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노비로 추락한 단종의 누나

구름위 2014. 9. 24.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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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로 추락한 단종의 누나

 

 

단종은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여운 이로 기억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올라 삼촌에게 왕위도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긴 그 짧은 삶은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대중의 동정심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단종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단종보다 더 기구한 운명을 겪었을 한 여인이 있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다. 역사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의 생도 한없이 불쌍하고 가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주는 단종처럼 살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 때도 있다. 공주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세종의 친위기구인 집현전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 이승소(李承召)란 이가 있었다. 세종이 죽기 3년 전에 과거에 급제하고 집현전에 합류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시문집인 《삼탄선생집(三灘先生集)》에 〈경혜공주 묘지(墓誌)〉가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공주는 세종이 왕위에 있을 때인 1436년에 세자 이향(李珦, 훗날의 문종)과 권씨(훗날의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왕이 아닌 세자인 데다가 어머니가 세자의 첩이었기 때문에, 출생 당시의 경혜공주는 공주가 아니었다. 세자의 정실부인, 즉 세자빈이 낳은 딸에게는 정2품 군주(郡主), 세자의 첩이 낳은 딸에게는 정3품 현주(縣主)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그것도 출생 직후 곧바로 작위를 주는 게 아니라, 보통은 일곱 살 이후에 작위를 수여했다. 경혜공주는 ‘현주’였다.

 
시작은 비록 첩의 딸로 했지만, 어린 공주의 운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동궁전 즉 세자의 처소인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생활했다.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왕이 되면 공주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살았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동생(훗날의 단종)을 낳자마자 죽는 바람에 궁을 떠나게 됐지만, 이때도 그의 삶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는 정2품 평창군주(平昌郡主)란 작위를 받고 그에 따른 특권과 대우를 향유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열네 살 때부터 경혜공주의 삶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열다섯 살이 되어도 세종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의 혼사를 서둘렀다. 만약 세종이 사망한다면 삼년상 동안은 혼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윤달을 제외하고 25개월 동안은 혼인할 수 없었다. 삼년상의 기간은 36개월이 아니라 윤달을 제외한 25개월이었다. 윤달이 있으면 25개월보다 길어졌다. 왕실의 식구들은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했기 때문에, 삼년상을 치를 경우 경혜공주는 ‘노처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실에서 급히 얻은 배우자는 전 한성부윤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인 정종(鄭悰)이었다. 한성부윤은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공주와 정종은 세종 32년 1월 24일(1450. 2. 6.) 결혼했다. 이때 공주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런데 살림집을 장만하기 전인 같은 해 2월 17일(1450. 3. 30.) 세종이 그만 눈을 감았다. 결혼 직후에 할아버지가 사망했으니, 살림집 준비는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살림집을 마련한 것은 세종의 소상(小祥, 사망 1주기 의식)이 끝난 뒤였다. 이때 경혜공주의 신분은 공주였다. 아버지가 왕이 된 뒤였기 때문이다. 공주의 불운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삼년상을 끝내고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쓰러진 것이다. 문종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삼년상은 끝내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했을지 모르지만, 공주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삼년상에 이어 아버지의 삼년상까지 치러야 했으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겪었을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의 세조)이 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주의 동생 단종은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다. 이때 공주는 열여덟 살이었다. 운명은 공주의 편이 아니었다. 2년 뒤인 스무 살 때, 공주는 숙부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고 동생이 상왕으로 ‘승격’되는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남편인 정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정종이 귀양을 간 것은, 그가 단종을 감싸고도는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 수양대군의 동생)과 친했기 때문이다. 정종의 유배지는 영월에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 일부), 한성,1) 수원 및 김포로 변경됐다. 유배지가 수원으로 바뀐 뒤부터는 공주도 남편과 동행했다.

