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눈카 마스》

구름위 2014. 9. 1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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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청산(1)

 

《눈카 마스》

 

알폰신 대통령이 설치한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가 1984년 9월에 펴낸 보고서 《눈카 마스》에는, 16세부터 65세가량의 실종자 8,960명의 명단과 비밀 수용소 약 340곳의 위치 및 특성이 수록되었고, 불법적인 탄압에 가담한 군인의 수는 1만 5,000명 이상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납치되었는지, 수감자들에게 어떻게 고문이 자행되었는지, 육·해·공군과 경찰관할의 비밀 수용소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눈카 마스》가 확인한 실종자 9,000여 명 가운데 86%가 35세 이하의 청년층이었고, 30%가량이 여성이었으며 그 중 10%가 임신 중이었다. 실종자 가운데는 노조활동가들뿐만 아니라 변호사, 지역상공회의소 의장, 지방 판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군부 통치자들이, 사회혁명을 원했던 불순분자, 단순히 임금인상을 요구한 노조 지도자, 신부, 목사, 가톨릭 신자는 물론, 평화주의자와 인권단체 활동가들까지도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나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적'으로 규정하여 모두 없애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눈카 마스》는 또한 게릴라 조직과 관련이 없는 임산부와 아이들까지 고문당했다는 사실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수감된 임산부가 출산한 영아나 납치된 부부의 어린아이들을 강제로 입양시키는 엽기적인 범죄의 유형도 밝혀냈다. 이러한 강제입양은 "나쁜 환경으로 인해서 불순한 저항자가 생겼다"라는 잘못된 확신을 가진 군사정권이 '좌익사범'을 양성하는 불온한 가정환경으로부터 영, 유아들을 분리시키고자 한 만행이었다.

 

이처럼 《눈카 마스》는 군부독재의 무차별적인 납치와 수감, 고문과 살인 등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하면서 당시에 국가 폭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해자 처벌과 '카라 핀타다'의 반란

 

그러나 《눈카 마스》에서 밝힌 가해자들의 만행에 대한 처벌과 판결은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의 권한 밖이었다. 이 위원회는 단지 그들이 자행한 탄압의 유형이 어떠했고 피해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만 조사하고 후속 재판의 필요성을 권고하는 기관일 뿐이었다.

 

198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연방항소 법원은, 비델라 장군을 비롯한 9명의 군사통치위원회 지도부에게 종신형부터 징역 3년 9개월까지 중형을 선고했다. 이에 대법원은 1986년 12월 이 결정을 최종 승인했다. 이에 따라 2,000 명가량의 중, 하급 장교들은 자신들에 대한 처벌을 걱정해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향후 60일 이내에 모든 기소절차를 마무리해야 하는 일종의 제한규정이었던 '기소종결법(Punto final)'이 1986년에 통과된 후, 300여 명에 이르는 장교들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수많은 사건들을 처리하기에는 기간이 매우 짧아서, 상당수의 납치와 학살의 책임자들은 이 법으로 인해서 오히려 처벌받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고문과 억압행위를 자행한 명령계통의 말단에 있었던 장교들에게 인권유린의 책임이 전가되는 분위기가 감돌자, 일부 장교는 크게 반발했다. 이들의 반발은 특전부대인 카라 핀타다(Cara Pintada)1)의 반란으로 표면화됐다. 이들의 반란으로 1987년 의회에서 '강제명령에 따른 복종법(Obediencia debida)'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 '더러운 전쟁'을 수행한 중, 하급 장교의 대다수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군부의 위협 앞에서 원칙을 못 세우고 크게 흔들린 알폰신 정부는, 임기를 6개월 앞두고 조기 퇴진했다.

 

내 자녀들은 어디에 있는가? - 오월광장 어머니회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7년 4월 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월광장에 14명의 어머니가 비델라 대통령에게 아이들의 행방을 묻는 서신을 전달하고자 모였다. 경찰들의 해산 요구에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경찰서, 내무부, 사법부 등 관계되는 모든 기관의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이들은 '오월광장의 미치광이들'이라고 조롱받기도 했고, 이들의 행동은 '반(反)애국적 캠페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머리에 흰 손수건을 두르고 목에는 실종자 아이들의 사진을 담은 패를 걸어, 침묵하는 권력에 저항하려 했다. 이렇게 실종자의 어머니들은 대다수의 무관심 속에 '오월광장 어머니회(AMPM)2)'를 결성해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30분에 오월광장에 모였다.

