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홍길동의 신분
홍길동은 의적이 아니라 혁명가였다. 의적 홍길동은 소설 속의 허구일 뿐이다. 사료 속에 나타난 홍길동은 전혀 다르다. 사료는 그를 ‘강도’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훔치려는 행위까지도 도적의 범주로 취급했다. 국가가 왕실의 소유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형법의 기초인 《대명률직해》에서 모반죄나 대역죄를 ‘도적’ 항목에 넣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연산군일기》1)를 보면 그가 단순한 의적이 아니라 나라를 훔치려 한 ‘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길동은 정3품 첨지(중추부 소속)를 자칭하며 관원의 복장을 하고 지방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관청을 습격했다. 충청도 같은 곳에서는 홍길동의 반란을 계기로 10년간이나 세금이 걷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반란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반군 지도자가 처음에는 낮은 벼슬을 자칭하다가 나중에 왕이나 황제를 자칭하는 것은 동아시아 반란의 전형이었다. 홍길동 역시 그런 단계를 밟았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 반체제 운동가였던 것이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사회적 파장을 막고자 그를 혁명가가 아닌 의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홍길동전》은 소설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노비 문제와 관련된 당시 사람들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홍길동의 정확한 신분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노비와 관련된 정보를 좀더 많이 도출해낼 수 있다.
소설 속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기의 처지를 고민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고민의 본질이 아니었다. 《홍길동전》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아버지 홍 판서의 또 다른 첩인 초란이(길동은 홍 판서의 첩 중 하나인 춘섬이의 아들이다)가 관상녀와 짜고 자객을 보내 자기를 죽이려 하자, 길동은 관상녀와 자객을 모두 벤 다음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홍 판서는 “내가 너의 품은 한을 짐작하여 오늘부터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기를 허락하노라” 하며 집을 떠나려는 길동을 붙들었다.
아버지가 결국에는 호부호형을 허락한 것이다. 이에 길동은 “소자의 지극한 한을 아버님께서 풀어주시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엎드려 바라옵건데 아버님께서는 만수무강하십시오”라며 이별을 선언했다. 말로는 호부호형이 자기의 ‘지극한 한’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본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홍길동의 ‘지극한 한’은 ‘집 안’보다는 ‘집 밖’과 관련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집 안에서 호부호형이 허락되더라도 그의 사회적 성공은 여전히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홍길동의 신분적 굴레는 아버지 홍 판서의 허락만으로 해소되는 게 아니었다. 또한 홍길동은, 집 안에서 호부호형이 허락되는 것을 만족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비범한 인물이었다. 다음은 홍길동의 비범성을 보여주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용꿈을 꾼) 그 달부터 태기가 있더니 열 달 만에 옥동자를 낳았는데 생김새가 비범하여 실로 영웅호걸의 기상이었다. ······ 길동이 점점 자라 여덟 살이 되자, 총명하기가 보통이 넘어 하나를 들으면 백을 깨달았다.
소설 속 홍길동이 차별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거야 당연히 첩의 자식이었으니까 그렇겠지”라고 답할 것이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대답이다. 홍길동이 첩의 자식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첩의 자식에도 ‘등급’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명종실록》2)에 실린 사헌부의 보고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신들이 서얼(庶孼)이란 명칭을 두루 살펴보니, 이른바 서(庶)란 것은 양첩의 아들이고, 이른바 얼(孼)이란 것은 천첩의 아들입니다.
이런 경우의 서자는 장남 이외의 아들을 가리킨다. 이처럼 서자란 표현은 장남이 아닌 아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사료에서 ‘서자’란 표현을 발견할 경우, 그것이 첩의 아들을 가리키는 표현인지 차남 이하의 아들을 가리키는 표현인지를 문맥을 통해 분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자와 얼자는 첩의 소생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신분 측면에서는 서로 판이했다. 전자는 양인 부모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후자는 어머니 쪽으로 노비의 피를 물려받았다. 소설 속 홍길동은 후자에 속했다.
(홍 판서는) 일찍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하나는 이름이 인형으로 본부인 유씨가 낳았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길동으로 시비(侍婢) 춘섬이 낳았다.
우리가 아는 인물들 중에 얼자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시대의 명재상인 황희(黃喜)다. 《세종실록》3)에서는 황희의 간통 사건을 소개하며 그의 신분을 이야기했다. 황희의 좋지 않은 신분이 그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연결된 듯한 인상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이에 따르면, 황희는 판강릉부사 황군서(黃君瑞)의 노비 첩이 낳은 아이였다.
서자는 비록 관직 진출에서 차별을 받기는 했지만 엄연히 양인이었다. 그렇다면 얼자는 어땠을까? 조선시대에는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얼자는 노비였을까?
각주 1 연산군 6년 12월 29일자(1501. 1. 18.) 《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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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첩의 자녀, 얼자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인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 또 하나는 아버지가 노비인 경우다. 얼자는 앞의 경우에 해당한다. 뒤의 경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얼자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고대 역사 속의 노비 문제를 검토해보자.
고대에는 주로 전쟁을 통해 노비를 획득했다. 그러나 적어도 고려시대가 되면 이 땅에서는 이런 양상이 사라졌다. 한민족이 고려시대 이후로는 주로 방어전에 치중했다는 것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노비를 외부에서 공급하는 일이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비는 내부에서 충원될 수밖에 없었다.
