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상업으로 부자가 된 노비

구름위 2014. 9. 2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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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으로 부자가 된 노비

 

 

5만 원권 지폐에 ‘한국은행’ 표시가 없으면, 그것은 한낱 종잇조각이다. 신사임당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유관순의 사진이 인쇄되었어도 마찬가지다. 한낱 종이에 불과할 수도 있는 5만 원권 지폐를 사람들이 주고받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지폐의 가치를 보증할 것이라는 신뢰감 때문이다. 또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 ‘종잇조각’에 대해 5만 원의 가치를 인정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처럼 ‘5만 원권’이 ‘5만 원어치’로 인정되려면, 정부와 국민 간의, 그리고 국민 상호 간의 신뢰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폐가 유통되는 사회는 이런 신뢰관계에 토대를 둔 사회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이 땅에서는 그런 토대가 구축되지 않았다. 건국 10년 뒤인 1402년에 태종은 지폐인 저화를 강제로 유통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1차 시도). 8년 뒤인 1410년에 다시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2차 시도). 세종도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성종 때는 《경국대전》을 통해 저화를 국폐(國幣)로 공인했지만, 사회 구성원들 간에 존재하는 지폐에 대한 불신감을 없앨 길은 없었다. 이때까지도 지폐가 유통될 만큼의 신뢰관계가 구축되지 않았던 것이다.


포목점 간판
조선시대 전기에는 옷감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사진은 경복궁 안에 복원된 옛날 거리에서 찍었다.
 
이번 장에서 소개할 사례는 2차 시도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저화를 강제로 통용시키기 위해 민간에서 화폐로 사용되던 ‘베’를 죄다 거둬들이고자 했다. 베가 없어지면 저화가 통용될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조정에서는 베를 관아에 납부하면 그에 상응하는 저화를 지급하겠다고 선포했다. 화폐개혁 때 신 화폐를 구 화폐로 교환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성들은 조정의 말을 듣지 않았다. 베를 꽁꽁 숨겨두고 내놓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베를 은닉하는 행위를 단속했다. 그때 적발된 사람 중의 하나가 불정(佛丁)이란 남자였다.

 

《태종실록》1)에 따르면, 불정은 무려 1,500필의 베를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그가 숨긴 베는 추포(麤布)라 불리는 하급 품질이었지만 그렇더라도 1,500필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재물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논 한 마지기가 면포 세 필 정도에 거래된 사례들도 있다. 상당히 많은 양의 베를 숨겼기에 불정의 행위가 조정 차원에서 거론되고 실록에까지 기록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불정의 신분이다. 그의 신분과 관련된 대목을 《태종실록》에서 살펴보자. 태종 11년 1월 21일(1411. 2. 13.) 열린 어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갔다.

 

호조판서 이응: “부상(富商)인 좌군노(左軍奴) 불정이 추포 1,500여 필을 남의 집에 옮겨두었습니다.”
태종 이방원: “이 노비가 부상인데도 저화를 쓰지 않는 것은 법률의 틈을 엿보는 행동이다. 사헌부에서는 그 자를 추포(追捕)하라.”


불정은 거상이었지만 신분은 노비였다. 조선 초기에 군무를 총괄하던 기구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있었다. 의흥삼군부는 중·좌·우 3군의 병력을 지휘했는데 좌군노 불정은 의흥삼군부의 좌군에 속한 공노비였다.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것은 상업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뜻이고, 상업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그가 선상노비보다는 납공노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노비라면 흔히 마당을 쓸거나 시중을 들거나 농사일을 하는 사람을 연상하기 쉽지만, 불정의 예에서 나타나듯이 상업을 해서 큰돈을 버는 노비들도 있었다.

