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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노우에(2), 조선 동학농민군 학살을 현지에서 지휘하다

구름위 2014. 2. 2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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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6월 23일 일본군 경복궁 점령, 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친일 개화파를 내세워 정권을 좌지우지.  9월 이노우에 가오루가 10년만에 서울에 나타난다. 외무대신과 내무대신을 지낸 후 스스로 강등하여 조선공사로 부임한 것.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증파된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대대장에게 지휘권을 넘겨받아,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섬멸한다. 그는 동학군을 철저히 추격하고 학살한다. 조선에서 일본에 저항할 핵심세력의 싹을 자른 것. 이로써 조선은 일본의 실제적인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니, 이노우에는 일본인들에게는 이토히로부미 못지 않은 영웅으로 추앙될 밖에 /동학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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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조선 동학농민군 학살을 현지에서 지휘하다
출처;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265298

 

이노우에, 정부에 배상금 강요 등 온갖 악행 자행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 48명 전원 일본으로 빼돌려
고종에게 개혁안 20조목 제시하며 윽박 지르기도


 

 
 야마구치 현청사 담에 붙여 설치한 비둘기가 비상하는 모습 조각.
야마구치 현청사의 담장 바깥에 7개의 삼각형 돌을 이어 붙인 조각을 세웠다. 비둘기 모습이다. 그 옆에 2006년 12월 19일자 「비핵평화도시선언비」가 나란히 있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으로 야마구치 시민의 평화 염원을 표현했다고 새겼다. 한국 사람의 눈에는 역설의 상징처럼 보인다. 야마구치는 일제의 침략과 전쟁을 대표하는 땅이었다. 여기에 평화라는 개념은 없었다.

19세기 말 4,200만 일본 인구 중 약 2% 100만명에 불과했던 야마구치의 인물 배출은 놀랍다. 총리만 따져도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나카 기이치,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아베 신조, 간 나오토까지 모두 9명이 나왔다. 아베 신조는 다음 총리가 또 된다고 한다.

 
 야마구치의 역사를 담은 현립박물관
메이지 시기의 야마구치 출신 장교들은 정말 대단했다. 육군대장은 오시마 요시마사, 고다마 겐타로, 노기 마레스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오카자와 쿠로시, 칸노 이치 등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명성황후 시해를 지휘한 중장 계급의 미우라 고로도 여기 출신이다.

일본제국의 육군은 초창기에 야마구치와 가고시마 두 지역 출신이 장군을 독식하는 형태로 출발했다. 전국 최고 수준인 고치현(14명)보다 가고시마는 두 배 이상인 30명, 야마구치는 그 두 배 이상인 64명이 장군으로 출세했다. 대장과 중장 등 고급 지휘관 비율은 더 압도적이었는데 바로 이들 야마구치 출신 장군들이 침략 전쟁의 주역이었다.

■ 고종과 담판을 요구한 건방진 대사

일본제국의 장군과 함께, 아니 장군보다 앞서서 침략을 주도한 인물들이 이른바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이었다. 사무라이 출신들이라고 하니 군복을 입지 않고 총을 들지 않았을 뿐 마찬가지 부류였다. 그 가운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1884년 11월 21일 고종은 낙선재에서 갑신정변 때문에 일본대사로 온 이노우에를 접견하였다. 오늘날처럼 대사관에 주재하지 않고 특별 사정이 있을 때 방문해서 일을 처리하는 직책이 대사였다. 고종은 그 자리에서 해괴한 말을 듣는다. 비밀리에 아뢸 말이 있다고 신하들을 내보내라고 청했다. 시위 신하가 5명으로 줄어들자 이노우에는 더 해괴한 말을 한다. 고종과 직접 담판하든지 아니면 고종 면전에서 대신과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조선측이 시일을 끌었다면서 국왕이 담판에 나서라는 요구였다. 발칙한 말이었지만 유약한 고종은 그 말을 들어준다. 결국 좌의정 김홍집이 전권대신이 되어 3일 뒤인 11월 24일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에 입힌 피해에 대해 국서를 보내 사과하고, 일본인 피해자에게 11만원을 보상하며, 새 공사관 부지를 주고 그 증축비까지 2만원을 내라는 요구를 다 받아들였다.

일본의 피해는 궁궐을 침범한 반란자들을 일본 공사관 호위병이 지원한 까닭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본의 사죄를 강력히 요구해야 마땅했지만 협상은 거꾸로 돌아갔다. 이노우에가 밀어붙이자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였다. 막대한 배상금은 3개월 내에 지불하도록 못 박았고, 반란에 가세한 호위병도 축출하는 게 아니라 새 병영을 만들어준다고 하였다.