 

세조 집권 뒤에 발생한 사육신 사건(1456)은 운명이 공주의 편이 아님을 한층 더 입증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한 이 사건으로 공주의 동생 단종은 상왕에서 왕자급인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상태에서 영월로 유배를 가고, 남편 정종은 전라도 광주로 귀양지를 바꾸게 되었다. 단종은 이듬해에 죽고 정종은 단종이 죽은 때로부터 4년 뒤에 죽었다. 정종은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이렇게 부모도, 동생도, 남편도 모두 잃은 공주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내놓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바로 공주 신분과 자유인 신분이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그는 남편이 죽은 뒤 전라도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하루아침에 관노비로 전락한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여섯 살짜리 아들 정미수(鄭眉壽)와 배 속의 딸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으로 떠났다. 순천부사 여자신(呂自新)이 진짜로 노동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수령 집무실인 동헌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내게 노비의 일을 시킨단 말이냐?”며 호통을 친 일화가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그를 점입가경의 파멸로 몰아세우던 운명의 신은, 벼랑 끝에서 갑작스레 상황을 종결지었다. 임신하고 애 딸린 공주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을 우려한 수양대군(당시는 임금)이 공주를 사면하고 한성으로 부른 것이다. 한성으로 돌아온 공주는 두 아이를 왕궁에 맡기고, 자신은 비구니가 되었다. 남편 잃은 후궁을 포함한 왕실 여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비구니 사찰이 한성에 몇 곳 있었다. 그는 그곳 어딘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수양대군의 손자인 성종이 재위할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동생 단종도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경혜공주는 그에 못지않은, 어쩌면 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왕실에 삼년상이 겹치는 상황 속에서 그의 결혼 생활은 꼬였고 동생 단종도 비운에 빠졌다. 그는 숙부가 동생과 남편을 차례로 죽이는 것을 목도했고, 한때 노비로 전락했다가 사면된 뒤에는 비구니로 일생을 마쳤다. 공주란 위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자리처럼 여겨진다. 실제로도 경혜공주는 한때 모든 것을 다 갖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왕실의 연이은 비극 속에서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한과 설움을 안은 채 세상과 이별했다. 그의 비극은 단종의 비극 뒤에 가려져 있지만, 어찌 보면 그의 비극이 훨씬 더 서글프고 참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각주
1 ‘한성’ 대신 ‘한양’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전자는 공식적 표현인 데 비해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강의 남쪽 지역은 음(陰), 북쪽 지역은 양(陽)으로 표시했다. 한성을 한양이라 부른 것은 한성이 한강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편의상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한편, 산의 남쪽 지역은 양, 북쪽 지역은 음으로 표시했다.

 

노비로 추락하는 사람들

 

 

사주를 보면 관운(官運)이란 말이 나온다. 관운은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리더가 되는 운이다. 물론 관운을 타고났다고 곧바로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리더가 되려면 무엇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리더가 되고자 리더십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반영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을 지배하는 데 익숙한 인간도 존재하지 않고,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지배를 받는 데 익숙한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관운을 타고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남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타고났을 뿐이지, 리더가 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지배자나 피지배자의 기질은 후천적 학습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노비로 부리기도 쉽지 않고 다른 인간의 노비가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명분도 없이 남을 노비로 부리려면, 상대방의 저항도 걱정해야 하고 양심의 가책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노비제도가 유지된 것은, 특정 사회에서 ‘비(非)인간’, 즉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노비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붙잡힌 포로들, 중범죄를 지은 죄인들,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들처럼 사회적으로 불리한 사람들이 인간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되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짐승처럼 부려질 수 있었다.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착취하는 데서 생기는 양심상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또 노비주는 그들의 저항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저항을 차단해주는 사회적 공감대나 공권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노비도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합리화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처지가 공인되다 보니,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쉽지 않고 동일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규합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노비와 같은 존재라고는 볼 수 없지만 17~19세기의 일본 천민들이 ‘히닌[非人]’이라 불린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히닌은 사람이 아닌 존재라는 의미다. 당시 일본인들은 ‘저들은 사람이 아니야!’라며 그들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했다. 노비에 대한 차별 역시 ‘비인간’으로 선고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때나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데서 나타나듯이, 인류 사회에서는 동등한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어느 사람이 인간도 아닌 존재라고 인정될 때만 그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비인간의 유형에 관해 앞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전쟁포로·중대범죄자·채무불이행자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남북국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전쟁이 급감했을 뿐 아니라 한반도가 외부를 상대로 정복전쟁을 단행한 경우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 후로는 전쟁포로 출신의 노비들이 충원되는 경우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주로 중대범죄자와 채무불이행자들이 ‘신규 노비’로 충원되었다.

