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비장전》 속의 관기들
원칙적으로 말해서 선상노비와 솔거노비는 무형의 노동력을, 납공노비와 외거노비는 유형의 현물을 제공했다. 이에 비해 관기들이 제공한 서비스는 좀 독특하다. 그들도 개념상으로 선상노비에 포함됐다. 그들은 법적으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관기에 관한 이야기는 실록·민담·문학작품 등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조선 후기 소설 《배비장전(裵裨將傳)》의 관기 애랑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문학작품은 등장인물이나 이야기 자체는 허구에 불과하지만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역사학 연구에 꼭 필요한 자료다. 관기 문화에 관한 한, 문학작품이 실록이나 민담 못지않은 훌륭한 사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실록이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을 문학작품에서는 과감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한성 양반인 김경은 제주목사에 임명된 뒤 참모진을 꾸렸다. 이런 참모들을 비장(裨將)이라 불렀다. 비장으로 뽑힌 사람들 중에 배걸덕쇠란 이가 있었다. 그는 비장이 된 이후 배 비장이라 불렸다. 배 비장은 예방(禮房) 자리에 내정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제주시 문화산업국장 정도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사극 속의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은 목소리도 가늘고 어딘가 좀 모자란 것 같지만, 당시 서민들이 보기에는 꽤 높은 사람들이었다. 남편이 제주로 떠난다는 소식에, 그의 부인은 걱정이 태산 같아졌다. 안 그래도 바람기 많은 남편이, 미인 많기로 유명한 제주에서 주색에 빠질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배 비장은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런 일은 아예 걱정하지 마오” “대장부가 한번 마음을 먹고 나서는 길인데 어찌 요망한 계집 때문에 신세를 버리겠소?”라며 아내를 다독거렸다.
조선의 비장
그 여성은 제주 최고의 관기인 애랑이였고, 남자는 전임 목사의 참모인 정 비장이었다. 정 비장이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뭍으로 돌아가게 되자, 두 사람이 망월루에서 만나 눈물의 이별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있던 방자(관청 사환)에게 사연을 들은 배 비장은 코웃음을 쳤다. 장부가 저런 일에 눈물을 흘려? 딱하군! 그러나 방자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색에는 영웅도 없다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나이까?” 이에 배 비장은 “양귀비나 서시 같은 계집이 옆에 있더라도 눈도 들어 보지를 않을 것이다”라며 호기를 부렸다. 그러자 방자가 내기를 제안했다. 배 비장이 이곳에 있는 동안 애랑이에게 넘어가지 않으면 자신이 배 비장의 종이 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배 비장이 타고 있는 말을 달라는 것이었다. 배 비장은 호쾌하게 동의했다.
배 비장은 도착 첫날부터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김경 일행의 유흥에 제대로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호언을 뱉은 지라, 여성 있는 데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본래 그런 사람도 아닌데 갑작스레 홀로 고결한 척하니, 다른 참모들은 물론 김경이 보기에도 꼴불견이었다. 비장들이 기생들과 함께 즐기는 자리에도 배 비장은 불참했다. 그럴 바에는 말이나 안 하고 잠자코 있었으면 괜찮았으련만, 그는 자신은 이 따위 유흥에는 관심도 없다느니 내가 기생한테 눈이나 돌리나 보라는 식으로 호기를 부렸다.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김경이 기생들을 소집했다. 배 비장의 ‘가식’을 깨뜨릴 묘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때 애랑이가 나섰다.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한라산 꽃놀이 행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튿날 김경은 참모진과 관기들을 데리고 한라산으로 놀러갔다. 노래와 춤으로 자리가 흥겨워졌지만, 배 비장은 여전히 관심 없는 척했다.
그런 배 비장의 시선을 한눈에 끈 것이 있었다. 그가 본 것은 근처 개울가에서 목욕을 하는 여인이었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몸매에 대단한 미인이었다. 바로 애랑이였다. 배 비장은 잠시도 애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놀이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산하겠다고 하자, 배 비장은 복통을 호소하며 자기는 좀더 있다 가겠노라 말했다. 물론 다른 이들은 그 복통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방자와 단둘이 남게 된 그는, 이몽룡이 방자를 시켜 춘향을 유혹하듯, 방자를 시켜 애랑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결과는 퇴짜였다. 밤새 잠을 뒤척인 배 비장은 방자에게 거액을 쥐어주며, 애랑이에게 연애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애랑은 방자 편에 보낸 답장에서, 오늘 밤에 찾아오면 환영하겠노라고 알렸다. 배 비장은 기쁨에 설렜다. 모든 것은 김경과 애랑이의 작전대로 흘러갔다.
