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노비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나 이성을 새로 사귀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정보가 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부모님은 무얼 하시는지, 고향은 어딘지 등이다. 상대를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자칫하다가는 서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얼굴을 붉힐 수도 있다.
이렇게 직장·학교·가족·가문·고향 등을 확인함으로써 상대방이 어떤 사람들과 엮여 있는지를 파악한다. 나아가 그것들로 그의 사회적 위치도 가늠한다.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통해 개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이 무능한 실업자일지라도 그의 할아버지가 장관이거나 재벌 총수인 경우에는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또 아무리 실업자일지라도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우리의 태도는 어딘가 달라진다. 집단의 위세를 통해 개인의 위세를 파악하는 유풍이 아직도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파악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인물이 속한 집단은 그를 파악하는 최소한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는 노비에 대해서만큼은 이런 식으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노비는 노비 그 자체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달리 말해 노비를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선의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최소 30퍼센트 이상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 사회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노비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노비의 사회적 지위를 파악할 때도 이런 네트워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직장·학교·가족·가문·고향 등을 확인하듯이 말이다.
모든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실제 이상으로 부풀린다. 사극은 그래서 ‘확대 지향적’이다. 그런데 사극이 ‘축소 지향적’ 양상을 보이는 분야가 있다. 바로 노비들의 숫자다. 권세가의 노비 숫자가 사극 화면상으로는 실제보다 적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사료를 보면 수십 명이 아니라 수백 명, 수천 명의 노비를 둔 집안이 많았다는 정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조선 건국 직후 사헌부에서 태조 이성계에게 제출한 상소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왕씨 500년 동안 종친과 거족(巨族, 원문 표현은 ‘거실(巨室)’)들이 노비들을 많이 끌어들여, 천여 구(口)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王氏五百年間宗親巨室, 多聚奴婢, 或有至千餘口(왕씨오백년간종친거실, 다취노비, 혹유지천여구)].
원문에서 “王氏五百年間(왕씨오백년간)”이란 표현은 ‘왕씨는 500년 동안에’라는 뜻이 아니라 ‘왕씨 500년 동안에’라는 의미다. 조선왕조 500년을 가리켜 ‘이씨 500년간’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위 문장은 고려왕조 500년 동안에 왕씨 성을 가진 종친과 왕씨 성을 갖지 않은 귀족들 중에 노비를 1,000여 명 가까이 보유한 예가 많았다는 의미다. 사헌부의 보고서를 보면, 노비를 1,000명 가까이 보유하는 것이 보기 드문 광경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지주가 노비를 사용해서 수익을 올리는 경제구도는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또 조선시대의 특권층 역시 고려시대의 ‘선배들’ 못지않게 사회의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므로 특권층 가문이 대규모 노비를 거느리는 것은 고려시대만의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 의정부에서 선정한 217명의 청백리(淸白吏) 중 이맹현(李孟賢, 1436~87)이란 인물이 있다. 오늘날의 차관보급인 홍문관의 부제학(정3품)을 지냈고 신라부터 고려까지의 역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청백리란 찬사에 조금은 걸맞지 않게 그는 수많은 노비들을 거느렸다. 물론 청백리라고 해서 노비가 적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청백리가 수많은 노비들을 보유했다는 것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다. 노비를 많이 보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재산도 많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494년에 작성된 분재기(分財記, 상속집행문서)에서 그의 노비 보유 실태를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사망 당시 그에게는 전국 70개 군현에 752명의 노비가 있었다.1)2009년 현재의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에 따르면, 300명 미만의 상시 근로자를 준 제조업체는 중소기업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300명 이상을 둔 제조업체는 대기업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이 된다. 노비 숫자로만 본다면, 이맹현 집안은 대기업이었던 셈이다.
16세기에 권벌(權橃, 1478~1548)이라는 유명한 관료가 있었다. 중종 때 도승지를 지냈고, 조광조를 실각시킨 사건인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에도 연루된 인물이다. 그로 인해 파직된 후 복직되어 경상도관찰사와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다. 경상북도 봉화군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권벌 역시 많은 수의 노비를 데리고 있었다. 분재기에 따르면, 사망 당시 그의 노비는 317명이었다. 이맹현의 노비들은 전국 각지에 산재한 데 비해, 권벌의 노비들은 안동과 그 인근에 주로 거주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2)안동 권씨인 권벌은 안동 지역에서 상당한 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노비 1,000명을 거느린 사례는 《어수신화》에서도 발견된다. 18세기에 한성에서 생존한 것으로 보이는 홍씨 과부의 집에는 거의 1,000명이나 되는 노비가 있었다. 이 집안의 노비는 경기도 안성·이천과 경상도 예천 등지에 분포해 있었다. 홍씨의 남편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각지의 노비들은 공물을 꼬박꼬박 잘 바쳤다. 하지만 남편이 죽고 관리 체계가 약화되자 노비들이 주인에게 등을 돌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물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한 에피소드가 뒷부분에서 소개될 것이다.
