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노비들을 위한 제사상

구름위 2014. 9. 24.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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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들을 위한 제사상

 

 

재상 문익공 정광필의 집은 남산 밑 회현방에 있었다. 그의 제삿날이었다. 늙은 하인이 남대문 밖에 살았는데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남대문에 당도했다. 하지만 문이 이미 닫힌지라 들어갈 수 없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들어갔다. 다급히 걸어서 수각교에 도달했을 때였다. 갑자기 횃불 한 쌍이 앞에 보이고 어느 대신이 평교자(네 사람이 어께에 메는 가마)를 타고 있었다. 하인이 파초선(파초 잎 모양의 부채)을 받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 바로 문익공이었다. 늙은 하인은 크게 놀라 공에게 달려가 인사를 올렸다. 공이 소매 속에서 배 하나를 꺼내어주니 두 손으로 받았다. 본가에 도착하니 제사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제사상에 배 하나가 없어서 모두들 놀랍게 생각하던 차였다. 늙은 하인이 소매 속에서 배를 꺼내 바치니 사람들이 다들 놀랐다. 문익공의 제삿날에는 하인들을 위해 문밖에 제사상을 차렸으니, 이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금계필담》에 나오는 내용을 원문 그대로 옮긴 것이다. 언뜻 보면 단순한 귀신 이야기 같지만, 이 속에는 노비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다. 정광필(鄭光弼)은 조광조 시대에 활약한 재상이다. 그는 성종 23년(1492)에 대과에 합격하고 관계에 진출했다. 연산군 10년(1504)에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비판했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아산으로 유배되었으나, 종중반정 뒤 복귀해서 승승장구했다. 예조판서·병조판서·함경도관찰사·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했다. 조광조가 처형될 때 구명운동을 벌였다가 좌천된 적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때는 중종 33년(1538)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관직을 갖고 있었다. 《금계필담》 속의 이야기는 그가 사망한 뒤의 일이므로, 이 이야기는 그가 46년간의 관직 생활을 마치고 죽은 1538년 이후에 벌어진 일을 소재로 한 것이다. 위 이야기 속에는 문제의 진상을 유추할 수 있는 단초가 몇 가지 있다.

 

하나, 정광필의 노비 중 하나가 남대문 밖에 살았다.
둘, 그 노비는 정광필의 제사에 참석해야 했지만, 제사가 끝난 뒤에야 도착했다.
셋, 정광필 집안의 사람들은, 늦게 도착한 노비가 제사상에서 없어진 배를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넷, 그 후 이 집안에서는 외거노비들이 제삿날에 집 밖에서 참배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위 네 가지는 이야기 속에 담긴 신비한 요소를 제외한 객관적 사실들이다. 늙은 노비가 남대문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부분은 왜 열거하지 않는가 하고 궁금할 수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위의 이야기는 본가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그들이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은 네 가지뿐이다.

 

그렇지만 늙은 노비가 남대문 밖에서 밤새 기다렸다는 부분과 급히 오는 도중에 정광필의 혼령을 만났다는 부분은 늙은 노비로부터 들은 것에 불과할 뿐 본가 사람들이 직접 인지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확실한 위의 네 가지 단초로 이 집안을 둘러싼 노비관계를 파헤쳐보자.

  
정광필은 46년간 관직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므로,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가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가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한성 안에 살면서도 남대문 밖에 외거노비를 두었다는 사실은 그가 한성 주변에 토지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집안에 외거노비들이 많았다는 점은, 위의 사건을 계기로 노비들이 문밖에서 참배하고 갈 수 있도록 조치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 문밖에서 참배하고 가도록 했는지는 뒷부분에서 설명할 것이다.

 

이 집안의 외거노비들은 해마다 바치는 공물인 세공을 납부해야 했을 뿐 아니라 주인집의 제사에까지 참석해야 했다. 외거노비들은 후자를 상당히 번거롭게 여겼던 모양이다. 선물도 준비해야 했고 잡일도 거들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제사 참석을 귀찮게 여겼다는 점은 두 가지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늙은 노비가 고의로 지각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제사가 거의 끝날 무렵인 새벽녘에 도착한 노비는 “저는 실은 어젯밤 남대문에 도착했습니다만, 성문이 닫혀 있어서 새벽이 되도록 기다렸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무슨 제사를 새벽까지 지냈을까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옛날에는 밤늦게 제사를 시작해서 닭이 울 때쯤에야 제사를 끝냈다. 성문은 새벽 4시경 열고 밤 10시경 닫았으므로, 늙은 노비의 말대로라면 그는 밤 10시 이후부터 새벽 4시경까지 남대문 밖에서 기다렸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제사상에서 사라진 배가 그의 소매 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가 주인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 배를 입수했음을 의미한다. 다른 누군가가 제사상에서 배를 훔친 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늙은 노비에게 건넸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는 두 사람이 미리 약속을 해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노비의 지각이 고의적인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는 밤 10시경 남대문에 도착한 게 아니라, 새벽이 되어서야 자기 집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새벽부터 일을 했다. 대궐을 포함해서 관청의 출근 시각도 새벽이었다. 늙은 노비는 밤새 자기 집에서 잠을 자다가 평소 습관대로 새벽에 일어나 주인집에 갔던 것이다.