 

그 후 말비나스 전쟁의 패배로 군사정권이 퇴진하고 1983년 12월에 알폰신 정부가 들어서자,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우뚝 솟았다. 이들은 1986년 군사정권의 인권탄압에 책임 있는 상당수의 지휘관에게 책임을 면해주는 '기소종결법'과 '강제명령에 따른 복종법' 폐지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또한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알폰신 정권과 메넴 정권의 정치적 타협을 수용하지 않고, 실종자 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죽음의 비행

 

 


'죽음의 비행'의 증언자 아돌포 실링고.
2005년 3월, 스페인 검찰은 아르헨티나 전직 해군 대위 실링고에게 군부독재 시절 저지른 반인륜 범죄혐의로 9,138년의 형량을 구형했고, 그 해 4월 스페인 법원은 64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알폰신 대통령에 이어 등장한 메넴 대통령은 화합을 언급하며 기소 중이거나 복역 중인 군인을 특사로 풀어주었다. 메넴은 어두운 과거는 덮어두자며 국민에게 망각을 호소했다. 그는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선진국에 진입하겠다는 황당한 슬로건으로 국민을 호도하는 한편, 1991년 비델라 장군까지 특사로 풀어주었다. 또한 비밀 구금, 고문과 살인으로 4,000명이 희생된 해군기술학교를 추모와 국민화합 기념공원으로 개조하려 했다. 이에 '오월광장 어머니회'를 비롯한 많은 인권단체가 강하게 항의했다. 이들은 이곳을 군부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종의 박물관으로 보존할 것을 주장해 결국 정부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신에 라플라타 강둑을 기념공원 및 조형물 예정지로 선정했는데, 이곳은 '죽음의 비행'이라고 알려진 사체 유기의 현장이었다. 1995년 한 전직 해군 대위는, 해군기술학교 수용소에 근무하면서 살해되거나 의식을 잃은 수감자를 한 번에 15~20명씩 비행기에 태워 바다에 던지는 끔찍한 임무를 맡았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처리한 사람의 수는 1,75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끊임없는 문제 제기와 항의, 반발이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알폰신과 메넴 정권하에서 진상규명과 처벌에 대한 관심과 의지는 점점 약해졌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입법 활동이 뒤따르면서 '더러운 전쟁'에 대한 청산논의는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2003년 아르헨티나 의회는 알폰신과 메넴 정부의 사면법 폐기를 결의해 또다시 사법적 판결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각주
1 카라 핀타다(Cara Pintada): '색칠된 얼굴'이라는 의미로 '특전부대 요원들의 위장된 모습'을 말한다
2 오월광장 어머니회(AMPM): Asociación Madres de Plaza de Mayo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과거사 청산(2)

 

3W와 3F의 나라

 

칠레는 좋은 날씨(Weather), 아름다운 여성(Woman), 질 좋은 포도주(Wine)가 유명해 3W의 나라, 또는 생선(Fish), 꽃(Flower), 과일(Fruit)의 생산이 많아 3F의 나라로 불리기도 한다.

 

칠레는 지리적으로 남미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북부는 사막, 동부는 안데스산맥, 남서부는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고립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칠레는 다른 남미국가들과 공통적 성격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남미국가들과 상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칠레는 또한 라틴아메리카 출신 5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파블로 네루다를 배출한 나라로, 문학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칠레는 무엇보다도 유구한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19세기 초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후,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는 군부의 정치 개입 등으로 엄청난 정치적 혼란을 겪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했다. 반면에 칠레는 1930년 이래 지주와 기업가, 온건 중도 계급, 사회주의 노동자의 세 집단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민주적인 토대 아래 1970년 칠레에서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피노체트 정권의 만행

 

