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막심이 가족의 매매 서류
노비가 물건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구체적 실상을 파악하려면 노비 매매 현장을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으로부터 430여 년 전에 작성된 고문서로부터 그 현장을 살펴보자.
萬曆七年己卯六月初七日幼學辛汝珪前明文(만력칠년기묘륙월초칠일유학신여규전명문)1) 奴主故學生羅允緯妻郭氏(노주고학생라윤위처곽씨) 만력 7년 기묘년 6월 7일 유학 신여규 전(前) 명문(약정서) 노비주: 고(故) 학생 나윤위의 처, 곽씨 노비 매매를 법적으로 완성하려면, 명문(明文) 외에도 노비주의 초사(招辭, 확인서), 증인·집필자의 초사, 소지(所志, 신청서), 입안(立案, 관청의 인증서)이 더 필요했다. 명문만 확인해도 노비 매매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 내용만 소개한다.
위 인용문에서 보이는 만력 7년 6월 7일자 명문은 노비주가 상대방에게 노비를 양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언뜻 보면 한문 문장 같지만, 한문 외에 이두와 구결(口訣)2)까지 함께 사용되었다. 이 문서의 형식인 명문은 지금의 ‘약정서+영수증’에 해당한다. 번역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명문의 작성 주체는 매도인이다. 오늘날의 계약서에는 매도인과 매수인이 함께 서명하지만, 명문은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형식이었다. 어떤 물건을 넘기고 어떤 대가를 받았다는 내용을 써서 넘겨주기 때문에, 매수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명문 작성에 간여하지 않더라도 권리를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중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법률 행위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중국어 회화 교본인 《노걸대(老乞大)》에 예시된 ‘말 매도’ 약정서에도 매도인과 중개인의 이름밖에 등장하지 않는다.3) 명문에 따르면, 노비 매매가 발생한 시점은 중국 달력으로 만력 7년 6월 7일이고 서기로는 1579년 6월 30일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3년 전이다. 매도인은 나윤위의 미망인인 곽씨다. 나윤위 앞에 붙은 학생(學生)이란 표현은, 매수인인 신여규 앞에 붙은 유학(幼學)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관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유학, 그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은 학생이라 불렀다. 나윤위와 신여규 모두 양반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선생님’ 같은 존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매매의 대상인 노비는 황해도 백천군에 거주하는 막심이와 막동이다. 이 점은 이들이 외거노비였음을 증명한다. 근거는 관청의 인증서인 입안에 있다. 입안에 따르면, 곽씨의 거주지는 청주목이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의 본질은, 노비가 주인에게 납부하는 공물의 소유권을 이전하는 데 있었다. “이 약정서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 공물 수급권”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가장이 상속한 아버지 쪽 공물 수급권”이란 표현은 막심·막동이의 소유권이 나윤위의 아버지로부터 나윤위에게 이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비 관련 문서에는 매도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노비를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적어야 했다.
막심이와 막동이의 프로필을 자세히 살펴보자. 막심이는 임오년에 출생했다. 음력인 임오년에 태어났다면, 출생 연도는 양력으로 1522년이거나 1523년이다. 음력을 기준으로 하면 계약 당시 막심이는 쉰여덟 살이었다. 막동이는 계해년에 태어났다. 1563년이나 1564년에 태어난 것이다. 음력으로 하면, 계약 당시 막동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명문에서도 언급됐다시피, 이들은 부모자식 관계다. 막심이가 마흔두 살에 막동이를 낳은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막심이의 성별을 확인할 수 있다. 막심이는 여성이다. 막심이란 이름 자체가 여성스러워서가 아니라, 그와 그의 자식인 막동이가 한 집에 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만약 계약서에 막심이의 자식이 안 나타났다면, 그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계약서에 부모자식이 함께 언급됐다면 그 부모가 아버지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노비 계약서에 관한 한, 그 부모가 어머니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노비는 어머니의 혈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심이는 여성인 것이다.
막심이가 막고에게서 태어났다고 했기 때문에, 막고 역시 여성이다. 외할머니-어머니-자식의 혈통이 약정서에 나타난 것이다. 막고·막심은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막동의 경우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 막동이란 이름을 봐서는 남자아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동이라 불린 여자 노비가 다른 계약서에 등장하는 점을 볼 때 막동이란 이름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사용했다.
막고-막심-막동이 똑같이 ‘막’ 자로 시작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노비 3대의 이름이 똑같이 ‘막’ 자로 시작한 것이다. ‘막’ 자가 혹시 성씨는 아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성씨였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노비 문서에는 노비의 성씨가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노비는 성씨 자체가 없었다. 그러므로 ‘막’ 자는 성씨가 아니라 이름의 첫 글자였던 것이다.
