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노비제도, 종언을 고하다

구름위 2014. 9. 2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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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제도, 종언을 고하다

 

 

1567년, 선조의 즉위와 함께 사림파가 권력을 장악할 때만 해도, 그들은 깨끗하고 진보적인 정치세력이었다. 종래의 지배층인 훈구파(勳舊派)와 비교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주로 수도권을 거점으로 하는 대규모 부동산 소유자들인 훈구파는 각종 정변에서 공훈을 세운 공신들로 구성되었다. 이에 비해 주로 지방을 거점으로 하는 중소 규모 부동산 소유자들인 사림파는 정상적인 단계를 밟고 권력 핵심부에 진입한 선비들로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훈구파 유형의 지배층은 국가 초기의 불안기에, 사림파 유형은 중기 이후의 안정기에 권력을 잡는다. 15세기 끝자락에 등장한 사림파는 조광조의 활약을 거쳐 1567년에 이르러 비로소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왕조 멸망 때까지 조선 사회를 지배했다.

 

홍길동의 반란 시점과 사림파의 등장 시점이 비슷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사림파가 출현한 시점은 조선왕조의 시스템이 크게 동요하던 때였다. 홍길동이 반란을 결심하고 사림파가 중앙 진출을 결심한 것은 조선왕조가 건국 100여 년 만에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으로 대표되는 반정부운동은 실패했지만, 사림파로 대표되는 체제개혁운동은 성공했다. 사림파가 향약운동을 통해 향촌 질서를 장악한 데서 드러나듯이, 16세기만 해도 이들은 서민들의 환영을 받는 정치집단이었다. 임진왜란 때 사림파가 지역민을 의병으로 조직해 일본군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지방에서 민심을 얻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부터 조선왕조는 외부에서 날아온 연이은 강타에 휘청거렸다. 임진왜란(1592~1599),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7)1)을 거치면서 조선의 국가 시스템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자연히 노비에 대한 통제 시스템도 약해졌다. 노비들의 도망은 조선 전기에도 많았지만, 조선 후기에는 훨씬 더 많아졌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들의 도망을 통제할 힘마저 크게 약해졌다. 여기에다가 노비들의 저항이 한층 거세졌기 때문에, 국가와 주인의 통제력은 더욱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들이 노비들을 다루기 힘들어지면서, 17세기부터는 임금노동자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노비들이 임금노동자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노비와 주인 양측의 필요가 절충된 결과였다. 노비의 입장에서 임금노동자로의 변신은 신분적 속박의 탈피를 의미했다. 특히 도망노비들로서는, 객지에서 입에 풀칠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임금노동자가 되는 길뿐이었다. 노비주 입장에서도 거친 노비를 다루는 것보다는 임금노동자를 다루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이었다. 노비제도가 법전 안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상황 속에서, 현실에서는 노비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실제로는 노비제도가 붕괴하고 있는데도, 법전에서는 그것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은 조선의 사회발전을 제약하는 요인이었다. 새로운 경제현상을 제도적으로 수렴해야만 경제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데, 법전이 여전히 과거의 경제현상을 규정하고 있다면 법률에 의존하는 국가 기능이 헛바퀴를 돌 수밖에 없다. 18세기 이후 조선이란 나라의 최대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 같은 현실과 제도의 괴리에 대해 사림파의 후예들은 치유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들은 새로운 현실을 긍정하고 그에 걸맞은 해법을 내놓기보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기존의 지배질서를 한층 더 강화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김장생(金長生)이 예학을 통해 예법질서 즉 지배-피지배 질서의 강화를 추구한 것은 당시 지배층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을 지지하는 서인당·노론당이 1910년 국권 상실 때까지 주도세력의 지위를 유지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조선 후기의 지배층은 노비제를 근간으로는 사회질서를 억지로라도 유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시대에 역행하는 전략을 고수했던 것이다.

 

지배층이 아무리 체제를 고수하려 해도, 피지배층이 격렬히 저항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노비들의 저항이 격렬해졌으므로, 조선왕조가 좀더 일찍 타격을 입고 새로운 생산관계도 좀더 일찍 정착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공교롭게도 피지배층의 저항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에는 장기간의 태평성대가 유지되었다. 임진왜란의 소용돌이를 틈타 내부 통일을 완성하고 중원을 장악한 만주족 청나라는 소수민족 출신 왕조라는 한계 때문에 중국을 지배하기에도 급급했다.

