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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노우에(1) - 이토 히로부미 뒤에 숨은 침략의 선도자

구름위 2014. 2. 2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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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일본에게는 결과적으로 '대박'이었다. 일본군은 처음부터 조선침략을 의도하고 조선의 주력부대라 할 동학농민군을 철저하게 추적하여 학살하고 섬멸한다.조선의 정부군도 동학군에 밀렸으니 동학만이 일본군에 저항할 수 있는 실체였음에도, 개화파나 향촌의 유생들은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하지 못하고 일본군과 협력하여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진압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진다. 동학의 패배로 일제는 조선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동학농민군 학살의 핵심이라 지목되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에 대한 신영우교수의 글이 볼만하다. 충북일보에 연재된 글을 옮긴것/동학하는 사람 

 

 

 

이노우에, 이토 히로부미 뒤에 숨은 침략의 선도자
출처;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263107

 

 

 

메이지 정권의 재정과 외교 실세로 조선 침략을 선도한 인물
1862년 영국공사관을 습격한 테러단에 가담해 건 방화 성공
조슈번의 유명한 5인 중 하나로 대장·외무대신 등 요직 독점


 
 이노우에 가오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는 메이지정부의 조선침략에 앞장섰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명성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있는 인물이다. 조슈번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요시다 쇼인에게 배운 조선침략의 구상을 일생에 걸쳐 실천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정권의 실세로서 요직을 맡아온 그는 한국근대사에서 담당한 악역도 화려했다.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특명부전권대사로 와서 불평등조약을 주도했고, 외무경일 때는 신사유람단으로 온 개화파를 꾀어서 일본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청일전쟁이 벌어지자 주한 특명공사로 자원 부임해서 조선정부에 일본군 지원을 강요하였고,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반일봉기를 나서자 일본군 증파병의 학살을 지휘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즉시 서울에 특명대사로 와서 가담자 전원을 일본에 귀국시켜서 처벌을 막았다. 이들은 다음해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석방된다.

■ 야마구치시 유다온천의 이노우에 옛집

 
 다카다공원으로 이름을 바꾼 이노우에공원 표시.
한국에서도 야마구치시의 유다온천은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JR유다온천 역에서 내려 온천지역을 찾아 올라가면 골목 속에서 이노우에공원이 나타난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옛 집터에 만든 공원이다. 울컥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쉽게 그 흔적이 나타나다니!"

한국근대사에서 이노우에 가오루는 숨어 있었다. 심지어 한국사 개설 책에도 한두 군데밖에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 대부분이 그를 모르고 있다. 침략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온천 옛집 터에 있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동상.
일본근대사 연표에서도 슬그머니 그와 조선 관계를 빼놓은 사례가 보인다. 치밀하게 조사한 자료에서 생략된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1894년과 1895년,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직후에 수행한 그의 행동이 부끄럽지 않았다면 빼놓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유다온천의 작은 공원에 그를 기리는 흔적이 가득하다. 지금은 다카다(高田)공원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동판 위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의 생애를 새겨놓았다. "메이지 유신 창업 이래 시종 내외의 기밀이 높은 정무에 참여하였고, 산업 진흥에 진력해서 국운을 열어 원훈으로 추앙받았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동상은 모자를 벗고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공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부터 온몸이 새들의 배설물로 가득 덮여 있다. 그렇게 그는 역사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아이들은 소리치며 놀기에 바쁘고 어른들은 한쪽으로 나오는 온천물에 탁족을 한다. 공원 입구에서 솟아난 물은 지난 역사 때문에 찾아온 객을 아랑곳 하지 않고 흐른다.

■ 야마구치에서 반대파가 습격, 난자해

조슈(長州)번의 청사는 하기의 외진 곳에 있어 방어가 어려웠다. 양이의 침범을 막는 적지로 생각한 야마구치에 새 청사를 마련하고 1863년 4월 이주했다. 그때부터 조슈번은 야마구치번으로도 불리게 된다.