이름에 돌림자를 사용하는 것은 형제간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막고-막심-막동 3대에게 돌림자를 붙였다. 노비주인 나씨 집안에서 그렇게 한 것은, 이름만 갖고도 노비의 혈통을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노비 상호 간의 부모자식 관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개돼지만큼의 취급도 받지 못한 조선시대 노비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명문에서 눈길을 끄는 또 다른 부분은 노비의 몸값이다. 막심·막동은 일괄적으로 저화 7,000장에 매매되었다. 노비의 몸값에 관한 《경국대전》 〈형전〉의 규정은 이렇다. “나이 열여섯 살 이상 쉰 살 이하면 가격이 저화 4,000장이고, 열다섯 살 이하이거나 쉰한 살 이상이면 저화 3,000장이다.” 막심이는 쉰여덟 살이었다. 따라서 막심이의 몸값은 저화 3,000장이다. 막동이는 열일곱 살이라 했으니 몸값은 저화 4,000장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형전〉의 규정에 따라 7,000장에 일괄 매매되었던 것이다.
그럼, 저화 한 장의 가치는 어떠했을까? 《태종실록》에 따르면, 저화를 최초로 통용시킬 당시인 태종 2년 1월 9일(1402. 2. 10.)에 조정에서는 저화 한 장을 쌀 두 말(20되)과 교환하도록 했다. 하지만 저화는 조정의 생각대로 유통되지 않았고 저화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다. 그러자 세조시대에 저화와 쌀의 교환 비율을 조정했다. 저화 한 장을 쌀 한 되와 교환하도록 했다. 태종시대에 비해 저화의 가치가 20분의 1로 하락한 것이다. 세조시대에 정한 이 환율이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경국대전》 〈호전〉에서는 “저화 한 장은 쌀 한 되에 준한다”고 못을 박았다.
이를 근거로 막심과 막동의 몸값을 환산해보자. 막심의 몸값인 저화 3,000장을 쌀로 환산하면 3,000되이니 곧 30석 정도다. 이를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가마니로 환산하면 60가마니쯤 된다. 《심청전》에서 심청은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았다. 막심의 몸값은 심청이의 10분의 1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2012년 현재 홈플러스나 이마트 같은 대형 마트에서 쌀 20킬로그램(0.25가마니)이 보통 4~5만 원에 거래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60가마니는 4,800킬로그램이고 4,800킬로그램은 960만 원에서 1,200만 원 사이다. 이것이 막심의 몸값이었다. 한편, 막동의 몸값은 쌀 40석 즉 80가마니다. 막동의 몸값을 요즘의 일반미 가격으로 환산하면 1,280만 원에서 1,600만 원 사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법이 규정한 노비의 ‘가격’이 쌀 60가마니 혹은 80가마니였다는 점이다. 960~1,200만 원 혹은 1,280~1,600만 원은 그냥 참고 자료로만 활용해야 한다. 이것은 쌀 60가마니나 80가마니의 가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시한 자료일 뿐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쌀 한 가마니는 오늘날의 쌀 한 가마니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컸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쌀이 훨씬 더 풍부할 뿐 아니라 쌀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그래서 똑같은 쌀 한 가마니일지라도 지금보다는 옛날의 가치가 훨씬 더 높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쌀 60가마니 혹은 80가마니는 조선시대에는 960~1,200만 원 혹은 1,280~1,600만 원보다 훨씬 더 비싸게 느껴졌을 것이다.
또한 《경국대전》의 노비 몸값은 어디까지나 법률이 정한 공시 가격이었다. 실제의 거래 가격은 달랐을 수도 있다. 막심과 막동을 매매한 당사자들은 관청에 제출하는 서류에만 공시 가격을 적었을 수도 있다. 노비들이 실제로 얼마에 거래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항목을 바꾸어서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각주 |
노비들의 실제 몸값
노비들이 실제로 얼마에 거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 중 하나가 《태조실록》에 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기 2개월 전인 태조 7년 6월 18일(1398. 7. 31.)이었다. 형조 산하의 노비 담당 부서인 형조도관(장례원의 전신)에서 태조에게 “노비 가격은 대부분의 경우에 오승포(五升布) 150필을 넘지 않습니다. 말의 가격은 400~500필에 달합니다. 이는 가축은 중히 여기고 사람은 가벼이 여기는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즉, 당시 노비의 거래 가격은 말의 3분의 1밖에 안 된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노비의 인격을 인정하고 그들의 처지에 대해 동정을 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이 노비를 포함한 서민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들이 노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노비의 처우가 근본적으로 개선된 것은 아니지만, 이전 시대와 비교할 때 조선시대에 노비들의 처지가 개선된 것만큼은 엄연한 사실이다.