한 집안이 많은 수의 노비를 거느린 모습이 이방인들의 눈에도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네덜란드 동인도연합회사 직원으로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서른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제주도에 표류한 젊은 선원이 있었다.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이 그 주인공이다. 제주도는 물론 한양과 전라도에서 13년간 생활한 그는 조선을 탈출해서 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멜 일지》와 《조선국에 관한 기술》을 남겼다. 그는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서 “양반의 수입은 소유지의 재산과 노비로부터 생긴다”라고 한 다음에, “어떤 양반은 2,000~3,000명에 달하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 집안에 이렇게 많은 노비가 살았을 리는 없기 때문에, 하멜이 본 것은 같은 집안의 외거노비가 한 마을이나 여러 마을에 나누어 살고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런 광경을 목격한 곳은 농토와 농민이 많은 전라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멜이 조선의 언어와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은 전라도로 옮긴 뒤였기 때문에, 그곳에 살 때에 조선의 노비제도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대규모 노비를 거느리는 가문은 사료뿐 아니라 문학 작품에도 나타난다. 유명한 《장화홍련전》에서도 그 같은 분위기를 찾을 수 있다. 세종 시절 평안도 철산군에서 지역 유지인 배무룡의 딸로 태어난 장화와 홍련은 어려서 엄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성장하다가 둘 다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 언니인 장화는 계모의 계략으로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동생인 홍련은 이를 비관하다가 역시 자살로 생을 마쳤다. 억울한 죽음에 한이 맺힌 홍련은 철산부사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자신의 사연을 호소했으나, 귀신의 출현에 놀란 신임 부사들은 하나같이 기절하여 죽어 나갔다.
나중에는 다들 철산부사 자리를 기피할 정도였다. 이때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인물이 정동우란 관료였다. 철산부사 직을 자임한 그는 부임 첫날밤 홍련과 당당히 대면했다. 홍련은 귀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부사 앞에서 자신을 소개한 뒤, 계모가 자기를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비는 혹해서 계모의 참소를 듣고 소녀 자매를 심하게 박대했지만, 소녀 자매는 그래도 어미라 계모 섬기기를 극진히 하였사옵니다. 계모의 박대와 시기는 날로 심해졌사옵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본디 소녀의 어미가 재물이 많아 노비가 수천 구요, 전답이 천여 석이었나이다. 그러니 보화는 거재두량(車載斗量, 수레로 담고 말로 헤아릴 정도)이라, 소녀 자매가 출가하면 재물을 다 가질까 보아 시기심을 품고 소녀 자매를 죽여 재물을 빼앗아 제 자식을 주고자 하여 주야로 모해할 뜻을 두었나이다.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
한 집안에 수백 혹은 수천의 노비들이 있는 경우, 이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위계질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솔거노비들 간의 위계질서는 한층 더 촘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비들 사이의 계층질서에서 최상위에 있는 사람을 흔히 수노(首奴)라 불렀다. 이런 수노는 오늘날로 치면 사실상 최고경영자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집안일은 물론 농업경영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수노 주변에 있는 상층부 노비들 역시 대기업 이사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왕의 남자 노비인 내시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듯이 주인의 최측근인 이들 역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아야 한다. 양인 신분을 가진 일반 농민이나 하급 관직을 가진 선비들이 과연 이들 앞에서 허세를 부릴 수 있었을까?
앞에서 도망노비 김의동의 사례를 검토했다. 고관이 된 김의동과 마주친 것은 업산이란 노비였는데 그는 일반 노비가 아니었다. 외거노비들에게 세공을 징수하는 일종의 관리직 노비였다. 김의동은 업산에게 공손히 읍을 올렸다. 물론 업산의 입을 막기 위해 그렇게 한 측면도 있지만, 업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한 집안에서 외거노비뿐 아니라 양인 신분의 소작인을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때는 수노가 외거노비뿐 아니라 양인 소작인까지 함께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양인 소작인은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수노의 감독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기업에 ‘얽매인’ 이사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영업자의 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길에서 장사하는 자영업자가 대기업 ‘노비’인 이사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가?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 관리직 노비와 일반 양인의 역학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비라고 해서 무조건 최하층의 지위에 처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노비들로 이루어진 조직에 속한 경우에는 그 속에서의 서열을 바탕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노비는 신분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측면에서도 열등한 입장에 놓여 있었지만, 일부 노비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높은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럴지라도 노비는 법률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비 신분이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강해진 자신의 모습에 흐뭇해하는 순간, 주인이 형법상의 특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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