조슈번은 급진 존왕양이론을 내세워 교토 정국을 주도했으나 아이즈번과 사쓰마번이 주도한 정변에 의해 추방된다. 그러자 조슈번은 1864년 8월 고쇼(御所) 주변에서 3200여 군대를 동원해서 변란을 일으켰다. 약 250년만에 교토에서 일어난 이 대사건으로 3만호가 불에 타는 참사가 벌어졌다. 마침내 조슈번은 패배하고 급진 지도자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자객에게 공격받은 소데도키 다리의 돌비.
막부는 1차 조슈정벌군을 출진시켰다. 조슈번 내부에서는 막부에 순응하는 보수파가 집권하고 소장파를 처벌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에 반대하여 번주 앞에서 열린 대책회의 중 막부에 대항하자고 주장했다. 그 까닭에 귀로에서 반대파 자객에게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동상 옆에는 서양의사 도코로 이쿠타로(所郁太郞)의 현창비가 있다. 교토에서 의학을 배운 그는 조슈번의 사무라이와 가깝게 되어 야마구치의 병원 책임자가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난자된 상처는 6군데에서 5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로 봉합되고 위기를 넘겼다. 현창비는 그 공을 기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조슈군의 참모로 활동하다가 진중에서 장티프스에 걸려 27세에 죽고 만다.

야마구치에는 기헤이타이(奇兵隊) 결성지와 같은 유적이 곳곳에 있다. 이노우에 가오루도 건강을 회복한 뒤 대원 100명으로 구성된 고우죠군(鴻城軍) 총독으로 참전하였다. 고우죠군은 조슈번 소군(小郡)지구에서 호농과 하급 사무라이 중심으로 조직된 무장대였다.

■ 이노우에 가오루의 재정 실무경험

 
 이노우에 가오루 옛집 터 기념비.
요시다 쇼인의 제자답게 이노우에 가오루는 26세에 테러단의 일원이 되었다. 1862년 다카스기 신사쿠가 이끈 10명의 영국공사단 습격단에 가담해서 방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직후 후환이 두려운 그는 교토로 도피한다.

그는 조슈번의 명에 따라 이른바 조슈 5걸의 한 사람으로 영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그때 서양의 발전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런던에서 시모노세키 전쟁 소식을 듣자 급거 귀국해서 강화에 분주하면서 개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쓰마와 동맹을 맺은 후에는 나가사키에 체재하여 무기 구입과 외국 기선을 도입하는 업무를 맡았다. 유신 이후엔 규슈 진무(鎭撫)총독의 참모로 나가사키에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무역 거점인 나가사키는 막부의 직할지였다. 막부 패배 뒤 행정이 마비되자 조슈번의 핵심인물인 그가 가서 행정을 담당한 것이다. 이 경험은 유용하였다. 1869년 대장성으로 옮겨 조폐국과 은행 설립에 관여하는 등 재정전문가로 활약한다. 폐번치현 이후에는 중앙재정 확립과 회사 설립에 노력했다. 막부의 어용상인인 미쓰이가 이때 관과 결탁해서 성장을 시작한다.

■ 12년 간 대신을 지낸 화려한 관운

 
 야마구치시 루리코지(瑠璃光寺)에 있는 일본 3대명탑 중 하나인 오중탑.

메이지유신 성공 후 일등공신들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는 병사하거나 암살되어 무대에서 떠났다. 그 다음에 떠오른 인물들이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이노우에 가오루이다. 일본에서도 '밥하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였던 모양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제국의 헌법을 제정하고 내각을 만들어 초대에 이어 네 차례나 총리를 맡는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육군의 원로로서 청일전쟁에선 제1군사령관, 러일전쟁에선 참모총장으로 지휘한다. 또 두 차례나 총리에 올라 군대와 관료 양쪽에서 거물이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들처럼 제국의 정상에서 호령하지는 못했지만 정계와 재계에서 원훈의 지위를 유지하며 파벌을 바탕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15년에 80세로 죽을 때까지 재정, 외교, 산업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무엇보다 관운이 화려했다. 1879년 외무경에 오른 뒤에 외무대신 직책까지 8년, 농상무대신 1년 5개월, 내무대신 2년 2개월, 대장대신 6개월 등 모두 12년 1개월 동안 장관급으로 지냈다. 2개월 간 총리대리도 역임한다. 관직을 떠난 뒤에는 미쓰이재벌의 종신 고문으로서 경영에도 참여한다.