조선시대 경제사 연구자인 김용만은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1)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거래된 노비 151명의 몸값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18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동전 40냥 이상으로 거래된 노비는 없었다. 참고로, 상평통보 10문文은 1전(錢), 10전은 1냥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전반에 거래된 37명 중에는, 40냥 이상에 팔린 노비가 다섯 명이나 되었다. 그중 두 명은 70~80냥 수준이었다. 19세기 후반에 거래된 18명 중에는, 100냥을 넘은 노비가 두 명이나 되었다.
그중 한 명은 575냥이라는 고가에 거래됐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노인보다는 청년이 비싼 값에 거래됐다. 여자 노비의 값이 더 높았던 것은, 여자는 새로운 노비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노비 가운데에는 노동력으로 활용할 노비보다는 첩으로 활용할 노비가 비싼 값에 거래됐다. 보통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된 여자 노비들은 거의 다 첩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여자 노비가 남자 노비보다 항상 비쌌던 것은 아니다. 중국 송나라 유의경(劉義慶)이 서기 3~4세기 중국의 생활상을 담은 《세설신어(世說新語)》의 〈덕행(德行)〉 편에는 “노의 값이 비보다 갑절이다”란 문장이 나온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를 전체적으로 보면, 151명은 주로 5~20냥에 거래됐다. 이 가격대에 거래된 노비는 모두 100명이다. 일반적인 노비 가격은 이 정도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경제사 연구자인 이영훈과 박이택이 제시한 경상도 경주의 쌀값 추이를 근거로 할 때,2) 경주에서는 쌀 한 석 즉 두 가마니의 평균 가격이 18세기 전반기에는 1.5냥, 18세기 후반에는 1.8냥, 19세기 전반에는 2.1냥, 19세기 후반에는 5.8냥이었다. 노비들이 보통 5~20냥에 거래됐다는 것은 18세기 전반으로 치면 노비가 쌀 7~27가마니에, 18세기 후반에는 6~22가마니에, 19세기 전반으로 치면 5~19가마니, 19세기 후반에는 2~7가마니에 거래됐다는 뜻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노비의 몸값이 지속적으로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노비의 법정 가격은 쌀 60가마니 혹은 80가마니였다. 그런데 현실적인 노비 시장에서는 훨씬 더 싼 가격에 ‘물건’이 거래됐다. 막심과 막동의 몸값도 매매 명문에 적힌 것보다 낮았다고 보아야 한다. 공시가가 실거래가보다 낮은 오늘날의 부동산 시장과 대조되는 현상이다.
그럼, 공시가가 실거래가보다 훨씬 더 높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 정부가 일부러 노비의 법정 가격을 시장 가격보다 높게 설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의도를 파악하려면, 조선 정부가 노비 매매를 신고제로 운영한 것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국대전》 〈형전〉에 따르면, 노비를 매매할 때는 관청에 신고하도록 하고, 신고 없이 매매할 경우에는 노비와 거래 대금을 모두 몰수했다. 이렇게 신고제로 노비 매매를 운영함과 동시에 실거래가보다 훨씬 높게 노비의 법정 가격을 정한 것은, 조선 정부가 기본적으로 노비 매매를 제한하는 기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노비를 한 곳에 묶어두는 것이 경제 성장에 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토지에서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농업사회에서, 토지 경작자가 자주 바뀌는 것은 경제적으로 이롭지 않다.
이것은 농업경제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다. 실질적인 토지 경작자인 노비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기보다는 같은 토지를 오래도록 개간하는 것이 국가경제에 이로웠던 것이다. 그러자면 노비를 한 주인에게 묶어두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노비 매매를 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노비에 대한 조선 건국세력의 우호적 관점도 그들로 하여금 노비 매매를 억제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노비의 몸값을 높이 설정하면 그들이 물건처럼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일이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도에서였든지 간에 정부에서는 노비 몸값을 높이 잡았지만, 현실적으로 노비는 그런 값에 거래되지는 않았다.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일반적인 노비들은 쌀 2~27가마니에 거래되었다. 노비제도가 공식 폐지되기 직전인 19세기 후반에는 쌀 두 가마니에 거래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18세기 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노비 몸값이 지속적으로 하락한 이유에 관해서는 뒷부분에서 설명할 것이다.
각주 필자는 이정수와 김희호가 집필한 《조선시대 노비와 토지소유방식》의 224~228쪽에서 이영훈·박이택의 쌀값 통계를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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