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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출신 재상, 옛 주인을 만나다

구름위 2014. 9. 2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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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출신 재상, 옛 주인을 만나다

 

 

 

사극에서 미천한 신분의 어린애가 문밖이나 마루 끝에서 양반집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배우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아이는 대부분 경을 친다. 야단을 맞거나 매를 맞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기 일쑤다.

 

그런 아이를 잘 거두어서 글을 가르치고 출셋길을 열어준 좋은 주인도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주인은 15세기에 재상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꼬마 노비의 영특함에 주목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이 남긴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따르면,1) 이 재상은 어린 노비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하여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 관련된 이야기가 《어우야담》에도 실려 있다. 《어우야담》을 보면, 이 재상은 그 아이가 자기 아들이나 조카와 똑같은 자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니 사극에 나오는 매몰찬 어른들과 달랐다. 아이가 노비 신분으로는 재주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재상은 아이를 아들 없는 부자인 반서린(潘瑞麟)의 양자로 보냈다. 신분 세탁을 통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상가의 어린 노비는 입양된 후 반석평(潘碩枰, ?~1540)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어린 아들을 부잣집 양자로 보내는 그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반석평은 연산군(燕山君) 10년(1504)에 열린 소과2) 생원시험과 중종 2년(1507)에 열린 대과 문과시험에 합격했다. 그 뒤 그는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방어하며 경력을 쌓았다. 함경남도3) 병마절도사(지역 사령관, 종2품 차관급),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평안도관찰사, 공조·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다. 죽기 전에 임명된 마지막 관직은 지중추부사4)였다.

 

반석평은 이렇게 잘나갔지만, 그를 밀어준 재상 가문은 그렇지 못했다. 주인집은 가세가 기울었다.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재상이 죽은 뒤에는 경제적으로 곤궁해져, 생활은 하층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반석평은 그들을 피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초헌(軺軒)5)을 타고 길을 가다 주인집 사람들을 만나면 얼른 내려 진흙길 위에서도 절을 했다.

 

 

 

비천당
성균관의 별당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학습 장소였으며 또한 과거시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품계가 오르자 반석평은 조정에 자신의 진짜 신분을 고백했다. 더불어 자기 관직을 박탈하고 주인집 가족들에게 관직을 줄 것을 요청했다. 신분이 드러난 반석평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조정에서는 특례를 인정했다. 또 그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하고 주인집 가족들에게도 관직을 수여했다. 그의 의리와 솔직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여진족 방비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유몽인은 반석평과 같은 인재를 발굴한 주인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주인집 재상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마음을 과감히 없앴을 뿐 아니라 남의 훌륭함을 이루어주었다”고 하면서 “그런 인자함이 있었기에 남의 재능을 알아보고 선비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유몽인은 반석평 같은 인재들이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비관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땅이 치우치고 작아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중국의 1,000분의 1도 안 된다”라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양인과 노비를 구분하기 때문에 인재 발탁이 더욱 더 어렵다고 말했다.

 

기자(箕子)가 남긴 법전에 국한되어, 노비가 된 자들에게는 벼슬길이 허용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을 얻을 때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은 삼대(三代)6)의 훌륭한 법도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벼슬을 못 하게 막는 것이 더욱 견고하니, 사대부들의 생각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이 있다. 유몽인은 ‘기자조선’ 이래의 노비제도가 인재등용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반석평 같은 인재들이 정상적으로 발탁될 수 없는 현실의 시발점이 기자조선이었다는 것이다. 비단 유몽인뿐 아니라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그러했을까? 노비제도는 과연 기자 때 생겨난 것일까?

 

각주
1 《성호사설》에 담긴 반석평의 이야기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남긴 야사 총서인 《연려실기술》 별집 권13에 인용되어 있다.
2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승과로 나뉘었다. 문과(文科)는 소과(小科)와 대과(大科)로 나뉘었다. 소과는 진사시와 생원시로 세분됐다. 진사시는 시를 짓는 능력을, 생원시는 경전에 대한 이해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이었다. 진사시·생원시는 각각 2단계로 치러졌다. 제1단계인 초시는 유학(幼學, ‘벼슬 없는 선비’를 지칭하는 표현)들이 응시한 가운데서 성균관·한성부·팔도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700명(나중에는 540명)을 선발했다. 제2단계인 복시는 초시 합격자들이 응시한 가운데 한성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100명을 선발했다.

초시 합격자가 복시에서 탈락하면 초시부터 다시 응시해야 했다. 다만, 부모상 기타의 사유로 복시에 응시하지 못한 경우는 예외였다. 진사시 복시에서 합격한 사람은 진사, 생원시 복시에서 합격한 사람은 생원이라 했다. 진사나 생원이 되면 공식적으로 선비의 자격을 공인받았다. 물론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아도 선비라고 불렸지만, 진사나 생원은 되어야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하급 관료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한편, 대과는 소과 합격자들이 응시하는 고급관료 채용시험이었다. 소과와 달리 대과는 3단계로 진행되었다. 대과의 제3차 시험에 최종 합격한 33명이 흔히 말하는 문과 합격자 혹은 과거 합격자다. 대과 합격자들은 훗날 정승이 되건 실업자가 되건 간에 일반적으로 ‘대과’로 불렸다. 이것은 명예로운 칭호였다. 김동인의 소설 《명문》에는 전직 재상인 전성철이 지역 사회에서 ‘전 대과’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는 장면이 나온다.
3 조선시대 행정구역에는 함경남도니 함경북도니 하는 것이 없었다. 그냥 함경도뿐이었다. 그렇다면,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병사)를 별도로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병사는 지방의 군사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경기·강원도에는 한 명의 병사를 두었다. 관찰사가 이를 겸했다. 충청·전라·황해·평안도에는 두 명을 두었다. 그중 한 명은 관찰사였다. 경상도·함경도에는 세 명을 두었다. 관찰사가 이 중 한 자리를 겸했다. 나머지 두 자리는 어떻게 했을까? 경상도의 경우에 도를 좌우로 나누어 경상좌도 병사와 경상우도 병사를 두었다. 함경도의 경우에는 남과 북으로 나누어 함경남도 병사와 함경북도 병사를 두었다. 그런 경우에만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구분했다.
4 중추부의 정2품 벼슬. 장관급이다.
5 외바퀴가 달린 수레로서 종2품 이상의 관원이 탈 수 있었다.
6 고대 중국 왕조인 하나라·은나라·주나라를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