 

죽은 정광필의 혼령이 나타나서 배를 주고 갔다는 것은 지각에 대한 처벌을 피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랫동안 이 집의 땅을 경작했을 늙은 노비는 제사를 거드는 게 귀찮아서, 본가에 사는 솔거노비의 협조를 얻어 일부러 제사가 끝날 때쯤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위의 에피소드는 허무맹랑한 귀신 이야기가 되고 만다.

 

둘째, 외거노비들의 제사 참석 의무가 경감되었다는 점이다. 정광필의 혼령이 집안에 있던 배를 들고 나가 외거노비에게 주고 갔다는 이야기는 ‘외거노비들은 제사를 위해 집 안까지 방문할 필요가 없다’는 정광필의 뜻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모양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외거노비들은 집 밖에 있는 제사상에서 참배를 하고 가면 된다’는 규칙이 생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먼 데 사는 외거노비들과 주인집 사이에 제사 참석 문제를 놓고 그 전부터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갈등이 있던 차에 늙은 노비의 사건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위의 절충안은 주인의 체면을 고려한 것일 뿐, 실제로는 외거노비들의 참배 의무를 면제해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마음 약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외거노비들은 그 후로는 정광필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벽에 집 밖에서 참배하고 갔는지 여부를 주인이 확인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정광필의 혼령이 늙은 노비에게 배를 주고 갔다는 이야기가 결국에는 외거노비들의 제사 참석 면제로 연결된 것을 보면, 이 이야기의 본질은 귀신 이야기가 아니라 외거노비들의 의무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외거노비는 솔거노비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외거노비는 오히려 기존보다 훨씬 더한 자유의 박탈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민담집인 《대동패림(大東稗林)》의 〈병후만록(病後漫錄)〉 편에, 영조 임금 때 영의정까지 지낸 최규서(崔奎瑞)가 목격한 광경이 등장한다. 어느 외거노비가 자녀들을 상전의 솔거노비로 보내는 장면이었다. 최규서가 목격한 외거노비의 자녀들은 처음에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외거노비였으나 이제는 속박이 더 심한 솔거노비가 된 것이다.1) 이는 주인과 노비의 관계가 일률적으로 전개된 게 아니라, 노비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제각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비의 처지를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노비인가를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각주
1 《대동패림》 〈병후만록〉의 내용은 김석형의 《한국사와 농민》 89~90쪽에서 재인용했다.

 

공노비와 사노비

 

 

노비는 소유주가 국가냐 개인이냐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었다. 《성호사설》에서는 “나라 풍속에 따르면, 내노(內奴)·사노(寺奴)·역노(驛奴)·교노(敎奴) 등의 부류는 공천(公賤)이라 하고, 사족(士族)과 서민의 노비는 사천(私賤)이라 한다”고 했다.1) 여기서 내노·사노·역노·교노는 공천, 즉 공노비다.

 

‘내노’는 왕실 재정부서인 내수사에 속한 노비다. 출궁한 왕자의 집에 사는 노비도 내노에 속한다. 왕실의 토지를 경작하는 노비도 마찬가지다. 왕실에 속한 궁녀나 내시도 크게 보면 내노에 속하지만 이들은 별도로 분류되었다.

 

‘사노’는 중앙관청의 노비다. 한자를 보면 사찰에 속한 노비를 뜻할 것 같지만, 사실은 중앙관청의 노비를 뜻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오늘날에는 사(寺) 자가 절을 가리키는 데만 사용되지만, 과거에는 절뿐 아니라 중앙관청을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조선 건국세력이 억불정책을 통해 불교 재산을 몰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시대의 사찰에 속한 노비들이 공노비로 대거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역노’는 역참에 속한 노비, ‘교노’는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속한 노비였다. 앞에서 설명한 성균관 노비도 이런 부류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공노비에는 읍노·읍비, 즉 지방 관청의 남녀 노비도 포함되었다.