그러나 피노체트는 1973년 9월 11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는 정권을 잡은 후 "이 나라에서 나뭇잎 하나라도 내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라고 할 만큼 칠레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피노체트는 1973년 12월까지 쿠데타 직후 3개월 동안 1,800여 명을 처형했다. 공산당원을 포함한 좌익계 인사들을 체포하여 공설운동장에서 사살하는 바람에, 옆에 흐르는 마포초 강이 피로 붉게 물들었을 정도였다. 의회 내 좌파세력을 척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 조치는, 정당정치의 활성화라는 칠레정치 고유의 특성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 직속으로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국가정보국(DINA)'을 창설하여, 이후 3년여 동안 자신에 반대하는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소탕했다. 피노체트의 범죄행위를 기록한 기소장에는 피노체트가 칠레, 스페인,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우루과이,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등지에서 4,000여 명을 살해하는데 간여했으며, 강간, 손발톱 뽑기, 불로 지지기, 썩은 음식과 죽은 동료들의 인육 먹이기 등의 조직적인 고문 등에도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피노체트는 자신에 반대하는 자들을 외국까지 쫓아가 암살했는데, 이를 위해 비밀경찰들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의 군부독재자들과 일종의 '국제협력 군경테러조직'을 창설했다. 또한 좌익분자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이들 국가 간에 반정부 인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합동작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시카고 보이스

 

피노체트는 국가 기간산업의 국유화 등 아옌데가 추진했던 경제정책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면서 경제를 파탄상태로 몰아넣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훈련받은 자유시장 경제주의자들(일명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을 영입하여 시장경제에 의한 자원배분과 경쟁의 논리를 도입했다. 이와 함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공무원의 감원,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의 축소 등을 통해 긴축재정을 시도했고, 세율을 조정하여 세입을 늘렸다. 또한 금융부문에서도 인플레이션 해소를 위해 통화량을 억제하고 금리 자율화 등 규제완화를 단행했다. 관세인하와 수입절차의 간소화 등 무역자유화 정책도 도입하여 경제안정에 주력했다.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아옌데 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500개에 달하던 국영기업의 절반 이상을 원소유주들에게 반환했고, 나머지는 공개입찰을 통해서 국내기업이나 해외기업들에게 매각했다. 또한 그동안 몰수, 접수되었던 토지를 본래의 지주에게 반환시켜, 아옌데 정권에 의해 시행되었던 국유화와 토지개혁을 파기하고 원상태로 회복시켰다.

 

이러한 시카고 보이스의 경제정책은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여, 쿠데타가 발생했던 1973년 9월에 500% 이상으로 뛰었던 물가가 1976년에 180%로 내렸고, 1982년까지 10%대로 진정되었다. 또한 경제성장률은 1976~1981년의 기간 동안 7%대를 유지했다. 농업에 대한 집중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땅들이 연어 양식과 꽃, 과일 재배지로 변모했다. 수출 증가와 농업 생산의 향상에 중점을 두었던 피노체트의 경제정책이 그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피노체트의 경제정책은, 시장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개입정책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카고 보이스' 자신들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경제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피노체트의 무자비한 철권 통치에 힘입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경제정책은 후에 실업 급증이라는 부작용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피노체트 정권의 몰락

 

피노체트 군부정권에 대항하여 1983년 기독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연합(AD)이 결성되었다. 피노체트는 1984년 6월, 점점 거세지는 반정부 투쟁에 대처하기 위해서 위수령을 발동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노체트의 강압조치에도 불구하고 반정부세력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커져만 갔다. 1985년에 11개 이상의 보수야당들이 완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합의서를 발표했고, 1986년 4월에는 200여 개의 사회단체가 '시민회의'를 결성했다. 이러한 야당과 시민단체들에 의한 저항에 직면한 피노체트는 1988년 10월, 자신의 집권 연장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중도와 좌파성향 정당들이 '아니오를 위한 정당연합(Concertación de Partidos por el 'No')'을 결성하여 국민을 상대로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에 반대하는 운동을 펴서, 54%의 국민이 이에 지지를 보냈다.