방자와 함께 한밤중에 애랑이의 집을 방문한 배 비장은, 급했던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어던지고 애랑이를 끌어안았다. 잠시 뒤, 남편인 듯한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내가 자리만 비우면 꼭 신발이 네 짝이냐며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실은 방자였다. 그도 김경과 애랑의 작전에 동참했던 것이다. 급했던 배 비장은 그것이 방자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애랑이의 남편이 왔다고만 생각했다. 배 비장은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방 안에 있는 궤짝에 얼른 숨어들었다. 뒤이어 애랑이가 열쇠로 잠갔다.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방 안에 들어온 방자는 저 궤짝을 버리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궤짝을 바다에 버리겠노라고 고함쳤다. 곧이어 방자는 궤짝을 들고 바다가 아닌 동헌으로 갔다. 배 비장으로서는 자기가 바다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헌 마루에는 목사와 참모들과 관기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방자는 가운데에 궤짝을 내려놓았다. 김경은 궤짝에 물을 뿌리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방자는 궤짝을 흔들었다. 당연히 배 비장은 자기가 정말로 바다에 빠진 줄로 착각했다. 김경은 노비들에게 방문을 삐걱삐걱 여닫도록 했다. 배가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궤짝 속의 배 비장은 사공인 듯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고함을 쳤다. ‘사공’은 바닷물에 눈이 닿으면 실명할 수 있으니 절대 눈을 뜨지 말라며 궤짝을 열어주었다. 배 비장은 눈을 꼭 감은 채로 마룻바닥에서 헤엄을 쳐댔다. 알몸 상태로 말이다. 마루 기둥에 머리를 박은 뒤에야 그는 사태를 확인했다.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구경꾼들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리며 데굴데굴 굴렀다.
이 소문은 제주 전역에 금세 퍼졌다. 더는 제주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배 비장은 사직하고 한성으로 되돌아갔다. 황진이를 거절한 서경덕을 흉내 내려다 망신을 톡톡히 당한 바람둥이 양반의 이야기를 담은 《배비장전》은 양반의 권위가 추락하고 그들의 위선이 폭로되던 조선 후기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관기의 삶과 관련된 정보들을 담고 있기에,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나온 정보를 포함해서 관기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
관기, 의무를 행하다
텔레비전 사극 속의 기생은 주로 민간 술집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역사 기록 속의 기생은 주로 관청을 주 무대로 활약한다. 관청에 속한 노비들이 기생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관기라 불리는 이들이다. 조선시대 기생문화를 주도한 ‘주류’는 이들 관기였다고 보아야 한다. 민간에서 일하는 기생은 비주류였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지배층의 문화가 민간에 전파되는 것이 문화전파의 보편적인 경향이다. 마찬가지로 기생문화는 지배층에서 민간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기생문화는 관기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봐야 한다. 옛날 기생이 오늘날의 일반인보다 지적 수준이 높았던 것은 그들의 고객이 주로 관리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짓고 유교 경전을 논하는 데 익숙한 관리들을 상대하자니, 그들도 자연히 그에 걸맞은 지식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적인 면에서는 일반인보다 나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결정적으로 한 가지 측면에서, 그들은 오늘날의 일반인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을 팔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폭력배에게 납치돼서도 아니고, 스스로가 원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들의 신분 때문이었다. 《배비장전》의 제주 관기들처럼 가족과 떨어진 임지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의 성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의무였다. 그런 의무를 수청(守廳)이라 했다. 변 사또가 성춘향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것이다.
관기들이 부담한 수청 의무가 《어수신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평안감영 혹은 황해감영의 종5품 본부도사로 임명된 사람이 역에서 말을 바꿔 타며 임지를 향했다. 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영에서 수청 기생을 파견했다. 수노(수석 관노)가 행수 기생(수석 기생)에게 관기를 골라 손님에게 보내도록 지시하는 방식으로 이 과정이 이루어졌다. 기생을 처음 접한 본부도사가 급창(관청 사환)과 나눈 대화 속에서 관기들의 수청 의무를 확인할 수 있다.
“저 붉은 치마의 여인은 무슨 일로 여기 왔는가?”
관기의 수청 의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경험을 소재로 그들의 또 다른 의무를 살펴보자. 13세기 후반에 동아시아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는 지금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동쪽 끝, 즉 몽골 서남쪽에 인접한 하미[哈密]란 곳에서 특이한 풍습을 목격했다. 하미는 당시 카물(Camul)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곳에서 마르코 폴로가 목격한 풍속이 《동방견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만약 나그네가 자신의 집에 머물려 하면, 그(집주인)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나그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 다 해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집에서 나와 일하러 가서는 2~3일간 머문다. 나그네는 그의 부인과 집안에 있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그녀가 마치 자기 아내인 양 동침하기도 한다. ······ 그들은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나그네가 휴식을 필요로 할 때 그렇게 친절하게 맞아주었기 때문에 우상(석가모니)이 자기들을 매우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 덕분에 물건과 자식과 재산도 불어나고 갖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모든 일이 아주 행복하게 되고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선의 기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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