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현상금에 눈이 먼 노비들

구름위 2014. 9. 2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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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금에 눈이 먼 노비들

 

 

게장 백반의 묘미는, 게 껍질에 밥을 비벼 먹는 데 있다. 딸려 나오는 각종 반찬보다도 게 껍질과 밥과 장이 함께 만들어내는 묘미가 훨씬 더 감미롭다. 그런데 게장 백반을 먹은 뒤 피해야 할 디저트가 있다. 가을철 과일인 감만큼은 꼭 피해야 한다.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이 지은 약학 서적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게를 감과 함께 먹으면 복통이 나고 설사를 한다”고 했다. 게와 감은 상극이므로 둘을 함께 섭취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얘기다.

 

이시진이 《본초강목》을 집필한 시점은 16세기다. 그래서 18세기 초반의 조선 사람들은 이런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 점은 《영조실록》에 실린 대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경종(장희빈의 아들) 4년 8월 20일(1724. 9. 26.), 창덕궁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20대 경종에게 바쳐진 수라상에 게장이 있었고 디저트로 생감이 놓인 것이다. 그날 밤부터 가슴과 배의 통증을 호소하며 자리에 누운 경종은 결국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서른일곱 살의 젊은 군주가 그렇게 죽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문제의 게장은 창덕궁 소주방(왕궁 주방)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경종의 라이벌이자 후계자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의 사저에서 보낸 음식이었다. 경종과 연잉군의 관계는 외형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 가지로 긴장관계를 갖고 있었다.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張禧嬪)과 연잉군의 어머니인 최숙빈(崔淑嬪)은 원수지간이었다. 장희빈과 최숙빈은 똑같은 궁녀 출신이었다. 그런데 중전이 된 장희빈은 궁녀 최씨가 숙종의 관심을 끌자 최씨를 죽이려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최씨는 확인되지도 않은 장희빈의 비위를 숙종에게 보고하여, 장희빈을 중전에서 끌어내린 데 이어 장희빈이 사약까지 마시도록 만들었다. 어머니끼리 원수지간이었으므로, 경종과 연잉군이 겉으로는 좋았을지라도 속으로는 상당히 불편한 사이였으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경종과 연잉군은 정치적 기반도 달랐다. 당시 중앙 정계는 서인당의 분파인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게 정치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경종과 연잉군은 각각 소론과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연잉군이 보낸 음식을 먹고 경종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연잉군이 즉위했다(1724). 그래서 당시 민간에서는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을 것이란 의혹이 크게 번졌다. 영조 때 편찬된 《경종대왕 행장》1)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종은 이미 세자 시절부터 국민적 존경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경종의 사망에 의혹의 시선을 보냈으며 영조를 그 배후로 의심했다.

 

1728년에 발생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경종에 대한 동정심과 영조에 대한 의구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론이 주도하는 이인좌의 반군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한성으로 진격하다가 안성·죽산에서 정부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때 반군은 경종의 상여를 앞세우고 있었다. 그만큼 경종은 국민적 존경을 받았고, 그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반군 안에 황진기(黃鎭紀)란 인물이 있었다. 지도부 중에서 이인좌나 박현필 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황진기는 끝까지 살아남아 ‘도망자 황진기’의 명성을 날렸다. 조정에서는 그가 국경을 넘어 청나라로 망명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상태에서 황진기의 망령이 조선 조정을 계속 괴롭혔다. 반란이 진압된 지 5년 뒤인 1733년에는 황진기의 여노비가 비정규직 궁녀인 방자가 되어 궁 안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었다. 대역죄인의 노비가 궁 안에 있었으니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2)

 

