었다. 훗날 현종 때 좌의정이 된 인물로, 서른일곱에 대과 시험에 급제하기 전까지 처가에서 시험공부를 했는데, 그 동안 처가의 눈치를 얼마나 보고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신익성의 아들인 신면(申冕)은 홍명하를 무척이나 구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식사 시간이었다. 밥상이 차려지고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았다. 홍명하도 앉고 신면도 앉았다. 이때 이 집 노비가 실수로 홍명하의 숟가락과 신면의 숟가락을 바꾸어놓았다. 안 그래도 홍명하를 멸시하는 신면이 얼마나 화를 냈을까. 이 날 그 노비는 숟가락을 바꾸어놓았다는 이유로 신면에게 곤장으로 볼기를 맞았다. 이와 같은 경우에도 노비는 그저 ‘참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형법적으로 열악한 노비들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만한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성균관의 꼬마 노비들인 직동(재직)이 겪은 고난을 보여주는 시가 윤기의 반중잡영에 들어 있다.

 

깔깔 웃는 저 아이들 장난치기를 좋아해
매를 맞아 피 흘러도 아무렇지 않아 하네
손을 처마에 매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머리를 기둥에 치는 것은 견디기 힘들 텐데


위의 시를 쓴 뒤에 윤기는 아래와 같은 해설을 달아놓았다.

 

재직들은 모두 어린아이다. 더러는 조심성 없이 장난치다가 매질을 당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또 그 아이들의 손을 매달고, 심지어는 머리를 기둥에 치기도 한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꼬마 노비들이 장난을 치다가 잘못을 범하면 피가 날 정도로 매질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를 처마에 매달기도 하고 심지어는 머리를 기둥에 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하다”란 표현을 통해 이런 징계가 오래도록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같으면 아동학대죄에 걸릴 만한 일이다. 하지만 노비에 대한 폭행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던 세상이었기에, 나이 어린 노비들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가혹한 폭행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비가 위해를 가한 경우: 노비에게 위해를 가한 노비주는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반면, 노비가 해를 가한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대명률직해》 〈투구〉에 따르면, 노비가 주인을 폭행하면 목을 베는 참형에 처했다. 주인을 살해하면 사지를 찢는 능지처참형에 처했다. 고의 없이 과실치사로 주인을 죽이면 교수형에 처했다. 한편 고의로 상해를 가한 경우에는 곤장 100대를 쳐서 유배형에 처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주인의 집안 어른들에게 폭행·상해·살인을 가해도 웬만하면 사형에 처했다. 주인이 동일한 행위를 범할 때에 비해 노비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노비에 대한 법적 차별은 또 있었다. 《대명률직해》 권21에 의하면, 노비가 주인을 꾸짖거나 욕한 경우에는 교수형에 처했다. 이른바 ‘주인 모독죄’라고 할 만한 규정이다. 유신독재 시절의 국가기관 모독죄를 연상케 하는 규정이다. 국가기관 모독죄는 1975년부터 1988년까지 대한민국 형법에 존재했는데 대통령 같은 국가기관을 모독할 경우 이 죄로 다스렸다. 주로 국가원수 모독죄로 불렸다. 유신독재 시대에나 나올 수 있는 죄목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주인 모독죄는 이보다 한술 더 떴다. 대한민국의 국가기관 모독죄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로 다스려진 데 비해, 조선시대의 주인 모독죄는 교수형으로 다스려졌다. 군부독재 시절 대통령의 위신보다 노비제 시절 주인들의 위신이 더 크게 보호를 받은 셈이다. 오늘날에는 노사협상에서 노동조합 대표가 사장에게 삿대질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조선시대 같았으면 당장에 교수형에 처해질 만한 행위였다.