 
- 야스쿠니신사에 봉안된 이소바야시 대위의 묘비. 아오야마레이엔(靑山靈園)에 있다.
더 이상한 조목은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 대위 살해범을 체포해서 20일 기한으로 처형하라는 요구였다. 고치현 출신인 이소바야시는 강원도 요지를 정탐하고 돌아오던 중에 청파의 갈오리에서 군중에게 둘러싸여 돌세례를 받고 죽었다. 일본군의 궁궐 침범에 사람들이 분노한 것이다. 이 조약 때문에 열혈 조선남아 김대흥(金大興, 22세)과 원한갑(元漢甲, 23세) 두 사람이 포도청에 잡혀 일본인 입회 아래 처형되었다.

■ 갑오년엔 이틀 간 고종에게 개혁 강요

이노우에 가오루를 캐면 줄줄이 침략에 관여한 사실이 튀어나온다. 개화파를 친일파로 만든 후쿠자와 유키치와 결탁해서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가 경영난에 몰렸을 때 「시사신보」를 만들어 메이지정부의 정책을 선전하게 했다. 막말 일색인 기사 논조는 곧 이노우에 가오루의 정책 방향이기도 했다.

1894년 6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하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친일 개화파를 내세워 정권을 마음대로 하였다. 이해 9월 이노우에 가오루가 10년만에 서울에 나타났다. 조선에서 맛을 들인 그가 외무대신과 내무대신을 지낸 후 스스로 강등하여 조선공사로 부임하였다. 경복궁에 인질로 잡혀있던 고종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본측에서 보면 이노우에의 성과는 놀라웠다. 서울의 일본공사관은 도쿄의 일본 정부, 히로시마의 대본영, 평양과 뤼순의 일본군과 함께 전쟁을 이끈 사각편대였다. 도쿄정부는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주도했고, 히로시마대본영은 메이지 천황과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가 지휘했으며, 평양과 여순 공격은 1군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끌었다.

공사 이노우에는 조선에서 상왕과 같이 거침이 없었던 존재였다. 전쟁 수행에 조선에 설치한 병참과 전신 기지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조선정부에 협조를 강요하면서 전선을 절단하거나 전신주를 쓰러뜨린 사람들을 체포해서 처형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재봉기하자 증파된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대대장에게 관군의 지휘권을 넘기도록 하였다. 전국에서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책임의 일정한 부분은 이노우에가 져야 한다.

인사 문제 등 내정 간섭은 너무 많아 말할 수도 없다. 그 백미는 고종 앞에서 개혁안 20조목을 제시하고 윽박지른 일이었다. 10월 23일 우마야하라 소좌를 앞세워 경복궁에 들어간 후 각부 대신이 시립한 자리에서 정치 개혁을 역설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일 또 말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다시 대신들을 모이게 해서 '자주독립 개혁정치'를 하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고종의 직접 결재와 법령 준수, 조세의 탁지부 통일과 고문관 초빙 등은 갑오개혁의 핵심 내용이 되었다. 그것은 일본의 침략에 발판을 구축하는 개혁이었다.

 
 와세다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근대인물지'의 이소바야시 대위 그림.
■ 을미년엔 명성황후 시해범 빼돌리기

1895년 8월 20일 세계사에 전무한 사건이 벌어졌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위축되자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접근하고 일본을 멀리했다. 이때 이노우에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공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메이지정권의 실세 이토와 야마가타가 같이 짜낸 흉계의 시작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와 함께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1852-1912)를 사주하고 일본군 장교와 영사관 경찰관, 일본 낭인무리와 훈련대 군인들을 앞세워 경복궁을 침범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국수주의자인 오카모토는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육군대위로 따라온 자였다. 귀국해서 도쿄진대의 대대장으로 폭동을 주도했다가 쫓겨난 후 후쿠자와 유키치를 통해 김옥균 박영효와 친교를 맺는다. 다시 조선에 건너온 그는 역대 공사인 오토리 게이스케, 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의 책사처럼 활동했다.

사건 발생 후 즉각 철면피 이노우에 가오루가 대사로 특파되었다. 매천 황현은 그 흑심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그는 갑신정변 때 우리 나라에 와서 많은 요구를 하였다. 그가 지금 다시 온 것은 '미우라 고로 사건'을 미봉하기 위한 것이다."

이노우에는 일본인 관련자 48명을 전원 귀국시켰다. 강화도조약의 영사재판권이 근거였다. 민간인은 히로시마지방법원에, 현역군인은 5사단 군법회의에 회부했지만 다음해 모두 무죄로 석방되었다. 일본의 국가범죄가 드러나는 생생한 사례이다.

한국과 악연이 깊은 이노우에 가오루는 결코 평화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야마구치 현청의 평화선언 비석은 유다온천의 이노우에 공원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다. 그를 비롯해 메이지유신과 일본 근대화에 공을 세운 야마구치 인맥을 일본사에서는 매우 후하게 평가하고 있다. 일본이 정상적인 나라가 되려면 먼저 이런 평가부터 고쳐야 한다.
 

출처 : 동학혁명120주년
글쓴이 : 동학하는 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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