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노비와 노예 · 농노의 비교

구름위 2014. 9. 2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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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와 노예 · 농노의 비교

 

 

 

대한민국이 세계 축구 4강에 오른 2002년 월드컵이 폐막되고 이틀이 지난 7월 2일이었다. 이날 서울 성균관대학교에서는 이 대학 동아시아학술원의 주최로 미국 최고의 한국학 전문가인 제임스 팔레 교수의 특강이 있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워싱턴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 생활을 했으며 지난 2006년에 작고한 인물이다. 특강이 끝난 뒤, 강의실을 나서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한국 학자들이 있었다. “조선이 노예제 사회였다고?” 바로 이틀 전에 끝난 월드컵에서 자긍심이 한층 고양된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제임스 팔레는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긁을 만한 강의를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특히 조선 후기는 노예제 사회였다는 것이 제임스 팔레의 지론이다.

 

그가 조선을 노비제 사회로 보는 근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정신문화연구》에 실려 있다. 이 학술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퍼센트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는 한국이 노예제 사회였던 것으로 봅니다”라고 말했다.1)

 

제임스 팔레의 관점은 한국 학자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학자들의 반응은 ‘반발’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사실, 이런 반응은 엄밀히 말하면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도 ‘국적’에서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나라의 역사를 ‘야만적’인 노예제의 역사로 규정하는 데에 반발심을 갖지 않을 학자는 드물 것이다. 아무리 학술적 객관성을 유지하려 해도, 마음 한구석에서 생기는 묘한 거부감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 원로학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런 대로 참아 넘길 수도 있겠지만, 외국인 학자가 한국 역사를 ‘그딴 식’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참기 힘들 것이다.

 

물론 외국인이 한국사를 연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한계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한국사를 전공하지 않은 일반 한국인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을, 한국사를 평생 연구한 외국인 학자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제임스 팔레가 한국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하면서 웃어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한국인이 아니라서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듯이, 한국인이라서 결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점이다. 한국인이라서 결코 알 수 없는 ‘한국적인 것’은 외국인의 눈에 쉽게 포착된다. 이 점은 우리 주변에서도 잘 나타난다.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나의 특성을 한번에 파악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떤 경우에는 제3자의 눈이 훨씬 더 정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임스 팔레의 견해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과학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중대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우리는 노예니 노비니 농노니 하인이니 종이니 종복이니 하는 표현들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지 않았다. 그냥 막연히 사용했을 뿐이다. 착취의 정도가 아주 심하다 싶으면 노예란 표현을 사용하고, 노예보다 조금은 덜하다 싶으면 노비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나? 또 중세 유럽적인 냄새가 풍긴다 싶으면 농노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나? 학자든지 일반인이든지 간에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때 우리는 엄밀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았다. 그냥 특별한 생각 없이 사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비가 노예와 가까운지 농노와 가까운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이런 개념들의 과학적 의미를 정밀하게 탐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노예와 농노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유용한 것이다. 이 같은 구분은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 즉 ‘원시공산제 사회 → 고대노예제 사회 → 봉건제 사회 → 자본주의 사회 → 공산주의 사회’로의 역사적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예와 농노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면, 마르크스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서유럽 역사 속에서 노예와 농노가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고대 로마에는 귀족과 기사, 평민과 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영주와 가신, 길드의 장인과 직인 그리고 농노가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계급들에 종속된 계층이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예제’는 로마제국의 노예제를, ‘농노제’는 중세 유럽의 농노제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노비가 노예와 농노 중 어느 것과 가까운지를 규명하려면, 로마제국의 노예제와 중세 유럽의 농노제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마제국의 노예제는 어떠했을까? 로마제국의 자유민들은 초기에는 보통 두세 명의 노예를 사용해서 농토를 경작했다. 대규모 농장에는 훨씬 더 많은 수의 노예가 사용되었다. 이들 노비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통해 공급되었다. 전쟁을 통해 제국에 들어온 노예는 구매나 증여 등을 통해 자유민에게 제공되었다. 로마제국의 노예는 재산은 물론 가족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막스 베버는 이들을 두고 ‘말하는 도구’라고 했다. 그는 가축에 대해서는 ‘반쯤 말하는 도구’라고 했다. 노비들은 재산도 가족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로마제국의 생산을 담당했다.2)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총생산(GNP)이 주로 노동자에 의해 산출되듯이, 고대 로마의 국민총생산은 주로 노예에 의해 산출되었다.

 

중세 유럽의 농노는 어떠했을까? 농노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늘날의 노동자가 회사와 각양각색의 관계를 맺고 있듯이, 농노 역시 봉건영주와 한 가지만의 관계를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략적 스케치는 가능하다. 농노는 ‘일반적’으로 절반의 토지 소유권을 보유한 농민이었다. 한국의 소작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중세 유럽의 농지 소유권은 상급 소유권과 하급 소유권으로 구성되었다. 상급 소유권은 주로 교회나 세속의 봉건영주가 보유한 것으로서, 농지를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하급 소유권은 주로 농노가 보유한 것으로서 농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3)

 

하지만 단순히 이용권 차원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권리는, 농노가 ‘내 땅’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대대로 특정 농지를 경작한 한국의 소작농들이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은 갖지 못해도 ‘내 땅’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농지에 대한 제한적 소유권을 가진 상태에서, 농노는 가족과 함께 농업생산에 참여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토지에 대한 처분권까지 보유한 농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로마제국의 노예가 재산도 가족도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중세 농노의 지위는 상당히 높아진 편이었다.

 

그럼 이들 중에서 조선시대의 노비와 가까운 쪽은 누구였을까? 생산수단인 토지와의 관계에 주목할 경우, 노예는 생산수단을 갖지 못했고, 농노는 제한적이나마 생산수단을 보유했다. 조선의 노비는 원칙상 토지소유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외거노비의 경우에는 토지를 소유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인격적 처우라는 점에 주목할 경우, 노예는 가족을 갖지 못한 데 비해 농노는 가족을 가졌다. 외거노비의 경우에는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이처럼, 노예와 유사한 노비도 있었고 농노와 유사한 노비도 있었다. 토지와의 관계에 주목하든 인격적 처우에 주목하든, 노비는 노예와 농노의 모습을 모두 갖춘 존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제임스 팔레 같은 외국인 학자는 노비가 농노보다는 노예에 좀더 가까웠다는 측면에 착안해서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했다. 하지만 노예제 사회라고 규정하기에는, 노비는 농노적인 모습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 노비는 노예와 농노 중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양자의 모습을 골고루 갖춘 상당히 독특한 것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노비가 주인과 사회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느냐는, 개별 노비가 노예에 가까운지 농노에 가까운지에 크게 좌우되었다. 송씨의 여종처럼 솔거노비로서 노예에 가까울 경우에는 주인이 함부로 대하기 쉬웠지만, 박인수처럼 외거노비로서 농노에 가까웠을 경우에는 주인이 함부로 대하기가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1 한홍구, 〈미국 한국학의 선구자 제임스 팔레: 정년 기념 대담〉, 《정신문화연구》 통권 83호, 2001, 212~213쪽.
2 石坂昭雄·船山榮一·宮野啓二·諸田實, 배주한·홍성희 옮김, 《서양경제사》, 삼영사, 1997, 26쪽.
3 서양중세사학회, 《서양 중세사 강의》, 느티나무, 2003, 133~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