 

어전회의의 대화록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호조판서나 태종은 노비가 상인이라는 사실과 거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이 노비(불정)가 부상인데도 저화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격분할 뿐이다. 불정처럼 상업에 종사하는 노비들이 적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농공상에 속한 노비들

 

 

“조선시대의 신분구조는 어떠했을까?”라고 질문하면, “양인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고 “양반과 상놈으로 구성되었다”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농공상으로 구성되었다”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다. 첫째만 맞고, 나머지는 틀리다. 법적으로 존재한 신분은 양인과 천민(노비)뿐이었다. 양반과 상놈은 각각 특권층과 일반인들을 의미했다. 어디까지가 일반인이고 어디부터가 특권층인지는 오늘날은 물론 조선시대 사람들조차도 헷갈리는 문제였다. 사농공상은 신분의 구별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하는가, 즉 직역(職域)의 구별이었다.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사농공상이다.

 

양천 구분과 사농공상 구분은 별개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양인이 사농공상에 속할 수도 있었고 천민, 즉 노비가 사농공상에 속할 수도 있었다. 앞에서 소개한 《어우야담》의 내용 중에 “국법상으로 노비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노비는 다양한 직역에 속했다. 물론 이 표현은 노비들이 주로 농부·공업기술자·상인 등이 됐다는 뜻이지 노비라고 해서 선비가 될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선비가 되는 노비는 소수였기에 ‘농업·공업·상업·병사’를 열거할 때에 ‘선비’를 빼놓은 것이다.

 

‘사(士)’에 속하는 노비들의 사례를 앞에서 이미 검토했다. 16세기 노비 박인수는 학문이 그리 깊지는 않지만 학행이 깊다는 이유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매일 아침 그의 집에 수십 명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절을 올릴 정도였다. 수십 명의 제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아침 찾아올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학자로서의 박인수의 영향력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비가 이처럼 신분을 공개한 상태에서 학문 활동을 했으니, 조선시대 선비들이 노비 출신의 동학(同學)을 반드시 배척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의 모습으로 활약한 노비들은 이 외에도 많다. 백대붕(白大鵬, 1550?~92)은 16세기 문단(文壇)에서 명성을 떨친 노비 시인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도승지까지 지냈지만 정조 사후에 정순왕후(貞純王后) 정권에 참여했다가 얼마 안 있어 사사된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란 인물이 있다. 그의 시문집인 《석재고(碩齋稿)》에도 백대붕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책의 〈해동외사(海東外史)〉 편에서는 “백대붕이란 이는 전함사(典艦司)의 노비였다. 시를 잘하고 음주를 잘했다”고 평했다. 전함사는 선박을 제조·관리하고 물자를 수송하는 부서였다. 《성호사설》 권7에 인용된 백대붕의 시에도 “백발로 풍진을 무릅썼건만 (나는) 전함사의 노비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는 문학 활동을 하는 중에도 전함사에 대한 법적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공노비였던 것이다.

 

백대붕은 집에서 혼자 시를 끄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단을 주도하는 저명인사였다. 1590년에 통신사 허성(許筬)이 일본을 방문할 때 수행한 적도 있다. 비록 노비였지만 사회적으로 웬만한 관료보다 명망이 더 높았다. 그래서 일본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일본행은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백대붕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을 잘 아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이일(李鎰) 장군의 상주 전투에 동원됐다가 전사했다.

 