왜 지루하게 그의 행적을 살펴야 했나·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과 맺은 악연을 찾아보기 위한 사전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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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동학은 물론 명성황후 시해에도 관여

출처 :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264220

강화도 현장에서 재빠른 머리회전으로 판을 친 부사(副使)
조선침입 앞잡이로 실무밝았지만 1인자 앞에서는 조연행세
조선엔 불평등조약 체결 강요, 구미엔 불평등조약 개정 애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가 왜 조선과의 악연을 자원했는지 알 수 있다.

"이노우에의 장점은 머리회전이다. 일단 분규가 일어나면 전광석화처럼 대처해서 수완을 보인다. 어떤 어려운 문제에도 임기응변하는 재주를 갖고 있다. 성격은 급하지만 싫증을 잘 내지 않으며 공명심에 담박하고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부탁받으면 나쁜 직무라도 열심히 일했다. 세상의 악평은 그런 점에서 나온 것도 있다."

메이지정권이 당면 목표로 삼은 조선 침략의 앞잡이로선 실무에 밝은 그가 적임자였다. 불평등조약 체결부터 개화파정권의 친일 정책과 최대 반일세력인 동학농민군 제거까지 이노우에 가오루가 책임을 졌고, 명성황후 시해에도 마무리에 등장했다.

조선의 국권 탈취는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2대 소네 아라스케(1849~1910), 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가 담당했다.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은 그렇게 50년만에 조슈번의 사무라이들인 야마구치 인맥에 의해 완수되었다.

■ 유다온천의 메이지유신 사적지

야마구치 시청의 남서쪽에 대형 호텔과 여관들이 늘어선 곳이 있다. 유명한 유다(湯田)온천이다. 온천의 상징인 흰여우가 유다온천역 앞에서 커다란 조각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600년 역사를 가진 이 온천은 논 한 가운데 용출하는 금빛 원천에서 시작하였다. 밤마다 흰여우가 찾아오는 것을 한 스님이 발견했다는 전설로 온천의 역사는 시작된다.

 
 유다온천의 마쓰다야 사적비.
하지만 더 중요한 근대의 역사가 유다온천에서 이야기된다. 이른바 메이지유신의 지사들과 관련된 유적들이 여기에 있다. 골목을 거닐다 보면 여기저기 표지가 나온다. 어느 찻집 자리에는 요시다 쇼인이 다카스기 신사쿠 등과 밀의한 장소라고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격동기에 분주히 찻집을 드나드는 사무라이들이 상상된다.

어느 여관은 쇼인의 문하생으로 근대법을 정비한 초대 사법대신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顯義)의 처가였다고 한다. 얼마나 출입이 잦았던지 반란 모의장소인 여관집의 딸과 사귄 모양이다. 메이지유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감성이 흔들릴만한 곳이다.

 
- 1867년 유신 3걸인 기도 다카하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토시미치가 모여 사쵸동맹을 확인한 마쓰다야(松田屋). 현재 고급 호텔로 사용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사적(史蹟)으로 격상된 장소도 있다. 마쓰다야(松田屋) 여관이 대표적이다. 1867년 어느 날 여기서 유신의 3걸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여 사쵸동맹을 확인하고 막부 공격을 협의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급호텔로 변해서 메이지유신 문서를 전시한 자료실까지 설치하였다.

이 호텔의 방 이름은 특이하다. 신관 4층의 가장 넓은 방부터 신사쿠, 쇼인, 히로부미라고 이름을 붙였고 3층에는 가쓰라와 료마의 방이 있다. 호텔 온천의 노천탕은 흰여우탕이고, 가족탕이 유신의 탕이다. 방이건 욕탕이건 이노우에 가오루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편 골목에 그의 집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 독직사건 후 강화도조약으로 재기

 
 야마구치시 유다온천의 큰 길 모습.
야마구치로 조슈번의 번청을 이전한 후 유다온천에는 조슈의 근왕파뿐 아니라 사쓰마와 도사번의 인물까지 모여들었다. 신진 과격파들이 번의 실권을 장악하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가 막부타도를 모의하러 유다온천을 찾아온 것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그런 상황이 기회가 되었다. 소장파로서 중요 인물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거물급이 된 기도 다카요시와 다카스기 신사쿠의 도우미로 신뢰를 받았다.