노비주의 입장에서 노비의 수를 늘일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 중 하나는 노비를 결혼시키는 것이다. 노비와 노비를 결혼시킬 수도 있고 노비와 양인을 결혼시킬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그들의 혼인으로 생긴 자녀는 노비가 되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그들의 혼인으로 생긴 자녀를 노비주가 온전히 자신의 노비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경우는 그들의 자녀를 양인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다. 즉 분쟁의 꺼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후자의 경우 생길 수 있는 분쟁의 소지를 해결하기 위한 입법 조치가 고려 전기인 1039년에 이루어졌다. 《고려사(高麗史)》 〈형법지(刑法志)〉에는 “정종(靖宗) 5년, 천민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른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제정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남자 양인과 여자 노비의 자녀는 어머니를 따라 노비가 되어야 했다. 여자 노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가졌는지는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객관적인 사실은 여자 노비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1039년의 조치는 이런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노비의 소유권을 정하도록 한 것이다.
위의 조치는 무엇보다도 노비 숫자를 증대시키려는 귀족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다. 여자 양인과 남자 노비가 결혼하는 경우보다는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이 결혼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종모법은 노비의 수를 늘리는 데 기여했다. 《태종실록》1)에서는 그 같은 고려시대 입법의 결과로 “노비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양민은 날이 갈수록 감소했다”고 말했다.
이런 제도를 악용해서, 자기 집 여자 노비를 양인 남자들과 접촉하도록 부추기는 노비주도 있었을 것이다. 한 논문에서는 “고려 후기에는 농장주들이 노비를 증식하는 방법으로 양천상혼(양인과 노비의 혼인)을 공공연히 조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소천다(양인은 적고 노비는 많음)의 현상이 일어나 드디어는 고려왕조의 멸망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게 하였다”2)고 했다. 납세·병역 의무를 지는 양인이 줄어드니 국가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의 성적 접촉이 증대되면서 생겨난 아이들이 바로 얼자였다. 조선 건국세력은 이들에게 동정심을 보였다. 자신들 중에 얼자나 서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鄭道傳)의 어머니도 노비였다. 건국 공신인 하륜(河崙)·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이화(李和)·이조(李朝) 등도 얼자 아니면 서자의 피를 타고났다. 정도전·하륜·조영규·함부림은 모두 연안 차씨 집안을 외가로 둔 서얼이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이복동생인 이화는 노비의 아들이고, 이조 역시 이 집안의 서얼이었다.
혁명 핵심부에 얼자나 서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권력을 잡은 뒤 얼자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이 문제에 대한 혁명 핵심부의 시각은 태조 6년(1397)에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에서 태조에게 올린 건의서에 나타나 있다. 노비 소송을 담당한 이 기구에서 건의한 19개 항목 중 일곱 번째다.
비록 천첩의 소생일지라도 이 역시 골육입니다. 그러므로 노비와 똑같이 일을 시키는 것은 곤란합니다. 노비주가 생존해 있고 자기 소유의 천첩이 자녀를 낳은 경우, (그 자녀를) 영구적으로 양인으로 풀어주는 것을 법률로 삼으소서.3)
태종 14년 6월 27일(1414. 7. 13.)에는 진일보한 조치가 나왔다. “공·사 노비가 양인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아버지를 따라 양인으로 삼는다”는 왕명이 내려진 것이다. 이 조치는 얼자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얼자를 양인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전 것보다 개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세종 14년 3월 26일(1432. 4. 25.)에는 다시 원래로 돌아갔다. 이 날짜의 왕명에서는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여기서 생긴 얼자는 노비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 자녀는 여자 소속의 관청이나 주인에게 귀속시킨다고 했다. 여자 양인과 남자 노비의 자녀는 양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자 양인과 여자 노비의 자녀만 양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예외가 인정됐다. 문무 관리, 문·무과 합격자, 생원·성중관(成衆官)4)·유음자손(有蔭子孫)5), 자녀가 없는 마흔 살 이상 양인이 노비와 결혼해서 얻은 자녀는 양인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 후 다시 얼자를 양인으로 인정했지만, 세조 14년 6월에는 세종 14년의 왕명으로 회귀했다. 얼자를 다시 노비로 인정한 것이다. 이런 왕명이 《경국대전》에 반영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얼자는 원칙적으로 노비로 삼되, 종친·공신·관료의 얼자만 양인으로 인정했다. 특권층이나 관료에게서 태어난 얼자만 노비 신분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특권층이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얼자는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이들의 처지는 소설 속 홍길동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들이 서자들과 합세하여 조선왕조 내내 투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버지의 신분과 자신의 신분이 불일치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차별하지 않을 수 없는 속사정이 있었다. 조선은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그래서 작은 부인은 물론 첩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그랬다.
임금의 경우도 법적으로는 그랬다. 후궁이란 첩이 있었지만, 후궁은 공식적으로는 궁녀 신분이었다. 왕의 첩이라는 공식 지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일부다처를 금했기 때문에, 얼자에게 양인 신분을 부여하더라도 이들에게 양인과 똑같이 관직 진출의 기회를 인정할 경우 일부일처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금하면서 거기서 태어난 아이를 평등하게 다루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이 서자들과 함께 과거 응시나 관직 진출의 제약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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