한번은, 삼을 캐기 위해 국경을 넘어 청나라 영역에 잠입하다 붙들린 범죄자가 황진기 핑계를 댄 사례도 있었다. 《영조실록》3)에 따르면 함경도민 신준정은 “왜 국경을 넘었느냐?”란 질문에 대해 “역적 황진기를 뒤쫓다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둘러댔다. 이때는 이미 이인좌의 반란이 진압된 지 19년 뒤인 1747년이었다. 이 정도로, 도망자 황진기의 명성은 몇 십 년이 지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황진기의 명성이 한창이던 시절, 한성에 사는 홍씨라는 과부가 사위 세 명을 불러들였다. 앞에서, 노비 1,000명을 거느린 한성 과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안성·이천·예천 등지에 이 집안의 노비들이 살았고, 남편이 죽은 뒤부터 관리가 해이해져 노비들이 세공을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수신화》에 따르면, 홍씨의 사위들은 저마다 특기가 있었다. 한 사위는 머리가 영리하고, 또 다른 사위는 힘이 장사고, 또 다른 한 사위는 문장이 좋았다. 홍씨는 그들에게 예천에 가서 숨은 노비들을 찾아내 공물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사위들에게 추노꾼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숨은 노비들을 수소문하던 홍씨의 사위들은 예천에서 노비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노비들의 행적을 수소문하던 그들의 움직임이 숨어 있던 노비들에 의해 포착된 것이다. 주인과의 관계를 끊고 숨어 살던 노비들은 사위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들을 깊은 산속으로 유인했다. 도망 노비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며 접근한 듯하다. 노비들은 산속에 들어가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곧바로 사위들을 결박하고 산속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끌고 갔다. 인질들을 대들보에 매단 노비들은 칼을 갈며 살해를 준비했다. 세 인질은 하얗게 질렸다.

 

바로 이때, 글에 능한 사위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갑작스레 너털웃음을 지은 것이다. 나머지 둘은 “지금 우리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웃음이 나와?”라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글에 능한 이는 “제가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아볼 심산으로 과부 사위 행세를 하며 종적을 감췄습니다만,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됐습니다.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웃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머리가 영리한 사위는 “죽는 거야 어떻게 죽든 매일반이지만, 우리가 형벌을 면하고 처자식의 연좌를 면한 것만도 다행 아닌가?”라고 대꾸했다. 만약 관청에 잡혔으면 가족들까지 연좌제에 걸렸을 것이니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게 낫다는 말이었다.

 

노비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영리한 사위가 글에 능한 사위를 가리키며 “저 자는 바로 망명죄인 황진기”라고 말했다. 자신들은 황진기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노비들은 잠시 밖으로 나가 자기들끼리 의논했다. 정말로 황진기라면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고발하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포상금 욕심이 났던 것이다.

 

잠시 뒤, 건장한 노비 몇 명이 ‘황진기 일당’을 끌고 관청을 향했다. 뒤늦게 산속의 집에 도착한 또 다른 도망노비가 이 사실을 알고 펄쩍 뛰며 “이러다 우리 신분만 들통 나겠다”며 사람들을 보내 황진기 일당을 도로 데려오도록 했다. 뒤쫓아 간 노비들은 관청 앞에 가서야 동료 노비들과 황진기 일당을 발견했다. 이때, 힘이 장사인 사위가 몸을 뒤틀고 용을 쓰더니 결박을 풀고 노비들을 공격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노비들은 모두 도주했다.

 

세 사위는 관아에 들어갔다. 글 잘하는 사위가 자신들이 한성에서 내려오게 된 사연과 황진기 행세를 하게 된 사연을 소상히 적어서 사또에게 바쳤다. 그러자 사또는 신분을 숨기고 살던 노비 일당을 즉각 체포했고 주동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나머지 노비들에게는 밀린 세공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도망노비들을 찾으러 경상도까지 갔다가 하마터면 칼 맞아 죽을 뻔한 홍씨의 사위들은, 이처럼 황진기의 명성을 빌려 노비들을 추쇄(推刷)하고 밀린 세공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감독 시스템의 이완을 틈타 공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인 홍씨의 땅을 가로채려 했던 예천 노비들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저항을 택한 노비들

 

 

노동력을 제공하는 생산자가 토지 같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세상이 되지 않는 한, 생산자의 저항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산자가 아닌 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의미며, 이것은 생산자가 아닌 자가 생산자를 착취한다는 말이 된다. 양자 간의 불합리한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개선되겠지만, 갈등이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노비와 주인의 관계 역시 그러했다. 노비들도 실제로는 생산자이면서도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피착취에 부조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주인들에게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비의 저항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었다. 그중 하나는 도망이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도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현재의 거주지를 이탈하는 것이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주인과의 연락을 단절하는 것이 있다. 주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끊음으로써 노비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두 가지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런 형태의 저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급증했다. 대규모 전란과 함께 사회 시스템이 이완되면서 노비의 도망이 급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이 시끄러워져서 노비의 도망이 급증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주인의 농토를 경작하는 외거노비의 경우에는, 전란으로 토지가 피폐해진 데다가 주인의 착취까지 가중될 경우에 도망이란 저항 형태를 선택하기가 쉬웠다.