막부는 조슈번에 타격을 주기 위해 무기 도입을 금지하였다. 그러자 사카모토 료마가 사쓰마번이 무기를 구입하는 것처럼 위장하자는 꾀를 냈다. 그때 총과 함정을 수입하는 실무를 맡은 사람이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메이지정권에서 그는 갖가지 난제를 극복하며 재정과 외교의 거물로 커나갔다. 통상과 조폐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은행 설립에도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 발생한 독직 사건으로 공격을 받아 모든 관직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때 그가 할 일이 생겼다.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서 해안을 방어하는 조선군의 포격을 야기한 뒤 무력으로 협박하며 수호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야마구치 인맥인 그를 이토 히로부미가 전권부사로 밀었다.

■ 회담장에서 효과 본 머리회전

 
메이지혁명을 모의한 찻집의 하나인 린야도(臨野堂) 돌팻말.
1876년 이노우에 가오루가 강화도에서 한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조약 체결까지 전 과정은 메이지 정권이 꾀를 짜서 밀어붙였기 때문에 전권대신도 아닌 부사가 한 일을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대표 신헌 전권대신이 쓴 『심행일기』를 보면 판을 좌우하던 일본인의 발언들이 나온다. 그것이 대부분 이노우에의 말이 아닌가 한다.

강화도에 도착한 일본대표단은 군대를 앞장세워 상륙했다. 그리고 회담장 주변에서 훈련을 하며 협박 분위기를 조성한 뒤 초안을 제시하였다. 서구 열강이 시작한 근대외교의 경험이 없는 조선 관리는 조약문이 갖는 허점을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은 머리회전이 빠른 이노우에 가오루가 놓칠 수 없는 무대였다.

우선 조선대표의 자격에 시비를 걸었다. 조정과 논의하면서 회담을 진행하자 영의정과 직접 만나겠다고 하였다. 또 조선이 의례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옥신각신했다. 조약문에 국왕을 직접 기재하고 어보를 찍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심각한 조약 내용에는 초점을 무디게 하였다. 물론 조정에서 검토하고 최종 재가한 내용이 조약으로 체결되었지만 관세를 설정하지 않은 것 등은 그의 솜씨였을 것이다.

조선은 영사재판권이나 연안측량권 부여 그리고 개항장 설정으로 뒤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일본이 서구열강에 당한 영사재판권 등을 조선에 슬그머니 덮어씌운 것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연표에는 강화도 조약 때문에 일본의 힘으로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다고 써놓았다. 터무니없는 말이다. 전근대의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 세계였다. 신성로마제국이 중심인 유럽이나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했던 아랍도 그러했다. 근대에 들어와 모든 나라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근대화는 지구촌이 하나의 문화권으로 전환되면서 각국이 구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 침략 대상으로 목표한 조선과의 조약문에서 자주국으로 쓰게 했다고 공치사하는 것은 이후 침략의 역사를 보면 우스운 일이다.

■ 2인자로 수명을 연장한 이노우에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는 부대신 이노우에보다 4살이 적다. 고비마다 그를 챙겨 되살려놓은 이토보다는 이노우에가 5살이나 많다. 육군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보다는 2살이 많다. 그는 평생 이들의 조력자로 지낸 조연 체질이었다.

조선에서 공을 세운 그는 1879년 외무경에 오르고 곧 외무대신이 된다. 그의 최대 임무가 구미 열강에게 애걸해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역설도 그런 역설이 없다.

아시아를 적대하며 시작한 메이지정권은 위선으로 출발한 정권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아시아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의 메이지를 암울하게 만든 인물의 하나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출처 : 동학혁명120주년
글쓴이 : 동학하는 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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