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사파타의 부활

구름위 2014. 9. 1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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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살리나스트로이카

 

외채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멕시코 경제는 1988년 살리나스가 집권한 이후로 안정세로 돌아섰다. 이는 살리나스 대통령이 경제위기의 극복을 위해 내린 긴축경제와 경제구조 개편이라는 처방 덕분이었다. 멕시코는 국제 경쟁력의 회복을 목적으로, 자본재부터 시작해 중간재, 소비재까지 수입자유화 정책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수출상품의 다양화와 수출시장의 다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일종의 보세가공산업인 마킬라도라를 통해서 멕시코 제조업 부흥의 바탕을 마련했다.

 

그러나 멕시코 경제가 이렇게 성장하고 시장이 개방되면서 무역수지 적자와 이에 따른 만성적인 재정 적자가 발생했다. 살리나스 대통령은 세수입의 증대와 지출 억제, 국영기업의 민영화, 투자의 안정성 보장, 시중 은행의 민영화와 같은 금융 자율화, 집단농장 에히도에 민간자본의 참여 등을 통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려 했다. 이러한 살리나스 대통령의 경제개혁을 옛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구조개혁)'에 빗대어 '살리나스트로이카(Salinastroika)'라고 말하기도 했다.

 

살리나스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어 멕시코 경제가 성장세로 돌아섰다. 이로 인해서 살리나스 대통령은 '조용한 혁명을 일궈낸 세계적인 지도자'라는 칭송을 들으며 세계무역기구(WTO) 초대 사무총장 후보까지 올랐지만, 형 라울 살리나스의 부정부패와 제도혁명당의 개혁파 마르시우 사무총장 암살 사주로 인해서 부인 및 3명의 자녀와 함께 야밤에 미국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의 발효

 

개방정책을 표방했던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은 1992년, 북미자유무역협정1)에 캐나다를 포함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그 후 1994년 1월 1일을 기해서 멕시코, 미국, 캐나다 3개국 간의 NAFTA가 공식적으로 발효되었다. NAFTA는 캐나다, 미국 그리고 멕시코 세 나라에서 자원과 자본, 상품과 서비스의 흐름이 자유롭도록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협정이다. NAFTA는 지금까지의 3국 역내외 교역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혼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역내외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다. 미국이 멕시코와 자유무역을 추진한 이면에는 다른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저급한 생산활동은 멕시코로 보내고 대신 상위직들을 국내에 머물게 함으로써, 생산비용을 줄여 다른 외국 경쟁국들에 대한 우위를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은 멕시코 시장 자체보다 라틴아메리카의 천연자원과 값싼 노동력, 기술 이전, 투자 및 서비스 시장, 더 나아가 잠재력이 많은 내수시장에의 접근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페소화 위기와 테킬라 효과

 