  
“사족과 서민의 노비는 사천이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사노비였다. 사족이란 사대부 가문을 지칭한다. 주의할 것이 있다. 이 문장을 무심코 읽으면 양반의 노비와 평민의 노비를 따로 구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사족’ 하면 양반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사족은 서민의 반대 개념이다. 서민은 국가로부터 공적 지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사족은 그런 지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국가로부터 관직이나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사족이라 했던 것이다. 그럼, 사족과 양반은 같은 것이 아닌가? 조선 초기에는 문관과 무관을 합해서 양반이라 했다. 이때만 해도 양반은 국가로부터 관직 혹은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지칭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만 해도 양반은 사족과 같은 개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반은 중앙이나 지방의 명문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질됐다. 그래서 16세기가 되면 사족과 양반은 서로 일치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족과 서민의 노비는 사천이라 한다”고 할 때의 사족이란 양반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족의 노비는 현재 관직이나 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의 노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사노비와 공노비 중 어느 쪽이 더 힘들었을까? 《성호사설》에서는 “사천의 부역은 공천보다 중할 뿐 아니라 ······ 이 땅에서 사천만큼 불쌍한 것도 없다”고 했다. 노비의 의무를 규정한 법전 조항들은 대부분 공노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공노비가 사노비보다 훨씬 더 많은 부담을 진 것 같다. 하지만 사노비가 부담한 관습상의 의무는 공노비보다 훨씬 더 컸다. 사노비는 정변이 발생하면 경우에 따라 주인의 사병 역할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권세가들이 보유한 사병은 거의 다 사노비들이었다.

 

정광필의 노비들이 주인집 제사 때마다 부담을 느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노비들은 공식적 의무 외에도 이러저러한 자질구레한 의무까지 함께 부담해야 했다. 공노비의 의무는 법전에라도 규정되었지만 사노비의 의무는 당사자 간에 정해졌으니 사노비의 부담이 훨씬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노비와 사노비의 부담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노비의 의무를 다루는 항목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각주
1 이익, 《성호사설》 권7 〈인사문〉 공사천.

 

선상노비 · 납공노비와 외거노비 · 솔거노비

 

 

공노비는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세분됐다. 선상노비는 뽑혀진, 즉 선상(選上)된 노비를 의미한다. 선상노비는 《경국대전》에서 호수(戶首)란 용어로도 표현되었다. 납공노비는 납공(納貢), 즉 공물 납부의 의무를 지는 노비를 의미한다.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노비의 부담이 무형의 서비스냐 유형의 물건이냐에 있다. 관청에 나가서 노동력을 제공하면 선상노비이고, 관청에 나가지 않고 현물을 제공하면 납공노비였던 것이다.

 

납공노비에 관해 《경국대전》 〈호전(戶典)〉에서는 이렇게 규정했다. 이 규정은 본문과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외거노비는 선상(選上) 및 잡고(雜故)를 제외하고 열여섯 살 이상 예순 살 이하인 경우에는 공물을 거두되 사섬시(司贍寺)에 납부하도록 한다.


주석: 노(奴)는 면포 한 필과 저화(楮貨) 스무 장을 내도록 하고, 비(婢)는 면포 한 필과 저화 열 장을 내도록 하되, 만약 명주나 정포(正布, 고급 면포)로 대납하고자 할 경우는 이를 허용한다.


여기서 말하는 외거노비는 솔거노비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경거노비(京居奴婢), 즉 한성에 거주하는 관노비의 반대 개념으로, ‘지방에 사는 관노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잡고’는 신체불구 등의 사유로 노비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 사람을 가리킨다. 위 조항에 따르면, 선상노비와 잡고노비를 제외한 열여섯 살 이상 예순 살 이하의 지방 관노비는 면포와 저화(지폐)를 사섬시에 납부해야 했다. 국유지를 경작하는 관노비라면, 연말에 수확물을 면포와 저화로 바꾸어서 사섬시에 내야 했다. 사섬시란 저화의 유통과 보급을 촉진하기 위해 태종 때 설치된 관청이다. 면포와 저화를 납부하는 것으로써 법적 의무를 충족했기 때문에 이들은 납공노비라 불렸다.

 

선상노비에 관해 《경국대전》 〈형전〉에서는 이렇게 규정했다.