 

중대범죄 중에서도 역모죄는 신규 노비의 ‘산실’이었다. 이런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관념이 있다. 바로 ‘반역을 하면 구족을 멸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조선시대 법전의 총결판인 《대전회통(大典會通)》의 관련 규정을 찬찬히 뜯어보자. 《대전회통》 〈형전(刑典)〉에서는 “병력을 동원한 역적 수괴의 형제와 처첩은 모두 연좌해서 사형에 처한다”고 하면서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경우에는 본률(本律)에 의한다”고 했다. ‘본률’이란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가리킨다.

 

조선의 형법은 기본적으로 명나라 형법인 대명률(大明律)을 차용했다. 대명률은 당나라 형법인 당률(唐律)을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대명률을 그대로 차용할 수는 없었다. 조선과 중국의 실상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하면서 일부를 수정했다. 그렇게 해서 1395년에 나온 것이 《대명률직해》다.

 

《대명률직해》에서는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역모죄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대명률직해》 〈도적〉 편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역모도 도적의 일종으로 간주했기에 이 문제를 〈도적〉 편에서 다룬 것이다. 이에 따르면, 종묘사직의 권위에 도전하는 범죄인 모반대역(謀反大逆)을 범한 사람의 할아버지·어머니·처·첩·형제자매·딸·손자·열다섯 살 이하의 아들, 아들의 처·첩은 노비로 삼는다고 했다. 또 나라를 배반하고 외국과 내통하는 범죄인 모반(謀叛)을 범한 사람의 처·첩·자녀는 노비로 삼는다고 했다.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은 금성대군과 함께 모반대역을 범했다. 경혜공주는 ‘모반대역을 범한 사람의 처는 노비로 삼는다’는 《대명률직해》 규정에 따라 순천부 노비로 전락했던 것이다. 역적의 구족을 멸했다는 말들을 흔히 하지만, 실제로는 노비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중대범죄 중에서 강도죄 역시 신규 노비의 산실이었다. 《대전회통》 〈형전〉에서는 “강도의 처자식은 소재지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삼는다”고 했다. 강도 범죄자의 부인과 자식을 거주지의 관노비로 삼았던 것이다. 남편이나 아버지가 강도죄를 범했다면, 그 가족은 노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야반도주를 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중대범죄보다 더 많은 노비를 생산한 것은 채무불이행이었다.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은 “노비 아닌 농민이 몰락하여 남의 노비로 전락하는 실례는 ‘범죄’로 노비가 되는 경우보다 훨씬 많았다”고 했다. 범죄보다는 파산이 노비 전락의 주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양인의 채무불이행과 파산을 초래한 ‘원흉’은 주로 고리대였다. 중대범죄만으로는 나라 전체에 필요한 노비 수요를 온전히 채울 수 없었기에, 고리대에 의한 파산 등의 방식으로도 노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많은 지주들이 이런 방식으로 노동력을 확보했다. 역모죄나 강도죄 등으로 노비가 되는 사람들은 주로 관청이나 공신들에게 배속되었기 때문에, 일반 지주들로서는 고리대를 통해 노비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노비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고리대를 통한 노비 전락을 용인했던 것이다.

 

 

 

 

구속되는 죄인들
신해사옥 때 체포된 윤지충과 권상연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으로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절두산순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소재.
 
이런 현상을 압량위천(壓良爲賤) 혹은 억량위천(抑良爲賤)이라 한다. 양인을 압박 혹은 억압해서 천인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실질적인 채무불이행이 있어야만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채권채무가 없지만 그런 것이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양인을 노비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방법은 고관대작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압량위천 같은 방법으로 노비를 확보한 경우에는 관청에 신고해서 인증을 받아야 했다. 신청서에 해당하는 소지(所志), 노비가 된 원인을 기록하는 명문(明文), 노비주와 증인들의 진술을 기록하는 초사(招辭)를 제출해야 했다. 그러면 관청에서는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인증서에 해당하는 입안(立案)을 발급했다.1) 이런 과정이 끝나면 노비주의 호적에 노비의 이름이 기재된다. 사극에서는 주인이 노비를 불러놓고 “너는 이제 자유!”라면서 장롱에 있는 노비문서를 찢거나 불태우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러면 노비는 환희의 표정을 지으며 기뻐 어쩔 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관청에 가서 호적을 바꾸지 않는 한, 노비는 자유민이 될 수 없었다.

 

각주
1 안승준, 〈만력 7년 노비입안문서〉, 《고문서연구》 1권, 한국고문서학회,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