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왕을 낳은 후궁들과 七宮

구름위 2014. 5. 16. 15:53
728x90

 

왕을 낳은 후궁들
후궁-첩 이야기, 최선경 지음

 1. 죽어서도 아들을 지킨 어머니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 단종을 낳고 곧바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후 죽은 지 16년이 지난 현덕왕후의 묘를 파헤친다. 문종은 1421년 8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1450년 즉위하기까지 가장 긴 세자시기(29년)를 거친다. 세자시절 문종은 세 번이나 세자빈이 바뀌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세자빈은 문제가 있어 모두 폐서인된다. 마지막 세자빈인 권씨는 세자의 세 후궁 중 한명으로 후궁시절 이미 딸을 낳은 적이 있다.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4년 후 원손을 낳는데 권씨는 출산 후 다음 날 사망한다. 세자빈 사망 후 13년이 지난 다음 문종은 왕위에 등극하게 되고 권씨는 현덕왕후로 추존된다. 만약 문종이 즉위하기 전에 다른 여인을 빈으로 맞았다면 권씨는 왕후가 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문종은 37세에 등극하여 2년 4개월이라는 짧은 재임기를 보낸다. 문종 서거 당시 단종의 나이는 12세로 수렴청정을 해줄 대비나 대왕대비도 없는 상태였다. 왕에 오른 지 3년 후 결국 단종은 왕위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물러나며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유배 보낸다. 후궁 시절 낳은 권씨의 딸 경혜공주는 그 아들과 함께 관비로 전락하여 어린 시절 성종의 시종이 된다.

문종의 세 번째 세자빈으로 단종을 낳았으나 아들이 왕이 되기 전 사망하였으며 후에 세조에 의해 일가가 무너지고, 능이 파헤쳐지고, 종묘에서 신주까지 빼내진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세조의 이런 행위는 권씨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성을 내며 “네가 죄 없는 내 자식(단종)을 죽였으니 나 또한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 라고 한 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한 일이 생기는데 이에 대한 세조의 복수라는 야사가 있다고 한다.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은 현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안에 있다. 처음에는 문종 혼자 단릉으로 있었으나 중종 8년에 현덕왕후의 소릉을 옮겨와 동원이강(同原異岡) 형태로 조성되었다. 동원이강 형태는 구릉을 사이에 두고 왕릉은 바라보아 왼편 언덕에, 왕비릉은 오른편 언덕에 위치한 것을 의미한다.

2. 조선 최초의 왕비 살해사건(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조선시대 후궁이 왕비로 책봉된 경우는 문종비 현덕왕후와 예종비 안순왕후, 성종의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 숙종비 희빈 장씨가 전부다. 성종4년(1473년) 윤씨는 훗날의 정현왕후 윤씨와 함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내명부 종2품)가 된다. 당시 폐비 윤씨는 29세, 정현왕후 윤씨는 12세였다. 입궁 다음 해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19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자 윤씨는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가 된지 3개월 만에 아들 연산을 출산한다. 그러나 성종은 재임기간 동안 정비 세 명과 후궁 열 명을 두었고 그 자손만도 16남 12녀로, 여색을 즐겼던 왕이다. 윤씨의 질투는 결국 왕비에 오른 지 3년 만에 폐비가 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고 다시 3년 후에는 사약을 마신다.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는 원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경희대 공사로 서삼릉 안으로 옮겨진다. 폐비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성종이나 대비전의 의견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주 요인은 윤씨의 질투인 것으로 보인다. 윤씨를 폐비시키고 나서 3년 뒤 갑자기 사약을 내린 배후에는 시어머니인 소혜왕후(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있었다. 소혜왕후는 여성 한학자로서 도덕적 유교사회의 여성상을 정리하여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보기 드문 여성유학자였다. <내훈>에서 제시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며느리가 공경하지 않거나 효도하지 않아도 증오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된다. 시어머니로서 가르쳐야 한다. 가르친 연후에도 듣지 않으면 화를 낼 것이요, 화를 내고 꾸짖은 연후에도 듣지 않으면 매를 때릴 것인데, 누차 때렸는데도 고쳐지지 않으면 며느리를 내쫓아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소혜왕후는 며느리를 결국 쫓아내고, 사약 내리는 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폐비 윤씨 이후 새로운 중전은 폐비 윤씨와 같이 후궁이 되었던 정현왕후 윤씨가 된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아들로 입적하여 친자식처럼 대했다지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을 낳은 후에 연산군은 외로운 처지가 된다. 자칫 연산군은 진성대군에게 세자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었지만 성종의 이른 승하(38세)로 인해 연산군은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들인 엄씨와 정씨를 죽이고 그 현장에서 소혜왕후를 머리로 들이받아 쓰러지게 한다. 결국 소혜왕후는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3. 아들과 함께 폐서인이 된 어머니(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

명종이 후손 없이 타계하자, 덕흥군(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아들)의 3남 하성군이 14대 왕 선조로 즉위한다.