 

한성과 지방에서 복무하는 노비(선상노비)에게는 공물을 면제하고 봉족(奉足) 두 명을 부여한다. 호수(戶首)는 봉족에게서 매년 면포와 정포 각 한 필을 거둔다. 서울에서는 2교대로 돌아가며 복무하고, 지방에서는 7교대로 돌아가며 뽑아 올린다.


호수, 즉 선상노비는 공물을 납부하지 않는 대신, 관청에 가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관청에서 실무나 잡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한성에서는 2교대로 한 번씩 호수가 되었고, 지방에서는 7교대로 한 번씩 호수가 되었다.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자기 순번이 되면 관청에 출퇴근했던 것이다.

 

선상노비의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는 봉족이 지급하도록 했다. 봉족이 선상노비의 생활비를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봉족은 면포나 정포를 납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납공노비와 다를 바 없었지만, 사섬시에 납부하는 게 아니라 선상노비에게 지급한다는 점에서 납공노비와 달랐다. 납공노비 중의 일정 수가 봉족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납공노비는 면포 한 필과 저화 스무 장 혹은 열 장을 납부한 데 비해 봉족은 면포와 정포 한 필만 납부했으므로, 봉족이 된 납공노비가 그렇지 않은 납공노비보다 부담을 덜 진 셈이다.

 

선상노비는 봉족의 지원을 받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경국대전》 〈형전〉의 또 다른 조항에서는 “전체 고을의 읍노비에게는 봉족이 없다”고 했다. 읍노비는 군이나 현의 노비를 가리킨다. 군현 단위의 선상노비는 스스로 비용을 충당하도록 한 것이다. 봉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선상노비는, 군현보다 상위의 지방 조직 혹은 행정관청에 속한 관노비들이었다.

 

선상노비에게 두 명의 봉족을 붙인 것을 두고, 국가가 이들을 경제적으로 배려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건 오해다. 노비의 호(戶)는 보통 세 명 이상으로 구성됐다. 그중 한 명이 선상노비가 될 경우, 나머지 두 명이 그에게 면포와 정포를 주도록 한 것이다. 집안 식구들끼리 면포를 주고받는 것은 국가에서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고 관심을 가질 만한 일도 아니었다. 대신, 봉족이 된 가족들은 납공노비 때보다 적은 수준의 납부 의무를 부담했던 것이다.

 

읍노비에게는 봉족이 없다는 것은, 읍노비의 가족들은 일반 납공노비와 똑같은 의무를 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읍노비는 자기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던 것이다.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국대전》 〈형전〉을 다시 살펴보면 그런 대로 일리가 있다는 판단이 들 것이다. “서울에서는 2교대로 돌아가며 복무하고, 지방에서는 7교대로 돌아가며 뽑아 올린다”고 했다. 한성의 선상노비는 2교대이고 지방의 선상노비는 7교대였으므로, 지방의 노비가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봉족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을 보류한 부분이 있다. 선상노비에 관한 《경국대전》 〈형전〉 규정에서는 한성 및 지방의 선상노비를 모두 다루었다. 그런데 납공노비에 관한 《경국대전》 〈호전〉 규정에서는 외거노비만 다루었다. 거기서 말한 외거노비가 지방 노비를 가리킨다는 점은 이미 언급했다. 그러므로 한성 공노비, 즉 경거노비에는 납공노비가 없었다. 한성에 사는 공노비들은 관청에 속한 노비들이었다. 주로 국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이 납공노비가 되었으므로, 좁은 한성 안에는 국유지를 경작하는 노비들이 있을 리 없었다.

 

공노비가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된 것과 달리,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분류됐다. 공노비를 경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분류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외거’라는 것은 한성 밖에 산다는 의미다. 이에 반해, 사노비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분류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외거’란 주인집 밖에 산다는 의미다. 공노비의 경우에는 솔거노비란 게 없었다. 관청에 나가 근무하든 국유지를 경작하든 공노비는 자기 집에서 출퇴근했다. 하지만 사노비의 경우에는 가사사용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규정하기 위해 솔거노비란 개념이 필요하다.

외형상으로만 보면, 독립적인 주택과 농토를 가진 외거노비가 그렇지 않은 솔거노비보다 더 나았을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외거노비가 솔거노비보다 경제력을 좀더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 집과 자기 농토를 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외거노비는 사실상 소작농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외거노비가 솔거노비보다 못한 경우도 많았다. 농사를 짓는 외거노비의 처지는 풍흉에 따라 수시로 뒤바뀔 수 있었지만, 솔거노비는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외거노비는 좀더 많은 자유를 갖는 대신 파산의 위험성도 그만큼 컸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