 

그래서 적극적인 해외정책을 전개하지 못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이 붕괴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새로운 막부(군사정권)를 세웠지만, 이 역시 외부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내부 안정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에 실패한 일본이 또다시 해외진출을 도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전쟁의 무대가 된 조선은 국토가 피폐해졌을 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약해졌기 때문에 청나라·일본과 마찬가지로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17·18세기 동아시아는 임진왜란 이전보다도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되었다.

 

17·18세기 동아시아가 평화로웠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동아시아가 외교적으로 안정되었으며 나아가 그런 관계로 얽힌 각국이 안정되었음을 뜻한다. 나라가 안정된다는 것은 정부나 지배층이 힘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통성이 취약한 정권은 외교관계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정통성을 보완할 수 있다. 이웃나라들의 인정을 받는 정권이라는 이미지는 국내의 다양한 도전을 무마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조선 후기에 지배층이 내부의 도전에도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안정적인 국제정세가 큰 몫을 했다. 시민혁명이 발생한 동시대의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혁명의 기운이 일어나기 힘들었던 것은 동아시아 각국의 지배층이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고조된 노비들의 불만이 노비 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노비제도가 잘 작동될 때에만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나라였다. 노비제 사회를 발판으로 하는 왕조였기 때문이었다. 노비들이 주인의 감독 아래에서 열심히 노동해야만 조선왕조의 재정과 국방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비제도가 일련의 전쟁을 계기로 삐걱거리더니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으니, 조선왕조로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정과 국방의 안정을 도모할 길이 없었다. 19세기에 만연한 삼정(三政,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은 곧 조선이라는 나라의 수취제도가 파탄되었음을 의미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조세 수입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려다가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고 결국 민란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던 국제적 카르텔은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크게 동요했다.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은 남을 돕기는커녕 자국의 유지에도 급급한 나라가 되었다. 또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1868년 이후로는 조선과 일본의 전통적 관계가 종결되었다. 이는 조선왕조를 국제적으로 지탱하던 보호막이 사실상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 등은 조선왕조가 기존 방식으로는 더는 생존할 수 없게 되었기에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하층민의 반란이 아니었다. 군대와 지배층이 그 진원지였다. 그나마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던 국제적 카르텔이 약해지자, 군대와 지배층이 체제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두 사건으로부터 스스로를 근근이 방어한 조선왕조는 1894년에 또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조선왕조 최대의 민중반란인 동학농민전쟁이 그것이다. 동학농민군의 폐정(弊政) 개혁안 중에 노비문서 소각이란 조항이 포함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동학농민군은 이미 사문화된 노비제도를 최종적으로 소각시키고자 했다. 노비제도가 소각된다면 조선왕조도 소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농민군은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조선왕조는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간판을 내렸어야 했다. 정부군이 동학농민군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진 것만 보아도, 조선왕조의 통제력이 이미 와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상황에서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해체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고종이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고 여기에다 불청객 일본군까지 덩달아 가세하면서, 노비제도는 동학농민군이 아닌 제3자에 의해 처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동학농민군이 밀려난 자리는 일본군에 의해 대체되었다. 일본군이 조선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갑오경장(갑오개혁)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의 노비제도는 최종적으로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각주
1 ‘병자호란은 1636년에 발발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병자년(丙子年)은 1636년이 아니냐?’는 오해 때문이다. 하지만 병자년은 음력이고 1636년은 양력으로, 둘의 날짜는 꼭 일치할 수 없다. 병자년은 1636년 2월 7일부터 1637년 1월 25일까지다. 따라서 병자년은 1636년일 수도 있고 1637년일 수도 있다. 병자호란은 병자년 12월 9일, 즉 1637년 1월 4일에 발생했다. 한국의 기존 역사책에서는 ‘병자년은 1636년’이라는 전제로 ‘병자년 12월은 1636년 12월’이라고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 양력과 음력을 혼동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