백대붕보다 몇 살 위인 유희경(劉希慶, 1545~1636)도 유명한 천민 시인이었다. 허균이 쓴 일종의 평론서인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는 “유희경이란 이는 본시 천민으로 사람됨이 깨끗하고 신중했으며 주인을 충심으로 섬기고 어버이를 효심으로 섬겼다”고 했다. 여기서 나타나듯이 유희경 역시 ‘주인을 충심으로 섬기는’ 노비였다. 물론 나중에는 사대부가 되어 작위를 받았지만, 그의 애초 신분은 노비였다. 백대붕이나 유희경 외에도 천민 시인들이 많이 활동했다는 점은, 백대붕이 결성한 시인 모임인 풍월향도(風月香徒)에 천민들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의 최대 특징은 한문으로 시를 짓는 것이다. 시를 잘 지으면 과거 급제도 할 수 있기에 사회적 존경을 받았다. 또 시를 잘 읊어야 사교계에서도 유명세를 떨칠 수 있었다. 시에 능한 노비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선비들의 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진 노비들이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노비가 선비가 된다 해도 사회적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면천이 되지 않는 한, 그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쉬운 것은 박인수처럼 제자를 두고 가르치는 일이었다. 노비 신분의 선비가 올라갈 수 있는 지위는 서당 훈장 수준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농공상의 두 번째는 농(農)이다. 조선은 농업사회였고 노비가 주된 노동력이었으므로, 조선시대 노비는 주로 농민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사노비 중에서도 외거노비는 특히 그러했다. 물론 솔거노비 중에도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있었다. 주인집에 농토가 딸린 경우에는 그곳에 기거하는 솔거노비가 농토를 경작할 수밖에 없었다. 공노비 중에서 납공노비도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선상노비 역시, 관청에 복무하는 때를 제외한 나머지 기간에는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농업에 종사하는 노비는 외형상 자작농일 수도 있고 소작농일 수도 있었다. 솔거노비 이외의 노비들 중에는 자작농도 많이 있었다. 외거노비는 주인집의 농토를 경작하면서도 자신의 농토를 경작할 수 있었다. 납공노비도 국유지를 경작하면서도 사유지를 경작할 수 있었다. 선상노비도 평상시에는 사유지를 경작할 수 있었다.

 

사농공상의 세 번째인 공(工)에도 노비들이 많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이전까지만 해도 공업은 기본적으로 수공업이었다. 수공업에 종사한 기술자를 공장(工匠)이라 불렀다. 공장의 대부분이 노비였다는 점은 《세종실록》1)에서도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공장과 각종 기술자는 다들 천민”이라고 했다. 하지만 노비만으로는 기술자의 수요를 다 채울 수 없으므로, 양인 출신의 공장들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세종실록》에서는 공장들이 주로 천민이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천민 중에서도 주로 공노비였다. 민간 수공업보다는 관영 수공업의 비중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기술을 보유한 공노비들은 일정 기간 관청에서 각종 기물을 제작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의무를 이행했다. 수공업에 종사한 노비는 농업에 종사한 노비보다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 중에서 노비의 비율은 농민 중에서 노비의 비율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공장은 주로 노비인 데 비해, 농민 중에는 양인도 많았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수공업에 종사하는 노비라 할지라도 농업을 겸영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민간 수공업자에게 신분적으로 종속된 노비라면 수공업에만 전적으로 종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청에 속한 노비라면 사정이 달랐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자기 일을 해야 했다. 이럴 경우, 가장 쉬운 것은 농사일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수공업이 농업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공업 노비들이 농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으리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농공상의 끝자락인 상(商)에도 노비들이 있었다는 점은 앞의 불정의 사례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뒤에서 소개할 장흥고(長興庫) 소속의 노비 역시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최고의 기생을 거금으로 유혹할 정도로 거부를 축적한 것을 보면 그렇다. 장흥고 노비 이야기는 뒤에서 상세히 설명될 것이다.

 

앞에서 조선의 실무행정 중 상당 부분은 노비 출신 서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 우리는 노비들이 행정 분야뿐 아니라 수공업 분야까지 차지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조선인들이 사용하는 각종 기물은 기본적으로 노비들의 손에서 나왔던 것이다. 행정도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수공업제품의 생산도 노비들에 의해, 거기에다가 농업생산 역시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조선이란 나라는 기본적으로 노비들에 의해 굴러가는 나라였던 셈이다. 노비들이 조선 산업의 전반에 걸쳐 중추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선이란 국가를 이끌고 가는 산업역군이었다.

 

각주
1 세종 26년 윤7월 5일자(1444. 8. 18.) 《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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