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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전쟁

구름위 2014. 9. 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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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는 1975년, 석유파동의 여파로 수출이 감소하고 외환위기에 직면했다. 이로 인한 경제파탄과 사회불안은 좌우익 테러와 전국적인 파업, 더 나아가서 군부 쿠데타를 불러왔다. 1976년에 군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의회를 해산시키고 페론정권을 붕괴시켰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이 군부 쿠데타가 지난 20년간 혼란에 빠져 있던 아르헨티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 국민과 대다수 정당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은 군사정권은, 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했던 페론시대의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폭력을 종식시키고 만성적인 정치적 위기와 '아르헨티나 병'이라고까지 불린 만성적인 경제침체를 종식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은, 고문이나 살인과 같은 행위들을 '공산주의, 체 게바라주의, 비(非)기독교적 생활양식으로부터 아르헨티나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 조치'로 정당화했다. 또한 군대, 경찰, 정보기관, 아르헨티나 반공동맹과 같은 준(準)군사조직들이 좌익 게릴라를 소탕하는 데 앞장섰고, 페론파를 비롯한 반정부단체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소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리는 비델라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해졌고, 수만 명의 시민이 실종되거나 국가보안군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이 '더러운 전쟁'으로 말미암아 군부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바뀌었다. 아르헨티나의 중산층들은 군사정권을 사회적 혼란에 대처할 수 있는 집단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전제적이고 강압적인 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이러한 국민의 거부감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경제회복을 위해 국영기업의 축소 및 민영화, 긴축 재정, 자율적인 가격제도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해외 금융자본이 엄청나게 유입되었고, 제조업 부문의 수출이 감소되어 무역수지가 악화되었다. 1978년에는 월드컵 대회를 개최하면서 새로운 스타디움 건설과 도시개발사업으로 경제를 활성화하려 했지만, 1980년이 되면서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섰고 외채도 급증했다.

 

 

 

'실종자들을 산 채로 돌려달라!'.
1981년 군부독재에 의해서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대책을 요구하며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괴이하고 불필요한 전쟁 - 포클랜드 전쟁

 

군사정권의 강압정치와 '더러운 전쟁'으로 이어지는 인권탄압, 그리고 악화되는 경제상황 속에서 1980년에 비델라에 이어 비올라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상황의 악화와 정권내부의 분열로 인해서 1981년 12월, 비올라는 그의 정적이었던 레오폴도 갈티에리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레오폴도 갈티에리 역시 집권 후 군부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 경제상황에 있어서도 450억 달러의 외채, 1000%에 달하는 인플레이션, 15%의 실업률이라는 총체적인 경제난국을 해결하지 못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레오폴도 갈티에리 정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 했다. 이것이 바로 아르헨티나의 오랜 숙원이던 '영국령 포클랜드(Falkland, 아르헨티나인은 말비나스(Malvinas)라고 부른다)의 탈환'이었다.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남쪽 끝에서 동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영국에서 1만 4,000킬로미터 떨어진 섬이다. 지리적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반면에, 영국으로부터는 무려 2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섬이다. 이 섬은 1600년 네덜란드인 세발드가 발견한 후 프랑스군이 점령했다. 그러나 1765년 영국이 원정대를 파견하여 국왕 조지 3세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영유권을 스페인에 양도했다. 스페인은 1770년, 이 섬에 사는 영국인을 축출했다. 그 후 영국과 스페인은 이 섬을 서로 자신의 소유라며 주장해왔다. 1828년 아르헨티나는 말비나스 섬에 정착촌을 건설하여 자신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법적 근거로 삼았고, 1833년에 아르헨티나군이 말비나스를 점령하자 영국 원정군이 아르헨티나군을 축출하여 영국이 현재까지 점령해왔다. 비록 아르헨티나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유권 문제를 제기하여 영국과 협상을 계속했지만, 섬에 거주하는 영국인의 반대로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2년 4월 2일에 아르헨티나 군부는 말비나스 섬을 기습 공격해 소수의 영국 왕실 경비대원들을 쉽게 물리쳤다. 이 공격은 영국인을 경악시켰고 아르헨티나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 당시 경제문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영국의 대처정부는, 석유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영역을 확보하고 국토를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보여주고자 아르헨티나에 대한 공격에 단호한 의지를 보이면서 반격에 나섰다. 이 전쟁은 영국군도 250여 명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지만, 2,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아르헨티나가 영국에 항복하면서 개전 75일 만에 끝났다.

 

이 포클랜드 전쟁으로 인해서 아르헨티나는 약 20억 달러의 전비 지출과 이로 인한 경제악화는 물론 외채문제가 더욱 심각해졌고, 국민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정치적으로도 군부 내의 분열은 갈수록 더 커졌다.

 

알폰신 대통령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말비나스 전쟁의 패배로 불명예 퇴진하고, 레이날도 비그노네 장군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 1983년 선거에서 급진시민연맹(UCR)의 알폰신이 세력이 약해진 페론당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460억 달러의 외채와 600%의 인플레이션 등을 이어받은 알폰신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아우스트랄(Austral)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민간부문의 가격, 임금, 공공요금률, 환율의 동결, 강제저축을 통한 세수의 증대, 새로운 화폐 아우스트랄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정책이었다. 하지만 초기에 약간의 효과만 있었을 뿐 이익집단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알폰신 대통령은 기업과 노동자들 모두에게 뼈를 깎는 희생을 요구했으나 노조는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알폰신 집권 내내 노조는 정부와 대결하기 위해 자본가 단체들과 손잡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이기도 했다. 이는 노조와 기업이 경제구조의 개혁과정에서 고통은 분담하지 않으면서 개혁에 무임승차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갖고 시작 알폰신 정부는 결국 1987년 선거에서 야당인 페론당에 패했다. 1988년에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600억 달러에 달했고, 1989년에는 인플레이션이 5,000%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실패와는 반대로 알폰신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으로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를 위원장으로 한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CONADEP)1)'를 설치하여, 실종자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을 실시하게 했다.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는 아르헨티나 주요 지방도시에 지부를 두어 진상조사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시티, 카라카스, 뉴욕, 파리, 마드리드 등지에서도 증언을 채록했다. 이 위원회는 증언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비밀수용소가 있다고 알려진 경찰서나 군사시설들을 조사했고, 비밀 공동묘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법적 청산작업은 엄청난 음모를 자행한 자들로부터 수많은 협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5만여 쪽에 달하는 최종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고, 《눈카 마스(Nunca Más, 더 이상은 안 돼)》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각주
1 실종자 진상조사 국가위원회(CONADEP): Comisión Nacional Sobre la Desaparici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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