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기가 낳은 얼자의 지위
일반 여자 노비에 비해 관기들은 얼자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관기들이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동시에 만났는지는 민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평안도 정주목사가 전라도 남원에서 올라온 친척을 접대하고자 기생을 직접 고른 일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 친척은 양씨 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양생(梁生)이라 불렸다. 정주에 체류하는 3년 동안 양생은 갖고 있던 돈을 모두 탕진했다. 사랑하는 기생에게 죄다 쏟아부은 것이다. 관기와 이별하고 슬픈 마음으로 귀향하던 날, 그나마 남아 있던 가죽신마저 관기의 남동생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자신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처남’이 고맙고 미안해서 선물한 것이다.
축 처진 양생은 말에 올라타 반나절쯤 갔다. 시냇가 버드나무를 발견한 양생은 그늘에서 말을 먹인 뒤, 나무에 기대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한참 울다 보니, 웬 상인도 손으로 턱을 괴고 울고 있지 않은가. 양생은 우리 서로 슬픔을 털어놓자면서 자신은 정주 기생과 이별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상인도 자신이 정주에서 3년간 기생을 사귀었다며 입을 열었다. 그 기생이 다른 남자의 수청을 들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이나 자신을 만나러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런 기생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 슬퍼서 이렇게 울고 있노라고 상인은 말했다. 동병상련을 느낀 양생과 상인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한참 후에야 그들은 자신들이 동일인을 사귀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별의 슬픔이 싹 가셨음은 물론이다.
조광조를 죽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남곤(南袞) 역시 유사한 경험을 겪었다. 《어우야담》에 그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가 관찰사였을 때였다(남곤은 황해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는데 그가 어느 도의 관찰사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부임지에서 그는 어느 기생에게 푹 빠졌다. 기생의 집에까지 가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해가 중천에 뜬 지도 모르고 잠에 빠진 적도 있다. 관리들이 기생의 집으로 남곤을 찾아올 정도였다.
한성으로 돌아온 후에 남곤은 기생을 첩으로 들이고 집까지 장만해주었다. 그 후 어느 날이었다. 술에 취해 그 집에 갔다가, 잘생긴 남자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남곤이 누구냐고 추궁하자, 기생은 나를 그렇게도 못 믿느냐며 결백의 표시로 손가락 하나를 칼로 베었다. 남곤은 “창기가 두 마음을 갖는 것은 크게 책망할 일도 아니다”라며 이렇게까지 행동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고 이별을 고했다. 관기의 양다리 걸치기에 분노한 게 아니라 창기의 지나친 결백 표시에 분노했던 것이다. 이 일화에서 드러나듯, 관기의 ‘양다리’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관기들의 양다리가 사람들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성종 9년 11월 21일(1478. 12. 14.)에 성종이 형조에 내린 왕명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이 날짜 《성종실록》에 수록된 내용이다.
(내게) 진언을 올린 자가 “창기들은 고정된 남편 없이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은 저기서 자면서 아이를 잉태합니다. 자기 소생을 양인으로 만들고 싶어서 ‘이 아이는 아무개 종친이나 재상과 사통하여 잉태한 아이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종친이나 재상 역시 그 말에 현혹되어 ‘아무개 기생의 자녀는 내가 낳았다’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후사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보다 더 윤리를 문란케 하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종 14년 6월 27일(1414. 7. 13.)의 조치에 따라 기첩 소생의 얼자도 아비가 양인이면 양인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세종 12년 12월 18일(1431. 1. 1.)에는 양인으로 인정하는 범위를 축소했다. 관기가 한 명의 관리와 동거하다가 낳은 아이만 양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관기가 여러 명의 관리를 동시에 상대하다가 낳은 자녀, 관기가 일반인과의 관계에서 낳은 자녀 등은 양인이 아닌 노비가 되었다. 세종 19년 5월 9일(1437. 6. 12.)의 조치는 한층 더 엄격했다. 기첩 소생의 얼자는 무조건 노비로 삼기로 한 것이다. 관기들이 남편을 자주 바꾼다는 것이 이유였다.
세종 28년 7월 29일(1446. 8. 21.)에는 관기의 입장을 반영하는 조치가 나왔다. 관기가 관리의 자식을 낳았을 경우, 관리의 신청에 따라 자녀를 양인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단, 조건이 있었다. 그 자녀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이를 관청 노비로 바쳐야 했다. 성종 9년 11월 21일(1478. 12. 14.)에는 “지금부터는 종친과 상하 관리가 집에 데리고 있는 기첩 외에, 서울·지방의 기첩을 범하여 낳은 자녀는 값을 치르고 양인으로 삼을 수 없도록 하라”는 개정 조치가 내려졌다. 종친이나 관리가 ‘집에 데리고 있는 기첩[家畜妓妾(가축기첩)]’에게서 생긴 얼자만을 양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조치는 《경국대전》에 반영되었다. 물론 성종 9년의 조치로 양인이 될 수 있었던 기첩 소생의 얼자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기첩을 집에 데리고 있을 수 있는 종친이나 관리의 수가 실제로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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