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선비들의 존경을 받은 노비

구름위 2014. 9. 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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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상상하는 노비(奴婢)는 ‘마당을 쓰는 사람’, ‘주인에게 굽실대는 사람’, ‘툭 하면 얻어맞는 사람’ 정도다. 아주 틀린 이미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이미지도 아니다. 상당 부분은 편견으로 채워진 선입견이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 노비 박인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비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이 실제 사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왜냐? 박인수는 글 읽는 노비였기 때문이다. 마당을 쓸거나 주인에게 굽실대거나 툭 하면 얻어맞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노비 신분을 갖고도, 존경 받는 학자로서 활약을 펼쳤다. 박인수 혼자만 그랬던 게 아닐까? 아니다. 전문적으로 학문 활동만 하는 노비도 많았다. 박인수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박인수(朴仁壽, 1521~92)는 정2품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1)를 지낸 신발(申撥)의 노비였다. 오늘날 발행된 어떤 사전에는 박인수가 평민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전을 집필한 사람은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으니, 그는 양반 아니면 평민이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학자들 중에 노비도 있었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조선의 선비
박인수는 노비였으나 높은 학식과 단정한 품행으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제자들까지 거느렸다. 사진은 다산유적지에 전시된 정약용의 모형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소재.
 
박인수는 막일을 하는 노비가 아니었다. 학식을 쌓고 선비 이상의 몸가짐을 유지한 노비였다. 조선 후기 민담집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다. 아래 글에서 “노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노비는 학문을 연구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인 노비들은 그런 직업밖에 가질 수 없었다는 의미다.

 

국법상으로 노비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 박인수는 천한 일을 버리고 학문에 힘쓰면서 선행을 좋아했다. 읽은 책은 《대학》 《소학》 《근사록(近思錄)》2) 같은 것으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행실이 탁월했고 예법에 맞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았다.


박인수는 일반적인 노비의 길을 거부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를 학문의 길로 이끈 사람은 박지화(朴枝華)란 학자였다. 박지화는 대학자인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명종 때 당대 최고의 학자로 손꼽혔다. 박인수는 유학만 배운 게 아니었다. 한때는 불경에 심취해서 승려가 되려고 했다. 유교와 불교를 두루 공부했으니, 누구와 대화해도 막힘이 없었을 것이다. 방 안에 거문고를 두고 즐길 정도로 취미도 제법 고상했던 듯하다.

 

노비 주제에 그렇게 한다고 남들이 알아주기나 했을까? 비웃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그의 학문은 남들이 ‘알아줄’ 정도였다. 수많은 선비들이 그를 존경했다. 매일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수십 명의 제자가 찾아와 마당에 늘어서서 절을 올렸다. 제자들은 박인수에게 죽을 올린 뒤, 그가 다 먹은 다음에야 물러갔다. 그가 선비 중심의 사회에서 얼마나 탄탄한 지위를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노비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였으니 박인수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노비주(奴婢主) 신발도 그를 쉽게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인수가 주인집에 기거한 솔거노비였는지 아니면 주거를 따로 한 외거노비였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평생 노비 신분을 유지하며 공부에 전념한 것을 보면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학문적 명성을 쌓기 전까지는 가족 중 누군가가 그를 위해 희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중에도 그가 노비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외거노비의 중요한 의무는 노비주에게 정기적으로 신공(身貢), 즉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제자가 생기기 전에는 가족들이 대신해서 신공을 바쳤을 것이고, 제자가 생긴 후에는 거기서 생긴 수입으로 박인수 스스로 신공을 마련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노비를 거느린 노비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시기심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박인수의 주인은 그렇지 않았다. 박인수는 주인집과 꽤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어우야담》에서는 그가 신발의 아들인 신응구(申應榘)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박인수는 그냥 학문이 좋아서였지만, 신응구는 과거시험을 목표로 금강산에 공부하러 갔다. ‘수험생’인 아들을 노비에게 맡긴 것을 보면, 신발이 박인수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인수가 당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주인집과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박인수가 좀더 쉽게 선비 사회로 진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주인이 면천(免賤)을 시켜주지 않았다면, 일개 노비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면천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인수 같은 인물이 면천되었다면, 그 이야기도 분명히 전하겠지만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사실은 노비 신분으로 학문 활동을 하는 박인수의 모습뿐이다.

 

선비형(型) 노비 박인수는 우리를 의아하게 만든다. 노비가 글을 좋아하고 거문고를 타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노비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박인수를 떠받든 제자들은 거의 다 양인(良人)이었을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특권층인 양반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노비를 떠받들었다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박인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노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역사적 실제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비에 관해 잘못 아는 게 많기 때문에 박인수란 존재를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노비가 정확히 어떤 존재였는지를 탐구하면, 박인수가 노비 신분을 갖고 선비 사회에서 존경을 받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각주
1 중추부는 1392년 건국과 함께 설치된 중추원(中樞院)에서 출발한 기구였다. 중추원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 경호실, 국방부 등을 합쳐 놓은 기관이었다. 이 부서는 1400년에 삼군부(三軍府)로 개칭됐다가 1401년에 승추부(承樞府)로 바뀌었다. 1405년에 군정 업무가 병조로, 비서 업무가 승정원으로 이관되면서 승추부는 병조에 흡수됐다. 1432년, 경호 기능을 띤 중추원이 다시 설립되었다. 이것이 1461년 중추부로 개칭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중추부는 실권이 없었다. 정3품 이상의 고위 품계를 갖고 있지만 특별한 소임이 없는 사람을 예우하는 기관에 불과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계급은 준장인데 보직이 없는 장군에게 형식상의 직책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박인수가 살던 시대의 중추부가 바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