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노비들

구름위 2014. 9. 24. 13:49
728x90

옛 동료를 우연히 만난 김의동  

 

 

신분 세탁으로 재상까지 오른 노비 반석평에 관한 이야기가 앞에서 나왔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김의동(金義童)도 비슷했다. 김의동은 처음에는 노비였다가 나중에 적어도 종3품 부사 이상으로 승진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측면도 있다. 반석평이란 이름은 신분 세탁 후의 이름인 데 반해, 김의동이란 이름은 신분 세탁 이전의 이름이라는 점이다. 반석평은 자신이 노비 출신이라는 사실을 조정에 신고하여 사면을 받았다. 김의동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계속해서 신분을 숨겼다. 노비 김의동이 신분 세탁 후에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신분 세탁 사실을 끝까지 숨겼다는 점은 그의 관직 명칭이 허구로 처리된 데서도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에 나오는 김의동이 여기의 김의동일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부사 자리에 있는 ○○○가 노비 김의동이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었다면, 신분 세탁 이후의 이름과 관직 명칭이 어째서 허구로 처리된 걸까?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의동은 한성에 사는 신씨(愼氏)의 솔거노비였다. 《어우야담》에 실린 그의 고사에 향(鄕)이란 천민 거주지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 때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는 나무를 하거나 말에게 먹일 꼴을 베는 일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19세 때 주인집에서 탈출했다. “나무를 하고 꼴 베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고 《어우야담》은 말한다. 육체적으로 힘들어서보다는 적성에 안 맞아서 그랬던 듯하다. 노비 신분을 숨기고 종3품 부사까지 올랐다면,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다. 부사란 자리는 오늘날로 치면 대규모 기초자치단체장(1급)에 맞먹는 자리로 수원시장급이다. 웬만한 의지를 가진 노비라면 이런 자리는 꿈도 꿀 수 없다. 노비 출신으로 부사까지 오른 그였으니 고된 노동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의지가 있었다. 그런 그가 육체노동을 못 견딘 것은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정 가격으로 저화 4,000장, 쌀 80가마니짜리 젊은 노비가 도망을 갔으니, 신씨 집안에서는 어떻게든 김의동을 잡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상태로 10여 년이 흘렀다. 신씨 집의 업산(業山)이란 노비가 외거노비들에게서 세공을 징수할 목적으로 영남으로 떠난 뒤에 비로소 김의동의 소재가 드러났다.

 

충청도 괴산과 경상도 문경 사이에 ‘새재’란 고개가 있다. 조령(鳥嶺)이라고도 한다. 한성을 떠난 업산이 말을 타고 새재를 넘을 때였다. 웬 고관이 수행원과 군병들을 잔뜩 이끌고 행차하는 것이 보였다. “물렀거라!” 길을 벽제(辟除)하는 소리도 들렸다. 업산은 얼른 말에서 내려 길가에 엎드렸다. 하지만 고관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보았다. 순간, 업산은 놀랐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수업 시간에 짝궁과 장난을 치는 학생은 선생님이 자기 행동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탁에서는 학생들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다 포착된다. 업산은 자신이 훔쳐보는 것을 고관이 모르리라 생각했지만, 그가 고개를 쳐드는 순간 고관의 눈길도 그리로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업산과 고관의 눈길이 부딪혔다.

 

행렬이 지나간 뒤, 업산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따라가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의아함을 감추며 1리쯤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군병 몇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업산은 당황해서 넋이 나갔다. 군병들은 업산을 산골짜기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형 장막도 보였다. 거기서 고관이 나왔다. 그는 업산을 정중히 맞이했다. 그리고는 장막 안으로 데려갔다. 장막 안은 휘황찬란했다. 붉게 화장한 여인들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중드는 여인들이었다. 잠시 후 여인들이 커다란 상을 차려왔다. 진수성찬이었다. “제후의 부를 방불케 했다”고 《어우야담》은 말했다.

 

고관은 다시 한 번 공손히 읍(揖)한 뒤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 옛날 김의동이란다. 얼떨떨한 표정이 된 업산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김의동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주인집에서 도주한 뒤에 그는 신분 세탁부터 했다. 그런 다음에 최포향(崔浦鄕)이란 곳에서 정장(亭長) 생활을 했다. 정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여기서는 《세종실록》1)의 용례만 소개하겠다.

 

이에 따르면, 당시의 나루터에는 관장(官長)이나 정장 같은 간부 외에 나루치라는 일꾼이 있었다. 최포향의 포(浦)가 ‘물가’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김의동이 역임한 정장이란 것은 나루터의 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장 생활을 하던 김의동은 나중에 ‘녹림현감’에 올랐다가 ‘황주부사’로 승진했다. 황주부사로 근무하던 중에, 한성에서 내려오는 고관을 맞이하러 새재까지 나갔다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노비가 신분을 숨기고 나루터 간부로 시작해서 10여 년 만에 부사의 지위까지 올랐으니, 그가 얼마나 맹렬히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김의동의 임지였던 최포향, 녹림현(綠林縣), 황주부(潢州府)는 가공의 지명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반석평은 출세한 뒤 자신의 정체를 밝혔지만 김의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의동은 신분 세탁 후 이름이나 근무지를 숨겼다. 그는 업산을 후히 대접했다. 후히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업산이 한성에 돌아가서 사실을 이야기하면 자신의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의동은 시종에게 고급 비단 50필을 갖고 오라 명령했다. 그는 그중 열 필을 업산에게 주고 나머지는 주인집에 주라면서 말했다. “삼가 10년치 세공을 바칩니다.” 김의동이 업산에게 건넨 비단으로 신씨 집안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고 하니 업산이 받은 열 필도 값이 꽤 나갔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노비 김의동이 부사가 되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그가 어떤 이름으로 어디서 근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최포향이니 녹림현이니 황주부니 하는 가공의 지명들만 들었을 뿐이다. 신씨 집안과 업산이 신분 세탁 후의 김의동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해도, 비단을 받았으니 함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김의동이 주인에게 바친 10년치 세공이다. 그가 준 40필의 고급 비단 덕분에 주인집은 단번에 부자가 되었다. 그럼, 일반적인 경우에 노비는 주인에게 얼마만큼의 세공을 바쳤을까?

 

각주
1 세종 20년 11월 23일자(1438. 12. 9.) 《세종실록》.

'역사 ,세계사 > 옛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업으로 부자가 된 노비   (0) 2014.09.24
노비의 의무  (0) 2014.09.24
노비 막심이 가족의 매매 서류   (0) 2014.09.24
관기가 낳은 얼자의 지위   (0) 2014.09.24
소설 속 홍길동의 신분   (0) 201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