 

현재의 거주지에 살면서 노비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힘들어질 경우에 이런 저항 형태가 급증했던 것이다. 양대 전란을 계기로 급증한 노비의 도망은 18세기가 되면서 거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도망 노비들을 주변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노비의 도망이 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은, 노비 이외의 방법으로도 먹고살 길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도시에서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거나, 임금을 받고 농사일을 할 기회가 많아졌을 수도 있다. 그런 대안이 없었다면, 아무리 현실이 힘들더라도 쉽사리 현실로부터 도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주요 문제 중 하나인 불법체류자 문제를 생각해보자. 법무부에서 발행한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 2012년 1월호〉에 따르면, 2002년에 308,165명이었던 불법체류자 숫자는 그동안 계속 감소해서 2012년 1월 현재 169,260명이 되었다. 우리는 불법체류자일 것 같은 외국인들을 만나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공기관에 알리려 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도망노비들도 그런 존재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도망노비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시나 농촌에서 임금노동자 형식으로 직업 활동을 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신고하기 힘들었던 것은, 그들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들이 없으면 산업생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비들을 색출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고려 때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란 기구에서 도망노비의 추쇄 작업을 벌였고, 조선시대에는 건국 3년 뒤인 1395년에 설립된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에서 동일한 작업을 수행했다. 이런 기구에서 추적한 노비는 공노비였다. 하지만 18세기가 되면서 노비의 도망이 보편화되어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자, 정조 때인 1778년에 국가는 노비의 추쇄를 중단했다. 국가가 노비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으니, 노비제도 해체의 조짐이 이미 이때부터 뚜렷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몽인이 경기도 금천현에 살 때였다. 금천현은 지금의 경기도 안양시·광명시와 서울시 금천구·구로구 일원에 있었던 지역이다. 유몽인이 젊었을 때였으니까, 임진왜란 이전의 어느 해 봄이었다. 초봄이라 한강의 얼음이 단단하지 않은 때였지만 걸어서 한강을 건너는 행인들이 꽤 많았는데, 빠져 죽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때, 의금부의 노비 한 명이 쌀을 짊어지고 한강을 건넜다. 의금부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부근인 공평동에 있었으니, 의금부에 쌀을 전달하기 위해 강을 건넜던 모양이다. 그런데 무거운 짐 때문에 그의 발아래가 폭삭 꺼졌다. 다행히 상체는 아직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얼음의 성한 부분에 두 손을 짚고 있었던 모양이다. 옆에 있던 사람이 황급히 소리쳤다. “등에 지고 있는 짐을 풀어버리면 살 수 있어!” 그러나 의금부 노비는 말을 듣지 않았다. 쌀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는 “당신, 나보고 이 짐을 버리라는 거요? 이 짐을 버리고 산다면, 살아서 당할 고통이 죽는 것만 못하잖소!”라고 소리쳤다.

 

노비는 어떻게든 쌀과 함께 얼음 위로 올라오려 했지만 결국 쌀과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조선시대의 쌀은 상당히 고가의 상품이었다. 그 노비는 쌀을 빠뜨렸을 경우 자신이 받게 될 불이익을 두려웠던 것이다. 살기 힘들어 도망을 선택하는 노비들 같았으면, 이런 경우에 쌀을 포기하고 자기 몸이라도 건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도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의금부의 노비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비단 이 노비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노비들은 괴로울지언정 쉽사리 도망을 선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7세기 이후에는 노비의 도망이 보편화되었다지만, 그런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노비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처지가 불만스러우면서도 도망보다는 안주를 택한 노비들이라고 해서 저항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저항 형태 중에 가장 흔한 것은 태업이었다. 일을 게을리하거나 거르는 것이었다. 공물을 납부하지 않는 것, 즉 신공납부 거부도 있다. 이로 인해 18세기 중후반에는 노비주들의 신공 수입이 크게 격감했다. 같은 시기에 도망노비의 추쇄가 금지된 것을 생각하면, 노비에 대한 국가 및 주인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비의 저항 형태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주인을 살해하는 일(살주)이었다. 15세기 후반인 성종시대부터 이런 현상이 많아졌다. 노비들의 주인 살해는 조선의 법률제도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대명률직해》에 규정된 것처럼, 주인을 폭행한 노비는 참형에 처했다. 주인을 때리기만 해도 참형을 받았으니, 노비 입장에서는 때릴 바에는 차라리 죽이는 게 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살주(殺主)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회적 문제가 되다가 순조 때 가서야 급감했다. 순조의 아버지인 정조 때부터 노비에 대한 통제가 크게 이완되다 보니, 노비와 주인이 정면충돌할 기회가 다소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상전을 죽이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평소에 충성을 바치던 대상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대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 못지않게 노비가 주인을 죽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노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하는 동정심이 들 수도 있다. 명종 때 사노비인 복수(福守)와 충개(蟲介)의 사례를 한번 살펴보자.