 

피노체트는 비록 국민투표에서 패했지만 1998년 3월까지 군 통수권자로서 역할을 인정받았고, 그 이후에는 종신제 상원의원으로서 면책권도 부여받았다. 그리고 군부가 국정에 다양하게 개입할 수 있도록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존속시켰으며, 더 나아가 상원의원 47명 중 9명의 상원의원을 자신이 임명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78년 동안 군부가 저지른 인권침해에 면죄부를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사면법을 제정하여, 자신과 추종자들에게 형사소추를 할 수 없게 했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보호해줄 인물들을 대법관에 임명했다. 이처럼 칠레의 민주주의는 피노체트에 의해 감시받고 보호받는 민주주의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하에 1989년 12월 피노체트와 공산당을 배제한 대통령 선거에서 기독민주당의 아일윈 후보가 당선되었다. 17개 야당연합의 단일 후보로 출마한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의 아일윈 후보가 1차 투표에서 55.2%를 획득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일윈은 집권하자마자 400명의 정치범 가운데 43명을 특별사면조치 했으며, 1973년 이후 단절되었던 소련, 동독, 체코 등과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그는 또한 멕시코와의 관세장벽 제거와 임금인상, 전신, 철도 및 송유관 건설사업 등을 통해서 1992년에 칠레의 경제성장률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가장 높은 9.7%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을 했다.

 

 

'아디오스 헤네랄!(Adiós! General!, 장군이여 안녕!)'
1988년 국민투표에 앞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진을 요구하는 벽보가 칠레의 산티아고 시내에 붙어 있다.
 
레틱 보고서

 

한편, 아일윈 대통령은 1990년 9개월 동안,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쿠데타와 17년간의 군부독재 기간에 벌어진 인권유린 사례에 대한 조사를 담당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레틱(Rettig)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레틱 보고서〉를 발간하여 4,000건이 넘는 인권침해 사례를 수집, 공개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진실규명보다는 과거의 상처에 대한 화해만을 강조하여, 가해자들이나 인권침해에 개입했던 국가기관과 그 책임자들의 책임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또 사망이나 실종사례만 조사했을 뿐, 체포, 구금, 고문, 추방 등 그 이상의 인권침해 사례를 다루지 않아, 피해 관련자들과 인권단체가 주장한 과거사 청산 요구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아일윈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희생자와 그 유가족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사죄하고 범죄를 저지른 군 관계자가 사과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대화를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아일윈 대통령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피노체트는 "군인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다치는 일이 생기면 그날로 헌법질서는 끝날 것이다"라고 위협했다. 이처럼 레틱 위원회의 활동은 과거사 청산을 미완성 과제로 남겨놓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피노체트 체포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통한 과거청산이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인권단체와 피해자들은 법적수단을 통해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1978년 피노체트 정권이 정한 사면법은 많은 제약을 낳았다. 1998년 8월, 레틱위원회 이후 정부와 군, 민간 인사 등으로 구성된 대화위원회가 소집되어 활동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피해자 가족들의 목소리가 배제되어 있었고 군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될 수 있는 인적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8년 10월, 신병 치료차 런던의 한 병원에 머물고 있던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전격 체포되었다. 스페인의 가르손 판사가 영국과 스페인이 체결한 범죄인 인도협정과 유럽테러협약에 의거, 피노체트를 과거 집권 때 스페인 시민 등 94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는 칠레에서 피노체트를 보호하고 있었던 다양한 보호막이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피노체트가 체포된 후 아일윈 정부에 이어 집권한 프레이 정부는, 피노체트가 스페인에서 사법처리되는 것을 반대하고 본국으로 귀환을 추진하려 했다. 프레이 정부는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내세워 영국정부에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스페인의 요구가 법적인 하자가 없음을 확인했고, 또 영국의 상원 5인 재판부 역시 피노체트가 면책특권을 갖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영국 상원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상원 재판부는 피노체트의 이의를 받아들여 종래의 5인 재판부에서 인원을 늘려 7인 재판부를 구성, 심리한 끝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피노체트의 귀국을 허용했다.

 

1999년 집권한 라고스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보상을 강구함과 동시에 피노체트가 임명한 대법관 상당수를 교체했다. 2000년 3월, 칠레 대법원은 영국에서 칠레로 돌아온 피노체트의 면책권을 박탈해 피노체트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을 열었으나, 치매라는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칠레 사법당국은 남미지역에서 반체제 인사 9명을 납치해 그 중 1명을 살해한 혐의로 피노체트를 재판에 회부하여, 피노체트의 면책권을 박탈하고 가택 연금시켰다. 이에 피노체트는 3,500달러의 보석금으로 가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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