선조의 원비인 의인황후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동안 후궁 공빈이 임해군을 낳고 그 다음 해에 또 광해군을 낳는다. 그러나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 후 산후병이 계속되어 1577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공빈과 경쟁관계였던 인빈 김씨는 공빈 사후 선조의 총애를 받아 4남 5녀를 두게 된다.

선조는 적자가 생기기를 기다리면서 세자 책봉을 미루다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4월 29일 책봉의식도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결정한다고 발표한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다고 왕세자 물망에서 배제되었다.

광해군의 나이 18세가 되도록 세자 책봉을 미루던 선조는 일신의 안전을 위해 도망치면서 혼란에 빠진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을 세자 광해군에게 떠넘긴다. 그해 광해군과 세자 자리를 다투던 인빈 김씨의 신성군은 의주 피난길에서 병사한다.

명나라는 왜란 중에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대우하더니 왜란 후에는 맏아들을 제치고 둘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설상가상으로 선조의 두 번째로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가 선조의 나이 55세에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는다. 그러나 영창대군의 나이 어려서 선조의 병세와 악화되어 세상을 하직하고 광해군은 불안했던 16년간의 세자생활을 끝내고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광해군은 즉위 후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고 명나라의 승인을 얻기 위해 장기간 신하들과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장자가 아닌 둘째 왕자로서 왕위에 오른 점과 후궁 소생의 서자라는 신분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왕후로 만드는 데에 지나친 집념은 점차 지지기반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광해군의 실리 우선의 통치, 즉 쇠락하는 명나라와 새로 등장하는 후금과의 등거리 외교는 명분을 잃게 되고, 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사건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인조반정을 초래하게 된다. 광해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67세에 숨을 거두고, 어머니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광해군의 묘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공빈 묘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한다.

4.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게 하라!"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

숙종의 총애를 받는 남인인 장씨(후에 희빈)는 서인 출신의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에게 궁에서 쫓겨난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는 중전으로 들어온 후 장씨를 다시 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장씨의 불손한 태도는 날로 심해져 중전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을 정도로 되고 중전의 명에 의해 종아리를 때리게 하자 원한과 독을 품고 오라비 장희재 등과 중전을 쫓아낼 계략을 세우게 된다. 실록에는 민씨가 장희빈을 모함했기 때문에 폐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 예로부터 후비가 투기로 인하여 원망하고 분노하는 경우가 진실로 혹 있었으나, 지금의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 선후의 하교를 지어내어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장옥정)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숙종6년) 역옥 후에 불령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에는 자손이 많아 장차 선묘(선조)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삼척동자라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 숙종실록 15년 5월 2일.

장씨가 내전을 장악하고 있을 무렵 최씨 성을 가진 나인이 자신이 모시던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려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가상히 여겨 마침내 그녀를 후궁으로 맞이하게 되고 왕비가 된 장씨에게는 라이벌이 된다. 장씨는 국모로서 갖추어야 할 품위와 리더십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왕비가 되기 위한 야심은 컸지만 그 자리를 보전할 능력이 없는 것이 장씨의 큰 약점이 된다.

민씨가 복위되면서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지만 세자의 친모인 것을 고려하여 궁에 남게 된다. 인현왕후는 환궁하여 왕비로 복권됐으나 7년 후에 35세로 세상을 뜬다. 장희빈은 신당을 차려 굿을 하거나 저주의 주술로 인현왕후를 제거하려 하다가 이 사실이 드러나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한 해에 사약을 마시고 43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희빈 장씨는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을 성불구자로 만든 여인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는 자리에서 세자의 국부를 잡아당겨 결국 불구로 만든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의 재임기는 4년이다.

5. 왕을 낳은 무수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이 숙빈 최씨이다. 숙빈 최씨는 숙종의 후궁이면서도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그녀에 관한 기록 또한 별로 없다. 실제 무수리였다 하더라도 임금의 어머니를 미천한 무수리로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용숙 교수는 숙빈이 침방의 나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가 고종에게 직접 들은 증언이라고 한다. 이를 입증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영조가 어머니께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렵더이까?” 하니, “중누비, 오목누비, 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어렵더이다” 하고 최씨가 답했다. 그 이후부터 영조는 평생 동안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김용숙

숙빈 최씨는 장희빈이 중전 자리에서 쫓겨나고 남인 축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숙종의 총애를 받는 숙빈 최씨의 증언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숙빈 최씨는 숙종 승하 2년 전인 숙종 44년(1718), 연잉군(영조)이 살고 있던 창의궁에서 임종을 맞는다. 비록 아들이 왕이 되는 모습을 못 보고 49세의 나이에 생을 마쳤지만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동시대의 장희빈과는 대조되는 인생을 살았다.

