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여종의 손가락을 자른 주인

구름위 2014. 9. 24.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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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의 손가락을 자른 주인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한때 옥고를 치렀다가 석방된 후에 삼정승을 두루 지낸 인물이 있다.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이 그 주인공이다. 홍언필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명종실록(明宗實錄)》1) 〈홍언필 졸기〉에서는 “인품이 겸손하고 청렴하여 일상생활이 매우 검소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마음속으로 항상 화를 두려워하여 바른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인물이라는 평도 있다. 두 가지 평가를 종합하면, 그는 신중하지만 소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부인은 그와 반대였다. 그의 부인은 중종 때 명재상인 송질(宋軼)의 딸로, 왈가닥인 데다가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홍언필이 송씨와 결혼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송씨는 처녀 때부터 엽기적인 행각으로 유명했다. 처녀 시절, 송씨의 마을에 질투가 심한 부인이 살고 있었다. 질투에 질린 남편은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 온 동네에 보여주었다. 투기가 심한 여인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손가락 얘기를 들은 송씨는 여종에게 그 손가락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여종이 손가락을 가져오자 상 위에 올려놓은 뒤 술을 붓고는 “그대는 여자로서 죽어도 마땅하니, 내 어찌 조문하지 않으리오?”라고 말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사대부들 사이에서 송씨는 결혼 기피대상이 되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도 홍언필이 결혼을 결심한 것은,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정도 여자는 충분히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결혼을 한 홍언필이었지만 혼례를 치른 다음 날 짐을 싸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서 혼례식을 치룬 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1년 정도 살다 본가로 돌아오는 것이 풍속이었으니, 신랑이 첫날밤만 보내고 짐을 싼 데는 까닭이 있었다.

 

혼례식을 치룬 홍언필은 어떻게 하면 신부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신부와 단둘이 있는 방 안에서도 그런 고민에 빠졌다. 마침, 예쁜 여자 노비가 술상을 들고 신혼 방에 들어왔다. 홍언필은 일부러 여종의 손을 잡고 귀여워하는 척했다. 부인이 어떻게 나오는지 본 다음, 태도에 따라 기선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부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못 본체했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졌다. 술을 다 마신 홍언필은 사랑방에 가서 혼자 쉬고 있었다. 얼마 있다가 부인이 남편을 찾아 사랑방에 들어왔는데 그의 손에는 피가 떨어지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부인은 그것을 남편에게 조용히 내밀었다. 조금 전에 홍언필이 만지작거렸던 여종의 손가락이었다.

 

결혼하자마자 별거에 들어간 이 부부는 수년이 지난 뒤 다시 결합했다. 송씨가 부모의 권유로 남편에게 용서를 빈 뒤였다. 하지만 한동안 잠잠하던 송씨의 엽기 행각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아들 홍섬(洪暹)이 태어난 지 7년 뒤에 송씨는 《중종실록》2)에까지 기록될 만한 범죄행각으로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남편과 간통한 남의 집 여종에게 수없이 매질을 하고 칼로 머리털을 잘랐다. 그것으로 모자라 빗으로 얼굴을 긁기까지 했다. 그렇게 폭행을 당한 여종은 쓰러졌는데 사람들은 생사도 확인하지 않은 채 땅속에 묻었다. 사간원에서 조사해보니 매장될 당시 여종은 아직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도 송씨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여종을 땅속에 묻은 것이다. 여종을 죽도록 때린 송씨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을 땅에 묻은 것은 참혹한 일이다. 그래서 정부는 사건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송씨 부인에 의해 손가락이 잘린 여종이나 땅속에 묻힌 여종의 사례는 노비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주인이나 양반들이 가하는 사적 형벌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송씨가 남의 집 여종을 죽인 것은 간통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비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적었다. 대부분의 노비들은 손가락이 잘린 여종처럼 별다른 항변도 못 하고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주인이 노비의 생명을 끊는 일이 있었다고 해도 집안에서 쉬쉬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 때 문서를 관리하는 관청인 교서감(校書監)에 조직 내 서열 3위이자 정3품인 왕미(王亹)라는 관리가 있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3) 왕미의 집에서 여자 노비 하나가 그의 부인에 의해 살해됐다. 노비와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부인이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을 범한 것이다. 보통의 경우 이런 사례는 잘 공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는 이성을 상실한 부인의 행동 때문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자 노비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부인은 시신을 사람들이 오가는 길옆에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사건은 공개되었고 형조는 사법 절차에 착수했다. 이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적으로 목숨을 잃은 노비의 억울함은 세상에 알려지기 힘들었다.

 

송씨가 저지른 두 번째 범죄처럼 남의 집 노비에 해를 끼친 경우는 그나마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피해를 당한 노비의 주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도 피해자인 노비의 권익에 관심이 집중되지는 않았다. 노비주의 손해를 배상하는 것이 주안점인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간대접조차 받지 못한 조선 노비들의 지위는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서양의 노예와 비교할 때, 이들의 처지는 어땠을까? 노비는 노예와 같은 존재였을까? 아니면, 다른 존재였을까? 서양사에 나오는 농노와 비교해본다면 어떨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노비와 노예·농노의 관계를 살펴보자.

 

각주
1 명종 4년 1월 28일자(1549. 2. 25.) 《명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