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비의 의무
솔거노비는 무형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반면에 외거노비는 원칙적으로 유형의 물건을 제공해야 했다. 그것이 쌀인지 면포인지 무명인지 금전인지는 주인과 노비가 결정할 문제였다. 영조 22년(1746)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 〈형전〉에서는 해마다 남자 노비는 면포 두 필, 여자 노비는 면포 한 필 반을 주인에게 납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좀 달랐다. 이미 18세기 현종 때부터 남자 노비는 한 필 반, 여자 노비는 한 필을 납부하도록 했다.
면포 한 필은 얼핏 들으면 별 것 아닌 것 같을 수 있다. 하지만 길이 35자(약 10.5미터)짜리인 면포 한 필은 대단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경상도 영덕군에서 1560년경에 논 한 마지기가 면포 세 필에 거래된 사례가 있고, 1578년경에는 3.6필에 거래된 사례가 있다.1) 조선 전기에는 면포 한 필로 논 3분의 1 마지기를 매매하는 사례도 있었다. 노비 가정에 노비가 적어도 세 명 정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노비 가정에서 해마다 논 한 마지기 이상의 세공을 바친 셈이 된다. 법률 규정보다 더 내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을 테지만, 법규만으로 보면 노비가 바쳐야 할 세공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노비 가정의 재산이 해마다 논 한 마지기 이상 늘어났을 리도 없는데, 주인집에서는 그 정도의 재산증식을 이루었으니, 노비들이 얼마나 심하게 착취를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가중한 착취를 당했으니, 노비들이 만성적인 가난에서 헤어나기는 힘든 일이었다. 가족이 중병에라도 걸리거나 가뭄이나 홍수 피해라도 한번 당하게 되면, 그나마 모아둔 재산을 다 탕진해야 했을 것이다.
노비는 법적으로 물건 같은 존재이므로, 국가에 대해 의무를 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부가적인 의무이기는 하지만, 국가는 이들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다.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과 속오군(束伍軍)에 편성된 것이다. 공·사 노비를 다 포괄한 잡색군은 조선 전기에, 사노비 위주로 운영된 속오군은 조선 후기에 있었다. 잡색군이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데 비해, 임진왜란을 계기로 성립한 속오군은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국가에 대가를 지급하고 속오군에서 빠지는 사노비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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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노비의 의무
공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분류된다. 《경국대전》 〈호전〉에서는 열여섯 살 이상 예순 살 이하의 납공노비는 여자인 경우는 면포 한 필 및 저화 열 장을, 남자인 경우는 면포 한 필 및 저화 스무 장을 납부하도록 했다. 선상노비의 경우, 한성에서는 2교대로, 지방에서는 7교대로 관청에 나가 근무하도록 했다. 관기의 경우에는 관청의 부름에 따라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여기서는 선상노비가 조선시대 행정의 근간이었다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윤기의 반중잡영을 읽다 보면, 조선의 행정이 사실상 이들에 의해 지탱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반중잡영에 “관비가 낳은 것은”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가 있다.
관비(館婢)가 낳은 것은 직동(直童)이요
시에서는 또 다른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반촌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성균관 노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관청의 노비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관청에 속한 노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성균관의 선상노비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성균관 노비일지라도 어머니가 다른 관청의 노비이면 자식은 어머니를 따라간다. 반촌의 꼬마들 중에는 어머니를 따라 성균관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다른 관청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반인들도 저마다 똑같지 않다”라 한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다른 비한테서 태어나면 이원으로 충원된다”는 구절이다. 반촌에서만 이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여타 지역의 노비들 속에서도 이원이 나왔다. 이원이란 무엇일까?
관리(官吏)란 말이 있다. 오늘날에는 관리와 관원을 동의어로 본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관리=관원+이원’으로 이해했다. 관원이란 과거시험이나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사람을 가리켰다. 이들은 나라로부터 봉급을 받았다. 이원은 관원 밑의 서리(書吏)나 아전 혹은 아역(衙役)이었다. 서리는 주로 문서를 다루는 사람들이고 아역은 심부름꾼 수준의 일꾼들이었다. 관원과 이원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원의 상당수는 노비였고 그들의 근무는 의무복무였다. 그래서 노비 출신의 이원은 봉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서리들에게 지방행정을 사실상 맡겨놓고도 봉급을 지급하지 않았다. 청나라를 예로 들면, 지방 관청에서 고용할 수 있는 정식 서리는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서른 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적게는 100명 이상, 많게는 1,000명 이상을 고용했다.1) 이 많은 사람들이 봉급을 받지 못했으니 부정부패가 심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청나라가 멸망한 지 6년 뒤에 완성된 루쉰(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에는 청나라 때의 부조리를 묘사한 문장이 나온다.
“지현(知縣, 지방장관)에게 칼 씌움을 당했던 자도 있고, 신사(紳士, 중국식 양반)에게 뺨을 맞았던 자도 있고, 아전에게 자기 마누라를 뺏긴 자도 있고, 부모가 빚쟁이에게 핍박 받아 죽은 자도 있는데”라는 부분이다. 봉급을 받지 못한 아전, 즉 서리들이 부정부패만 저지르는 게 아니라 지방민들을 괴롭히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을 쉽게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이 없으면 지방행정이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예조판서를 지낸 사람이 갑자기 병조판서가 됐다가 공조판서로 자리를 옮기는 것과 같은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컨대 세종대왕의 특급 참모였던 맹사성(孟思誠)은 예조·호조·공조·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이렇게 6조 판서를 두루 역임한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해당 부서의 실무에 능숙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고급 관직에만 비전문가들이 임명된 게 아니다. 하급 관직도 마찬가지였다.
일례로, 경전 지식이 해박하고 언변에 능했던 조광조는 중종 10년 6월 8일(1515. 7. 18.) 성균관의 추천으로 종6품인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임명되었다. 조지서란 종이 제작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공조 산하의 관청이고, 사지는 그곳 책임자였다. 조광조가 조지서 사지에 임명된 것은 그가 종이 제작에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비전문가들이 관원 자리를 차지하는데도 나라가 잘 운영됐던 것은, 각 관청의 이원들이 실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행정계획을 수립하고 문서를 처리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이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기 때문에 국가행정과 지방행정이 잘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시대처럼 서리가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권이 대부에게 있어도 아니 될 판국에, 더군다나 서리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당당한 제후의 나라로서 200년 왕업에 힘입어 공·경·대부가 많이 배출되었건만, 이제 정치를 하인들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가벼이 흘려버릴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극이나 역사소설에 나오는 노비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띠고 있지만, 조선이란 나라의 행정의 많은 부분이 이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니 모든 노비들이 무식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역할을 수행했는데도, 그들은 관에 얽매인 몸이라는 이유로 무보수로 일을 했다. 국가와 노비주로부터 착취를 당하면서, 무보수로 국가행정에 기여한 조선시대 노비들. 이들만큼 가련한 존재들이 또 있을까.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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