1982년 국유화되었던 18개 은행이 1988년 살리나스 집권 이후 3년 사이에 모두 민영화되었다. 그 사이에 점진적으로 금리의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NAFTA가 발효되었다. '금융그룹'으로 변신한 민간은행들은 주식시장의 붐과 금융자산의 투기열풍에 힘입어 금융저축을 증가시켰다. 은행으로 모인 이 돈은 다시 대기업이나 서비스 부문, 그리고 소비자 신용 부문에 대출되었고, 자동차 같은 내구 소비재, 부동산 그리고 여타 소비 부문은 반짝경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품은 오래가지 않았다. 달러에 대비된 페소화의 가격 차이가 커지면서, 생산성 향상과 국제경쟁력의 강화는 거의 불가능했다. 1994년 12월에 있었던 페소화의 평가절하 조치는 외국투자자들의 신뢰도를 붕괴시켜 내외 자본의 투자심리를 극도로 위축시켰고, 그 결과 페소화 폭락으로 귀결되었다. 100%가 넘는 평가절하를 경험한 멕시코는 미국 재무성과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하는 긴축안정화정책 프로그램을 실행해야 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부실화되었고, 실업이 늘면서 개인과 기업의 파산이 증가했다. 미국은 이러한 페소 위기가 미국과 세계경제에 미칠 효과(테킬라 효과)를 두려워하여 멕시코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멕시코는 새로운 안정화와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었고, 크게 평가절하된 페소화 덕분에 대미무역수지는 흑자로 돌아섰으며, 국내총생산의 증가, 인플레이션의 진정, 임금 하락 폭의 감소, 정부의 재정수지 균형 등의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곧이어 닥친 아시아의 금융위기와 석유가격의 하락으로 멕시코 경제는 다시 침체에 빠져들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NAFTA가 발효되는 1994년 1월 1일을 기해 정부군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치아파스 주의 4개 도시를 전격적으로 점령했다. 치아파스 주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지방으로서, 멕시코, 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정치, 경제적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전체 주민의 30% 이상이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극심한 빈곤과 인권유린에 시달리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반 이상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또한 이 지역의 문맹률은 전국 수준의 3배가 넘는 43%였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멕시코 정부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에 소속된 군인은 대부분 토지가 없는 임금 노동자,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마야 원주민들, 그리고 멕시코 중·북부에서 온 이주민 출신이었다.

 

그런데 멕시코 정부는 1994년 초 1만 5,000명의 군대를, 1995년 초에는 5만이 넘는 군대를 보내서 이 봉기를 무력 진압했다. 특히 1997년, 정부군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근거지인 치아파스 주에서 농민 45명을 살해했다. 이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짐으로써 멕시코 정부는 국제사회로부터 비난받았다.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부활 - 마르코스

 

이러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이끈 사람은 바로 마르코스였다. '토지는 경작하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멕시코혁명의 선봉에 서서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투쟁했던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죽은 지 75년이 지난 1994년 1월 1일,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가장 기초적인 물품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대포밥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의 부를 약탈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우리의 머리를 덮을 지붕 하나조차도, 어떠한 토지도, 어떠한 일도, 어떠한 의료도, 어떠한 식량도, 어떠한 교육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는 또 우리의 정치적 대표를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선출할 수도 없었다. 외국인으로부터의 독립도 없었으며,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한 평화도 정의도 없었다.
-라칸돈 정글의 제1차 선언문 중에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지도자 마르코스.
그는 치아파스 정글에서 원주민 반군을 이끌면서 원주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줄 것을 멕시코 정부에 요구하고 원주민들의 존엄성을 주장했다.
 
이 선언문에는 스페인의 식민통치 4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농민이 억압당하고 착취당해왔던 라틴아메리카의 암울한 모습이 담겨 있다. 사파티스타들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려 했던 사파타 정신을 계승하여, 70여 년간 계속 집권해온 제도혁명당(PRI)의 일당독재와 멕시코를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시키려는 신자유주의의 음모에 대항했다.

 

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이끈 마르코스는 스키 마스크를 쓰고 항상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장을 누비며 전 세계에 지지를 호소했다. 제2의 사파타 혹은 제2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마르코스는, 그 출신은 물론 이름마저도 베일에 싸인 신비의 인물이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NAM)을 졸업하고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에서도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졸업 후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치아파스 주 라칸돈 정글의 빈민촌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하면서, 이 지역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1980년 니카라과 소모사 정권이 축출된 직후, 니카라과에 머물며 농민조합을 조직하는 등, 산디니스타 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이자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민주주의, 자유, 그리고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치아파스 원주민의 비참한 현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전 세계를 향한 이러한 마르코스의 홍보전략은 멕시코 정부에 대한 교묘한 압력이 되었다. 이러한 탁월한 언론 플레이 덕분에 멕시코 정부는, 마르코스와 정부 관계자들과의 회담 이후 정부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휴전을 선언했다.

 

각주
1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North American Free Trade Association, 또는 TLCAN, Tratado de Libre Comercio de América del No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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