 

《명종실록》1)에 따르면, 강원도 원주에 원영사(元永思)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외거노비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충개란 여노비를 첩으로 삼아 한동안 동거했다. 나중에 그는 후처가 생기자 충개를 내보냈다. 이후 충개는 원영사의 또 다른 노비인 복수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자 원영사는 충개가 타인의 처가 된 데에 앙심을 품고 이들 부부에게 과도한 신공을 부과했다. 이만저만 과도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복수와 충개가 복수를 결심했을 정도니 말이다.

 

복수 부부는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했다. 충개는 잘 아는 여인을 원영사 집의 살림 도우미로 소개했다. 이 도우미는 노비는 아니었다. 복수가 도우미에게 부과한 임무는 ‘내응’이었다. 적의 성문을 열기 위해 아군 특수부대를 성 안에 잠입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복수는 결정적 순간을 대비해 동지 몇 명을 구했다. 복수는 노비였지만, 지역 기반이 튼튼했던 모양이다. 좋은 일도 아니고 주인을 죽이는 일에 여러 사람들의 지원을 이끌어낸 것을 보면 말이다.

어느 날, 도우미에게서 원영사가 술에 취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이때다’ 싶었던 복수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원영사의 집에 침투해 임신한 원영사의 부인을 포함한 일가족 다섯 명을 살해했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원한이 맺혔으면 이런 일까지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례다.

 

살주 풍조는 살주계의 결성으로까지 이어졌다. 상부상조 정신에 입각한 계는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이지만 이런 문화가 주인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도 악용되었다. 숙종 때인 17세기 후반에는 살주계 몇 개가 수도권 일원에서 적발되었다. 한성 청파와 경기도 광주의 살주계가 《연려실기술》2)에 소개되어 있다.

 

살주계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해서인지, 《연려실기술》에는 양반 특권층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내용들만 적혀 있다. 적발된 살주계의 내부 문서에 ‘양반을 살육하자’, ‘부녀자를 약탈하자’, ‘재물을 약탈하자’는 내용이 쓰여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우리도 양반을 아내로 삼을 수 있다’ 등의 주장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실제로 이런 주장을 했든 안 했든, 양반 특권층 사이에서 이런 풍문이 퍼진 것은 그만큼 살주계에 대한 공포심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들의 저항은 갈수록 확산되었는데 이는 노비 관리비용의 증대를 초래했다. 도망간 노비를 찾고 노비들의 저항을 방어하는 일을 놓고 주인들이 고심함에 따라, 이로 인한 비용이 증가한 것이다. 이것은 주인뿐 아니라 국가 입장에서도 비용의 증대를 의미했다. 노비와 주인의 갈등을 처리하는 데 보다 더 많은 공권력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비용의 증가는 노비주들로 하여금 새로운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다. 노비 대신 몇 달 혹은 1년 정도만 부릴 수 있는 임금노동자를 고용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주인들이 늘어난 것이다. 당시에는 도망노비들이 주로 임금노동자가 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취약한 이들을 고용하는 것이 주인들의 입장에서는 좀더 유리하기도 했다. 그래서 18세기에는 임금노동자의 숫자가 노비 못지않게 증가했다. 국가가 추노를 포기한 것도 이런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노비제도를 해체시키는 동력원이 되었다.

 

각주
1 명종 11년 4월 10일자(1556. 5. 18.) 《명종실록》.
2 《연려실기술》 권36 〈숙종시대 고사본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