6. 아들을 버린 어머니(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그 죽음을 부모가 나서서 주도했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자를 죽이라는 대처분을 요청한 사람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였으며 명령을 내린 사람은 친아버지인 영조이다. 더구나 뒤주형이라는 전대미문의 흉측한 형벌을 제의한 사람은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고, 세자빈 혜경궁 홍씨 역시 노론 세력인 친정의 편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하였다. 영빈 이씨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영조의 대의를 따라 아들을 희생시킨다. <2008년 4월 16일자 ‘사도세자의 고백’ 참조>

7. 대비가 된 후궁(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앞서 소개한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이 즉위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지만, 수빈 박씨의 경우 아들 순조가 즉위하고 나서도 22년간을 함께 살았다. 아들의 재임기에 왕을 낳은 후궁으로서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8. 망국의 한을 품다(영친왕의 어머니 황귀비 엄씨)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이왕’으로 강등되고 더 이상 황제국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엄씨는 고종의 후궁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라 할 수 있는 황귀비에 올랐지만, 생애는 이름만큼 화려하지 못했다. 이미 나라를 빼앗겼고 고종은 언제 암살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아들 영친왕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으니 엄씨의 마음고생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1년 사망한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한 셈이다. 양정의숙과 진명, 숙명여학교는 엄귀비의 지원에 의해 설립된 학교라고 한다. 특이한 점은 엄귀비가 궁궐의 궁녀들을 숙명에 입학시켜 근대교육을 받게 하였다는 점이다. 엄귀비의 후원으로 인해 진명과 숙명의 학생들은 학비 한푼 내지 않고 기숙사 생활을 하였으며 교육비와 숙식비, 교복까지 무료로 지원받는다. 58세때 장티푸스로 사망한 엄귀비는 전염병이라는 이유로 사후에서도 영친왕과 대면하지 못한다.

 


                   대빈궁.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 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청와대 경내에 있어 일반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청와대 옆 궁정동에는
칠궁(七宮)이라고 불리는 조선시대 건물이 있다. 칠궁은 궁궐이 아닌 후궁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수많은 조선시대 후궁들 중 왜 유독 7명만 이곳에 모셨을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후궁이지만 자기 몸으로 훗날 왕이 된 아들을 낳은 사람들이다.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등이 칠궁에 모셔져 있다. 이들은 권력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후궁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사극의 단골 소재로 활용되는 것만 봐도 이들의 삶이 얼마나 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회의 축첩은 여성의 적을 여성이게 한 비인간적인 제도였다. 문제를 발생시킨 남성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고 피해자인 여성들끼리 싸우게 만든 이 같은 상황은 왕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남자를 놓고 본처와 첩, 혹은 첩들끼리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살인까지 벌어졌다.

이제까지 후궁들의 이야기만을 담은 역사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문화유산 해설사인 최선경 씨가 최근 펴낸 `왕을 낳은 후궁들`은 눈길이 가는 책이다. 이 책은 철저히 여성사적인 시각으로 후궁들의 삶을 탐구한다. 후궁들을 왕실암투의 진원지이자 악의 화신으로 그려낸 지금까지의 시각에서 벗어나 여성의 시각으로 이들의 흔적을 더듬는다.

칠궁에 모셔진 후궁들 중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은 인물은 역시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사약을 받기 직전 세자의 국부를 움켜쥐어 성불구자로 만들었다. 책의 저자인 최선경 씨는 이 행위를 가부장 사회에 대한 복수로 해석한다. 다른 후궁들이 같은 여성들을 적으로 삼고 그들을 원망하며 생을 마감했다면, 장희빈은 숙종을 원망했고 자신의 운명을 비틀어지게 한 장본인인 숙종이라는 남성에게 정면도전을 한 것이다.

자손이 없는 후궁들의 말년은 쓸쓸했다.왕이 승하하고 나면 동대문 근처에 있는 정업원(淨業院)에 들어가 비구니 신분으로 왕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 죽을 때까지 왕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 정업원의 端宗妃에 대한 秘話

 

단종이 유배되자 정순왕후는 부인(夫人)으로 강봉(降封)되고 심지어는 관비로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이 당시에 더욱 놀라운 기록이 하나 있다. 신숙주가 정순왕후 송씨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은 사건이다. 당시 정순왕후 송씨의 신분이 관비였으므로 신숙주의 요청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왕비를 종으로 달라고 청하는 건 누가 봐도 당황스러운 요구다. 집현전 다른 동료처럼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키다가 처절하게 죽어 ‘사육신’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왕비를 종으로 달라는 신숙주의 처신은 그를 오늘날까지 변절자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식탁에 자주 오르지만 잘 변질되는 숙주나물에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된 것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세조도 신숙주의 행동이 매우 놀라워 정순왕후 송씨에 대해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 정순왕후 송씨는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내졌다. 정업원은 조선 초기 슬하에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결혼 후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야 했던 왕실 여인이 기거하던 곳이다. 

 

 

 

청룡사 안에‘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오른쪽)이 있는 비각(왼쪽)이 있다. 정순왕후를 애석하게 여겼던 영조가 직접 비와 현판을 내렸다.

`축첩은 허용하되 본처의 지위는 보장한다`는 모호한 가부장제 그늘 속에서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던 후궁들의 강요된 운명은 분명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