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비들 /
노비는 노(奴)와 비(婢)가 합쳐진 말이다. 흔히 ‘노’는 남자 하인, ‘비’는 여자 하인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됐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대 주나라의 정치체제를 정리한 《주례(周禮)》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례》 〈추관사구(秋官司寇)〉 편에 ‘노’와 관련된 문장이 있다.
노(奴) 가운데서 남자는 죄예(罪隸)로 들이고, 여자는 용인(舂人)이나 고인(槀人)으로 들인다.
노 자의 우변에 있는 ‘우(又)’는 이들의 외형적인 모습을 표시하고 있다. 중국 후한(後漢) 때 나온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우는 손 수(手) 자에서 나왔다. 10세기 때 중국 학자인 서현(徐鉉)은 《설문해자》를 해설하면서 “우는 손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따라서 우 자를 포함한 노 자에는 노동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노비의 기원이나 글자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노비는 타인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존재를 지칭했다. 그 타인은 개인일 수도 있고 왕실일 수도 있고 관청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주로 왕실과 관청이 노비를 소유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개인이 소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상이 누구든 간에 타인에게 예속되어 신분적 얽매임을 받는 존재가 노비였다.
이 대목에서, KBS 드라마 〈추노〉에 나온 태하(오지호 분)와 대길(장혁 분)의 대화를 떠올려보자. 훈련원 판관으로 소현세자의 측근이었던 태하는 세자의 죽음과 함께 노비로 추락했다가 기회를 틈타 도주했다. 거액을 약속 받고 그를 잡으러 떠난 추노꾼이 대길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이들은 ‘애증의 친구’ 사이가 되었다. 태하가 도주 과정에서 만나 결혼한 언년이(이다해 분)는 실은 대길의 옛 애인이었다. 언년이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힌 대길은 태하를 돕기로 결심했다.
한편으로는 애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증오를 품은 대길은 태하를 “어이! 노비”라고 부르곤 했다. 드라마 최종회에서도 대길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자, 태하는 “자네는 아직도 날 노비로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대길은 “그렇다”면서 꽤 철학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세상에 매어 있는 것들은 다 노비야.” 대길의 말처럼 노비의 본질은 ‘얽매임’이다. 남에게 구속되는 것이 노비의 본질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구속이란 모든 형태의 구속이 아니라 신분적 구속에 국한된다. 예컨대 국립대학 겸 행정연수원인 성균관에는 교직원들도 있고 유생들도 있고 노비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성균관에 구속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교직원이나 유생들을 성균관 노비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들의 구속은 ‘신분적’ 구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 동안 성균관에 묶여야 할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 노비들은 달랐다. 그들은 뭔 일을 하든지 성균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남의 양자가 된다고 해서 친부모와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비의 신분적 구속은 그런 천륜과도 같은 것이었다. 면천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은 천륜이었다.
성균관 기숙사
우리 동방에 안문성(安文成) 같은 분이 있어
윤기가 이 시를 지은 때가 18세기 후반이었으므로, 반인들은 거의 400년간이나 성균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반인들이 안향의 노비에서 성균관의 노비로, 또 고려시대의 노비에서 조선시대의 노비로 바뀐 데서 느낄 수 있듯이, 노비들은 웬만해서는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신분적 구속에 얽매어 있었다. 그 구속은, 주인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순간접착제 같은 것이었다.
노비의 구속은 종신제 구속이었다. 오늘날에는 종신제 계약이 잘 인정되지 않는다.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어느 일방에만 가혹한 종신제 계약은 설령 그 일방이 동의했더라도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노비제도는 종신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타인에게 평생 동안 얽매어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노비의 구속은 노비 본인뿐 아니라 자손에게까지 이어졌으니 노비제도는 매우 가혹한 제도였다. 중국과 비교해도 가혹했다. 중국에서는 노비의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은 《반계수록(磻溪隧錄)》 〈병제(兵制)〉에서 중국 노비는 자기 대에 한해서만 복역할 뿐이라고 말했다.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모두들 범죄 때문에 노비가 되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고용된 것일 뿐이다. 혈통을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되는 법은 없다.
물론 중국 노비제도에서 세습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여 그것이 현실적으로 완전히 지켜졌다고 볼 수만은 없다. 노비 부모를 둔 자녀는 특별한 사정변화가 없는 한, 부모의 노비주를 위해 복역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별다른 생계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부모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독립을 선언한다면, 어디서 호구지책을 마련할 것인가? 부모의 길을 따르는 게 현실적으로 유리한 경우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만 중국 노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유를 선택할 수 있었다. 조선의 노비들은 그런 기회마저 누리지 못하고 본인은 물론 후손까지도 얽매인 삶을 살아야 했으니, 조선 노비들만큼 불우한 신세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박인수가 신발의 노비라는 것은 그가 평생 신발 가문에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주인집이 자기에게 부과한 의무를 이행하며 살아야 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노비의 의무를 다하는 한, 그가 책을 읽든 선비들과 교유하든 노비주 신발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박인수의 가족들이 그의 몫만큼 열심히 일해서 그 결과물을 주인집에 갖다주면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인수의 가족들은 그런 수고조차 하지 않아도 되었는지 모른다. 박인수의 제자들이 갖다주는 재물을 주인집에 바치면 됐기 때문이다. 선비 박인수는 그런 의미에서 노비였던 것이다.
이제, 노비는 마당이나 쓸고 주인에게 굽실대며 툭 하면 얻어맞는 존재란 이미지를 버리자. 박인수처럼 그렇게 살지 않는 노비들도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간의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노비의 세계로 우리 좀더 깊이 빠져보자. 노비의 개념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평소 애매한 문제 중 하나였을 수 있는 머슴과 노비의 관계를 살펴보자. 머슴과 노비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를 살펴보면서, 노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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