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노비제도의 기원

구름위 2014. 9. 2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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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제도의 기원

 

 

조선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노비제도가 중국 은나라 왕족인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에서 기원했다고들 말한다. 기자조선을 인정하든 부정하든, 우리는 노비제도가 기자에게서 기원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별로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비제도가 기자에 의해 창시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를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현도군·낙랑군은 (한나라) 무제 때에 설치됐다. 모두 조선·예맥·구려의 만이(蠻夷)들이다. 은나라의 운이 쇠퇴하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백성들에게 예법·농사·양잠·직포를 가르쳤다. 낙랑군의 조선 백성들에게는 범금팔조(犯禁八條, 팔조법금)가 있었다. 살인한 자에 대해서는 즉시 사형으로써 되갚도록 했다. 상해에 대해서는 곡식으로 배상하도록 했다. 훔친 자에 대해서는, 남자인 경우에는 잡아들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인 경우에는 비(婢)로 만들며, 벗어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50만을 내도록 했다.


여기, 고조선의 법률인 팔조법금(八條法禁) 중 세 개가 있다. 그중 세 번째가 노비에 관한 것이다. 절도범을 노비로 삼는다고 했다. 절도 전과자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할 경우에는 50만을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기자 이후에 창시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가 명확치 않다. 현도군·낙랑군·대방군·임둔군 같은 한사군이 설치될 당시 조선 유민들 사이에 팔조법금이란 제도가 있었다고 했지, 그것이 기자에 의해 창시되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서》 〈지리지〉에서는 고조선에 노비제도가 있었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 그것이 기자에게서 유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편 〈동이전〉에서는 기자가 조선에 가서 팔조법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삼국지》나 《후한서》는 《한서》보다 뒤에 나온 사료다. 두 책의 편찬자들은 고조선에 관한 한 《한서》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한서》에는 기자가 팔조법금을 제정했다는 기록이 없는데도 《삼국지》나 《후한서》에 그렇게 기록됐다는 것은, 두 사료의 편찬자들이 《한서》 내용을 잘못 이해했거나 확대해석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노비제도가 기자로부터 시작됐음을 입증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고조선 시대에 이미 노비제도가 존재했다는 사실뿐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유교를 신봉한 조선시대 지배층은 노비제도를 포함한 상고문화를 어떻게든 중국과 연결시키려 했지만, 그렇게 볼 만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주의할 것이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고조선의 절도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고 했지만, 그것이 노비의 발생 원인을 완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고대에는 전쟁이나 정변의 패배자 쪽에서 노비가 대거 양산됐다. 또 팔조법금에서 절도의 형식으로 사유재산권을 침해한 사람을 노비로 전락시킨 사실을 통해, 여타의 형식으로 재산권을 침해한 사람들 중에서도 노비로 전락하는 이들이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예컨대 상당 액수의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도 노비로 전락했으리라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팔조법금의 노비제도는 실상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고조선의 노비제도는 부여에도 계승됐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부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형벌을 적용할 때는 엄하고 신속하게 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처형하고, 살인자의 가족은 잡아들여 노비로 삼는다. 물건을 훔치면 열두 배로 배상해야 한다. 남녀가 간통을 하거나 아내가 질투를 하면 모두 사형에 처한다.


부여에서는 살인자의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살인 외에 절도의 경우에도 노비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건을 훔치고 열두 배로 배상하지 못할 경우, 그 물건이 고가였을 때는 범죄자를 노비로 전락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 외에, 전쟁·정변·채무불이행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 역시 이 시기에 당연히 존재했을 것이다.

 

노비제도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에도 존재했다. 이들 왕국들이 노비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노력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고대 왕국들이 노비 숫자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벌인 정황들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영토뿐 아니라 백성을 확보할 목적으로도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국 토지를 개간할 백성들을 얻을 생각으로도 군사를 일으켰다.

 

예컨대,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는 진평왕 49년 7월(627. 8. 17.~9. 14.)에 “백제 장군 사걸(沙乞)이 서쪽 변경의 두 성을 공략하고 남녀 300여 구(口)를 노획했다”고 했다. 같은 책 〈고구려 본기〉에서는 미천왕 3년 9월(302. 10. 8.~11. 6.)에 “왕이 군대 3만을 이끌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000명을 포획해 평양으로 옮겼다”고 했다. 이런 사례는 《삼국사기》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 경우 전쟁을 벌인 목적은 땅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력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현도군 포로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는 것은, 이들을 동원해서 평양이나 그 인근의 토지를 개간하기 위함이었다. 평양 주변의 노동력 부족 사태를 해소하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쟁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에서 받게 될 지위는 노비밖에 없었다.

 

전쟁을 통한 노비 확보는 또 다른 양상으로도 이루어졌다. 전승국이 새로 획득한 상대국의 군·현을 그대로 자국의 군·현으로 인정하는 때도 있었지만, 상대국의 군·현을 자국의 천민집단 즉 향(鄕)·부곡(部曲) 수준으로 전락시킬 때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향·부곡 주민이 집단적으로 노비 신세로 전락했다.1)

 

전쟁을 통한 노동력 확보는 그 당시가 농업 사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국가마다 공업기술 수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외국 노동자들을 무분별하게 수용할 수 없다. 하지만 농업의 경우에는 기술 차이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일국의 농민이 타국의 농토를 경작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고대 왕국들은 외국 노동력을 빼앗아 자국 농토에 배치하기 위해 전쟁을 자주 벌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노비들이 대규모로 양산되었다. 이렇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이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노비의 기원이 되었다.

각주


1 김석형, 《한국사와 농민》, 북한사회과학원, 1957, 123~124쪽. 참고로, 이 책은 한국의 신서원이 1998년 재편집하여 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