 

주인 모독죄의 혜택 역시 노비주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인의 집안 어른들도 이런 혜택을 향유했다. 다만 이들을 모독할 경우에는 교수형이 아니라 곤장이나 징역형을 가했다. 이서구의 노비는 술 취한 상태에서 ‘주인어른’의 이름을 불렀다. 교수형에 처해질 만한 범죄를 범한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국가가 교수형을 집행했어야 한다.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적으로 형을 집행한 이서구의 처사는 법에 저촉되는 행위였다. 그런데도 국가는 이서구의 개인적인 처형을 용인해주었다.

 

노비와 주인 간의 법적 지위를 한층 더 벌려 놓은 것은 노비의 고소권 제약이었다. 《경국대전》 〈형전〉에 따르면,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면 교수형에 처한다고 했다. 단, 주인이 반역이나 역모를 꾀한 경우만큼은 예외였다. 이런 경우는 신고를 하는 게 이익이었다. 그 외의 경우에는, 노비는 절대로 주인을 고발할 수 없었다. 아무리 부당한 침해를 당했더라도 고소만큼은 할 수 없었다. 노비가 직접 고소할 수 없었다면 가족이 대신 고소할 수는 없었을까? 그것도 안 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노비의 배우자가 대신 신고할 경우 곤장 100대와 유배형을 가하겠다고 했다. 곤장 100대를 맞으면 건장한 사내라도 버티기 쉽지 않았다. 노비의 고소권 제한은 설령 주인이 바뀐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노비가 전 주인을 고소해도 사형이나 곤장형 혹은 유배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노비는 주인을 어버이처럼 섬겨야 한다는 관념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은 《논어(論語)》에 근거한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섭읍(葉邑)을 다스리던 침제량(沈諸梁)이란 인물이 있었다. 흔히 섭공(葉公)이라 불린다. 그와 공자의 대화가 《논어》 〈자로(子路)〉 편에 나온다. 섭공이 공자에게 “우리 쪽에는 올바로 처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라면서 “자기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로서 이것을 증명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버지의 범죄까지 신고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서 칭찬한 것이다.

 

그러자 공자는 “우리 쪽의 정직이란 것은 이와 다릅니다”라며 “어버이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어버이를 위해 숨겨주니, 정직이란 이런 속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주자(朱子)는 “어버이와 자식이 서로 숨겨주는 것은 천륜과 인정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천륜과 인정을 따르는 속에서 정직도 있다는 것이 공자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맹자(孟子)》 〈진심(盡心)〉 편에도 나온다. ‘자기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면, 순임금은 어떻게 했겠느냐’는 요지의 질문을 받자, 맹자는 ‘순임금은 천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아버지를 몰래 업고 도망해서 바닷가에 숨어 살았을 것’이라는 내용의 답변을 했다. 차라리 숨어 살지언정 자식이 부모를 고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대명률직해》 〈소송〉 편에서는 자식이 부모나 조부모를 고소하면 곤장 100대 및 징역 3년에 처한다고 했다. 만약 고소의 내용이 거짓이면 교수형에 처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고소의 내용이 사실이라도 무조건 처벌했던 것이다. 다만 모반·대역 같은 범죄를 범한 경우에는 부모나 조부모일지라도 고소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자식은 어버이를 고소할 수 없다는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는 논리가 나온 것이다. 주인을 어버이처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식이 어버이를 고소하면 곤장 100대 및 징역 3년인 데 비해,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면 교수형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조선의 형법은 노비에 대해서만큼은 온통 차별뿐이었던 것이다.

 

국가가 노비와 주인을 법적으로 차별한 것은 단순히 신분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노비를 생산현장에 묶어두기 위한 데에 있었다. 노비와 주인에게 동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할 경우 노비주는 노비를 마음대로 착취할 수 없게 된다. 노비주가 노비를 마음대로 착취하지 못하면 산업 생산이 감소하고, 산업 생산이 감소하면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국가나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노비를 순한 양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서, 국가와 노비주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던 것이다.

 

각주
1 이재상, 《형법각론》(제7판), 박영사, 2010, 177~178쪽.
2 이재상, 《형법각론》, 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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